소설리스트

대몽주-685화 (685/1,214)
  • 685화. 무녀의 사명

    심협은 작은 묘목을 바라보는 동안 천지가 갑자기 뒤집히고 겹겹의 숲에 둘러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은 온통 연록색으로 가득했다.

    체내에 있던 힘이 저절로 운공하기 시작하더니 단전이 초록빛으로 환하게 빛났고, 이내 몸은 초록색 빛에 휘감겼다. 동시에 주위에서 초목의 정화가 담긴 천지영기가 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심협은 몸이 물속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었고,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게 됐다.

    한편, 이를 본 사람들은 그의 변화에 얼굴빛이 바뀌었다.

    “만아, 네가 겁도 없구나! 어찌 우리 신목족의 비술인 신목은택을 외부인에게 전수한 것이더냐?”

    장로 운중월(雲中月)이 굳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그러나 무만아도 어찌 된 영문이니 몰라서 멍하니 심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만천성과 운소노는 운 장로가 이 정도로 노하는 것은 처음 봤기에 놀라는 와중에도 가늘게 떨었다.

    한편, 무규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무만아와 심협을 번갈아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애제자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무만아의 반응으로 보아 분명 심협에게 신목은택을 전수한 것은 그녀가 아닐 터였다.

    이런 생각에 내심 안도했다.

    잠시 후, 심협의 몸을 감싸고 있던 초록빛이 점점 사라지더니 주변의 천목영기도 더는 그의 몸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심협의 두 눈에서 번득이던 초록빛도 사라졌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심협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무만아 등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특히 운 장로는 거의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심협은 자신이 넋을 잃었을 때 무슨 무례라도 저질렀나 싶어 황급히 물었다.

    운중월이 막 호통을 치려는데, 무규호가 손을 내밀어서 막았다.

    “자네는 신목은택 비술을 익혔더군. 어디서 배운 건가?”

    무규호의 물음에 심협은 상황을 눈치챘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수의 이끌림에 신목은택 비술을 사용한 것이리라.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대당의 원천강 국사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 답에 무규호는 의외라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건방지구나! 대당 관부의 핑계를 대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더냐? 대당 국사가 어떻게 우리 신목족의 비술을 알고 있다는 것이냐?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운중월이 크게 화를 냈다.

    “국사께서도 그저 사문에서 전수받은 것이라 하셨으니 자세한 내막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아직도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화가 끝까지 난 운중월은 진선기의 경지를 개방하여 거센 기운으로 심협을 뒤덮었다. 이에 심협은 말할 것도 없고 무만아 등도 적지 않게 놀랐다.

    “운 파파!”

    무만아가 황급히 외쳤지만, 지금 이 노파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기를 가진 심협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라 이제 그녀는 심협이 신목족에 나쁜 마음을 품고 들어온 것이라 확신했다.

    무규호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리지도, 맞장구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전력으로 맞섰지만, 엄청난 압박감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단전 안에 있던 마기가 침투하면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니 부디 손을 거두어 주십시오. 제 체내의 마기가 폭주하기라도 하면 신수의 안정도 보장 못 합니다!”

    “흥! 이제는 협박까지 하는 것이냐? 내가 널 죽이면 네 체내의 마기가 얼마나 많은 파동을 일으키는지 어디 한번 봐야겠구나!”

    운중월은 손을 들어 공격하려 했고, 심협은 발에서 달빛을 뿜어내며 사월보로 물러났다. 그대로 둔술을 펼쳐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때, 무규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멈추시오!”

    운중월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공격을 멈추었으나, 여전히 기세를 뿜어내 심협이 조금이라도 삼상치 않은 낌새를 보이면 죽일 생각이었다.

    심협은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다. 체내의 마기가 꿈틀거리고 있어 제압하는 동시에 진선기 수사의 살기가 담긴 압박감에도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방금 신목은택을 원천강에게서 배웠다고 했던가?”

