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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84화 (684/1,214)
  • 684화. 숲으로 들어가다

    백발의 노파와 시선을 마주친 심협은 이제 자신들 차례임을 알아챘다.

    “선배님…….”

    강신천이 먼저 나섰지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검은 덩굴이 갑자기 그의 발목을 붙들고 들어 올려 허공에 거꾸로 매달았다.

    “허락도 없이 신목림에 침입했으니 이는 죽을죄다. 알고 있느냐?”

    짙은 살기가 몸에서 뿜어져 나왔는데, 방금 전 운소노 등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선배님, 어찌 이리 도리가 없으십니까? 이곳은 신목림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설령 그렇다한들 실수로 잘못 들어올 수도 있는 법이거늘 어찌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않고 이리 대하신단 말입니까?”

    심협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억울한 척하지 마라. 너희가 무만아, 그 아이를 따라서 온 외부인인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런데도 잘못 들어왔다? 더구나 네놈에게는 마기가 느껴지는구나. 살려둘 이유가 없지.”

    심협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마기는 일단 제압되었기에 가만히 있으면 눈치챌 수 없다. 한데 노파가 이리 말하는 것을 보면 경지가 한없이 높거나 아까 자신이 마기를 제압할 때 이미 그들을 발견했던 것이리라.

    어느 쪽이든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말로 미루어 무만아도 이미 발각된 게 분명했다.

    “만아 언니가 돌아왔나요?”

    이 소식을 들은 운소노의 눈이 반짝거렸다.

    운 장로는 그녀를 무시한 채 심협을 노려보며 물었다.

    “순순히 잡히겠느냐,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겠느냐? 선택해라.”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심협은 얌전히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알아서 하라는 모습이었다.

    그의 협조적인 모습에 옆에 있던 강신천은 당황했고, 운 장로도 의외였는지 눈을 치켜떴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땅에서 가시가 달린 덩굴이 솟아 나와 심협의 두 손을 묶었다.

    덩굴에 달린 가시는 매우 날카로워 심협의 피부를 깊게 파고 들어갔다. 가시가 파고든 상처 부위에서부터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독!”

    옆에 있던 강신천이 시시비비도 가리지 않는 노파의 모습에 불만을 품고 분노를 폭발시키려는 순간,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운 장로님, 잠시만요! 그들은 제 벗입니다.”

    무만아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뒤에는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신목림 특유의 푸른 옷을 입고 은 장신구를 단 남자는 키가 크지 않았고, 입술 주변에는 수염이 가득했지만, 분명 무만아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만아 언니, 정말 돌아온 거야?”

    두 사람이 달려오는 걸 보며 운소노는 헤벌쭉 웃었고, 무만아 역시 덩굴에 묶여 있는 그녀를 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무만아와 눈이 마주친 만천성은 싸늘하게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운 장로는 무만아의 뒤에 선 남자에게 절을 했다.

    “족장님, 만아가 이번에는 도를 지나쳤습니다. 무단으로 일족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외부인까지 데리고 왔군요. 엄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이를 따라 할 것이니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이어서 그녀는 만천성과 운소노를 힐끗 노려봤다. 이로써 ‘더 많은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가 분명해졌다.

    ‘족장? 저 남자가 신목림의 족장인 무규호(巫奎虎)구나!’

    심협과 강신천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운 장로, 어쨌든 우선은 두 사람을 놔주시오. 비록 우리 신목림이 오랫동안 외부와 접촉하지 않았으나 마땅히 예를 갖추어야 하오. 게다가 저들은 아직 진정 신목림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니 이렇게 대접하는 건 부당하오.”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노파는 족장의 말에 망설임 없이 손을 휘둘러 두 사람을 풀어줬다.

    심협은 손목을 풀고는 강신천과 함께 포권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파파, 우리도요!”

    운소노가 서둘러 외쳤다. 허나 그 대가로 입을 덩굴로 틀어막히고 말았다.

    “족장님, 두 사람의 일은 그렇다 쳐도 만아가 이탈한 일은 일족 안에서도 적잖은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운 장로가 물었다.

    “만아가 떠난 이후로 신목족은 확실히 이전처럼 평화롭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모두 나가고 싶다는 뜻을 갖게 되었소. 그래도 나도 지금…….”

    “족장님, 설마 족장님까지 흔들리시는 겁니까? 부디 우리 일족이 왜 이곳으로 옮겨 왔는지, 어째서 일족의 문을 걸어 잠갔는지, 어째서 외부와 단절했는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무규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 장로가 그의 말을 끊었다.

    “파파, 우리 신목족은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어요. 바깥 세계에서는 이미 마환이 사라졌고, 인, 마, 선 삼족이 공조하는 세상이라고요! 그러니 이렇게 갇혀 있을 게 아니라 문을 열고 나가서 바깥 세계와 교류를 해야 해요!”

    무만아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뭐라고? 마환이 이미 사라졌다? 하하하하!”

    운 장로는 갑자기 껄껄 웃었으나, 어딘가 차가운 비웃음 같았다.

    무규호의 표정도 조금 이상했다.

    “파파, 왜 그러세요? 치우의 봉인이 더 보강되면서 마족 중 봉인을 풀기 원하는 급진파도 제압됐다고요. 이미 마환이 사라진 게 분명해요!”

    “만아야, 네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무규호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스승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심협은 그제야 무만아가 신목족 족장의 애제자임을 알게 됐다.

    “아니다. 돌아가서 신수(神樹)를 보면 알게 되겠지.”

    무규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심협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 그럼 제 벗들은요?”

    “외부인은 절대 신목족에 들어갈 수 없다!”