    무규호가 심협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심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도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운 장로, 잠시만.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소.”

    무규호가 손을 들어 말리자 운중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떴다.

    “운 장로는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 우리 일족의 수많은 비화에 대해서는 무신단을 지키는 저 노인네들보다 많이 알지는 못한다오.”

    무규호가 웃으며 말했다.

    “족장님, 그 말뜻은……?”

    운중월도 이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했다.

    “그렇소. 과거, 일족이 이주할 때 극히 일부는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다른 종문에 투항했소. 아무래도 대당 국사 원천강은 그들의 후예인 듯하오.”

    외부인들 앞에서는 일족의 일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기에 그는 요점만을 말했고, 이에 운중월은 여전히 의혹이 남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기운을 완전히 거두자 압박감이 사라지며 심협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만아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심협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 무엇을 보여주려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건가요?”

    “어리석긴. 당연히 신수가 아니겠느냐.”

    무만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슬쩍 다가가서 중앙의 작은 묘목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던 그녀도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스승님, 왜 하나가 없나요?”

    심협과 강신천은 그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하나가 없다는 거야? 신수에 열매라도 열렸어?”

    운소노가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물었다.

    “스승님, 신수의 잎사귀가…… 어째서……?”

    무만아의 두 눈이 붉어졌다.

    “잎사귀 하나 없는 게 무슨 대수……라고?”

    강신천은 투덜거리던 중 심협의 싸늘한 눈빛을 보고야 목소리를 낮췄다.

    ‘무만아의 표정만 봐도 예삿일이 아닌 게 분명하건만, 저자는……?’

    심협은 강신천의 반응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네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수에 이상이 생기더니 잎 하나가 누렇게 변했고, 49일 만에 떨어졌다.”

    운중월의 말에 무만아는 순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제 탓이에요. 이건 다 제 탓…….”

    “천성 소저, 만아 소저는 왜……?”

    심협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자 서둘러 만천성에게 전음을 보내 물었다.

    만천성은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전음으로 답했다.

    “만아는 신목족의 무녀예요. 어렸을 때부터 전대 무녀인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신수를 섬겼죠. 그러다가 전대 무녀님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만아가 줄곧 신수를 지켜왔는데, 이번에 만아가 떠난 후에 왠지 모르겠지만 신수의 잎사귀가 갑자기 시들더니 떨어졌어요.”

    심협은 그제야 무만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규호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울지 말아라. 이번에는 내가 널 놔준 것이니 따지고 보면 내 탓이다.”

    그의 말에 무만아와 운중월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바보 녀석, 네가 도망가는 걸 내가 정말로 몰랐을 거라 생각하느냐? 내가 막으려 들었다면 너는 신목림을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규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럽게 말했다.

    “……그 아이의 기척을 숨겨준 게 족장님이었군요.”

    운중월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들을 속여서 미안하네.”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아람(阿嵐)은 평생 신수를 지키며 신수를 위해 살았고, 결국 신수 때문에 죽었지.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신목림을 떠나본 적이 없네. 그래도 그녀의 곁에는 만아가 있었지. 허나 만아는 아직 너무 어려. 평생 신수만 지키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네. 적어도 단 한 번만이라도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가 결국은 신목족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네.”

    무규호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사라지고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애제자를 위해서라면 미안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무녀입니다. 신수를 지킬 사명이 있단 말입니다.”

    운중월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무녀였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영원히 신수 곁을 지키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명이라……그런 사명이 감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왜 만아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무규호는 가볍게 탄식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원망이 아니라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운중월은 그 말에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한참 뒤에야 말을 꺼냈다.

    “족장님, 지금의 발언은 족장의 신분과 책임에 맞지 않습니다. 무신단에 정식으로 건의하겠습니다.”

    “나도 바라던 바일세.”

    운중월은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족장님, 신수의 나뭇잎이 떨어진 것이 무엇을 예고하는 건지 모르시나요?”

    “마지막으로 신수의 잎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아람을 잃었고 만아는 어머니를 잃었지. 이게 무슨 뜻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무규호는 쓰게 웃었다.

    “그걸 아시면서도……?”

    운중월의 말은 끝나기도 전에 막혔다.

    “그래서 우리 신목족에도 개혁이 필요하네. 규칙만 고집하다가는 다시 비극이 반복될 뿐이야.”

    무규호가 침울한 목소리로 내뱉은 뒤 입을 닫자 운중월도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스승님…….”

    “족장님, 그렇다면 우리 일족이 목숨과 존엄으로 지켜오던 신념과 맹세는 어쩌란 말입니까?”

    운중월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신목족의 맹세는 내 하루도 잊은 적이 없네. 다만…… 우리 일족은 홀로 너무 오랜 세월 신수를 지키며 치우의 침략에 맞섰네. 그러는 동안 너무도 많은 이가 죽었지. 그러니 개혁할 때가 온 것이네.”

    심협은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설마 일족의 문을 열어 외부인을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운 장로, 무신단이 다시 폭주한다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결국 죽게 될 걸세.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그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우리의 나약한 힘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 우리 같은 어른들이 모두 죽으면 다음은 만아, 천성, 소노 같은 아이들의 차례가 될 것이야.”

    무규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팡이를 쥔 운중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 운소노를 보는 그녀의 눈빛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족장님, 이 일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일족의 다른 어르신들은 바깥 세계의 일족에 깊은 근심과 적대감이 있으니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운중월도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다.

    “일족 내에서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세. 운산해(雲山海) 장로도 내 생각을 지지하고 있지. 사실 이미 다른 일족 제자를 모집하여 쓸 만한 인재들을 길러서 일족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네. 다만 아쉽게도 모인 인원이 너무 적었고, 그중에서 재목이 될 만한 자는 더 적었을 뿐이지.”

    그 말에 심협은 내내 품어왔던 의문 중 하나가 마침내 풀렸다. 원구 또한 무규호가 말한 인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무 족장님, 운 선배님, 두 분의 말씀을 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인천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봤다.

    “백 년 전, 마족의 내란으로 치우의 마환은 이미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한데 어찌 아직도 마환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강신천은 신목족이 너무 오랫동안 폐쇄된 상태로 지내느라 외부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

    허나 무규호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말한 상황은 우리도 모두 알고 있네. 허나 마환이 사라졌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군.”

    “어째서입니까?”

    “우리 신목족이 폐쇄적이긴 하나 두 귀를 모두 닫고 있지는 않다네. 각 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고 있지. 인, 마, 선 세 종족의 동맹 아래 마족의 침공은 확실히 갈수록 줄어들었고, 규모도 이전보다 많이 축소되었지. 허나 그렇다고 삼계가 정말로 안정되었는가?”

    무규호의 물음에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질문은 자신이 줄곧 생각하던 걱정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선배님의 말씀은…… 마환이 겉으로는 사라졌지만, 삼계는 사실 안정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적어도 인간족 내부에서는 이전까지 숨겨져 보이지 않았던 모순들이 더 많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각 주 소국들끼리의 분쟁과 전란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네.”

    “인간족은 본래 매우 복잡합니다. 마족이라는 외부의 압박이 갑자기 사라지니 내부의 모순이 드러난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요. 허나 천하가 점차 안정되고 혼란 끝에 결말이 나면 자연스럽게 안정되지 않겠습니까?”

    “강형, 천하가 안정되고 혼란 끝에 안정이 온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오? 그 배후에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이 따르는 법이오. 대지가 다시 어지러워지고 곳곳은 피로 물들면서 세상에는 탁한 기운이 올라온다면 마족이 어지럽힐 때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여기까지 말한 심협은 스스로도 어리둥절했고, 은연중에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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