    운 장로는 차갑게 일침을 가했고 무규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무 족장님, 운 장로님, 저희가 이번에 온 것은 악의가 있어가 아닙니다. 단지 지모의 원액을 빌려 오장관의 인삼과 나무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강신천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삼과 나무?”

    운 장로가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인삼과 나무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삼과 나무가 그들 신목족의 신수와 같은 천지영목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인삼과 나무에 문제가 생겼는데 왜 지모의 원액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옆에 있던 무만아가 자신이 오장관에서 인삼과 나무가 마기의 침투를 받은 것을 확인했음을 설명했다.

    “운 장로, 아무래도 이 일은 신수와 관련이 있어 보이니 관례를 깨야겠소. 저들을 안으로 들입시다. 어쩌면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소?”

    “족장님, 제가 살펴본 바로는 저자의 몸에 마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 자를 들여보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일은 무신단(武神壇)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운 장로가 심협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하자 무규호는 생각에 빠졌다.

    “선배님, 방금 제 몸에서 마기를 발견했을 때 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보셨습니까?”

    심협이 불쑥 나서서 물었다.

    “마기를 제압하고 있었지. 꽤나 힘들어 보이더구나.”

    “그렇습니다. 확실히 저는 힘들게 마기를 제압했습니다. 허나 그것은 숨기기 위함이 아닌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삼계무도회의 시련에 참가했을 때 비경에서 마기가 몸에 침투한 것뿐이지 저는 마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네가 마족이 아닌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아니었으면 넌 이미 죽었을게다.”

    “그럼 심 오라버니도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저자는 마기를 지니고 있다. 일족에 들어갔다가 무신단이 자극이라도 받으면 우리는…….”

    운 장로는 거기서 말을 끊었지만, 의중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심협이 신목족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것이다.

    무규호는 줄곧 심협을 살펴보다가 한참 후에야 침묵을 깨고 결단을 내렸다.

    “대승기 수사에 불과하니 마기를 품고 있다 해도 큰 파동은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오. 우리 신목족이 그 정도도 상대하지 못한다면 무신단을 지키는 것을 포기해야 마땅할 게요.”

    무규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운 장로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고, 만천성과 운소노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 함께 신목족으로 돌아갔다.

    한참을 걷던 무규호가 갑자기 소매를 휘둘러 심협과 강신천을 자신의 소매 안으로 넣었다. 두 사람은 하늘이 빙빙 돌고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다시 소매 밖으로 나왔다.

    몸을 가누고 나서야 심협은 현재 자신이 무성한 숲속이 아닌 온통 푸른색의 기이한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고는 놀랐다.

    발아래는 매우 두꺼운 덩굴이 꾸불꾸불하게 꼬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곳곳은 푸른 나뭇잎이 가득하여 생기가 넘쳤다. 곧게 뻗은 덩굴 위의 나뭇잎 사이로 은연중에 나무로 만든 가옥이 보였다.

    가옥은 대부분 그리 크지 않았다. 어떤 것은 경사진 지붕이 있는 네모난 집이었고, 어떤 것은 등갓 같은 지붕이 덮었다. 지붕 아래로는 이끼가 자라 있었고, 벽에는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심협은 이전에도 나무를 그대로 이용해 만든 집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었기에 매우 신기했다.

    “날 따라오게.”

    무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매우 두꺼운 덩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심협은 그 뒤를 따랐다. 서로 교차하고 있는 덩굴은 끝이 없는 것처럼 이쪽이 끝나면 다른 쪽의 나무 덩굴이 또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곳은 수천 개의 덩굴이 서로 교차하며 꼬여 있었는데, 빼곡한 덩굴 사이로 광장 같은 평평한 구역도 있었다.

    걸어가는 동안 덩굴의 숲에서 짙고 충만한 천지영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걷자 주위로 집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나뭇가지는 점점 뜸해졌다. 그러나 천지영기는 여전히 매우 짙었다.

    구불구불한 덩굴을 따라 걷는 동안 적지 않은 신목족 사람들을 만났는데, 가끔 나무 그늘에서 법력 파동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누가 수련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걸음을 멈추자 심협은 자신들이 이 숲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덩굴들이 서로 꼬여서 10여 장의 평대(平臺)를 이루고 있었다. 평대 중앙에는 높이가 4장 정도 되는 작은 묘목이 하늘 높이까지 뻗어 있었다.

    평대 근처로 다가간 심협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불어오는 바람도 다른 곳과 달랐다.

    자신이 수백 장 높이의 하늘에 서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 심협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여기 숲들은 어떻게 자랐기에 이리도 웅장하고 우거졌단 말인가!”

    이 말에 옆에서 무만아 등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크게 웃었다.

    “오라버니, 그게 아니에요. 여기는 숲이나 밀림이 아니라 그냥 나무 위야.”

    일족 안으로 들어오자 운소노는 마음이 놓이는지 먼저 다가와 말했다.

    “나무 위? 그렇다면…… 한 그루의 나무라고?”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지자 무만아가 덧붙였다.

    “맞아요, 오라버니. 저 아래로 보이는 나뭇가지나 덩굴은 사실 전부 한 그루의 나무예요. 우리가 방금 걸어온 길과 그때 본 모든 것이 한 그루의 나무죠.”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루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신목족의 신수 위에 있는 것이오?”

    심협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무만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신목족은 대대로 신수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네.”

    무규호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고는 이들을 이끌고 평대 중앙에 튀어나온 묘목 앞에 섰다.

    가까이 다가가자 묘목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생기가 느껴졌다. 고작 나무에 불과했으나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은 큰 숲보다 더 깊고 중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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