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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83화 (683/1,214)

683화. 여자아이

보름 후. 수풀이 우거진 원시 밀림을 세 인영이 매우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만아 소저, 어찌 날아서 가지 않고 굳이 걸어서 전신산(戰神山)을 가로지르는 것이오?”

금갑의 청년이 묻자 선두에서 걸어가던 청의의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옷에 달려 있던 은색 장신구에서 딸랑하고 방울 소리가 울렸다.

“거의 다 왔어요. 음, 강 오라버니, 심 오라버니. 우리 신목림은 세상과 단절되어 외부와 교류를 하지 않다 보니 일족 사람들이 모두 배타적이에요. 차라리 오라버니들은 여기서 제가 지모의 근원을…… 훔쳐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가장 뒤에서 따르던 심협은 이전에 백소천과 여아촌에 들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괜히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던 그는 바로 동의했다.

“소저의 뜻이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요.”

“만아 소저, 나무라지 말고 들어주시오. 인삼과 나무의 상황이 매우 위급하니 기한을 묻지 않을 수 없소. 언제까지 돌아올 수 있겠소?”

머뭇거리던 강신천이 묻자 무만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오. 내가 너무 무례했소.”

그녀가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자 강신천이 사과했다.

“휴, 사실은 제가 족장님과 장로님들을 속이고 몰래 뛰쳐나온 거라 돌아갔다가 붙잡히면…… 신목옥(神木屋)에 갇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함께 가서 일의 사정을 말해보는 게 좋겠구려. 그러면 그대는 잡히더라도 우리는 지모의 원액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지 않겠소?”

강신천의 말에 심협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자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구나. 무 소저는 신목족은 세상과 단절하여 오랫동안 외부인과 왕래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들어가면 감금당할 우려가 크지 않은가?’

“우리 신목족에서는 개인적으로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건 큰 죄예요. 그러면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침입자로 간주돼 갇혀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거예요.”

심협은 예상했던 답변이었으나, 강신천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다.

“강 오라버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돌아간다고 반드시 갇힌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혹시나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어떻게 해서든 지모의 원액을 가져다 드릴게요.”

“그럼 여기서 소저를 믿고 기다리겠소.”

심협이 나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지모의 원액을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에 육화명에게 편지를 보내 대당 관부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당부해둔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에 육화명의 답장을 받았는데, 대당 관부에서 평소 관계가 호의적인 보타산에 사람을 보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결국 강신천도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는 것에 동의했다.

셋이 있었을 때는 활발한 성격의 무만아가 두 남자에게 이것저것 묻고 재잘거린 덕에 어색할 일이 없었으나, 이제 그녀가 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정적이 흘렀다.

며칠 동안 지내면서 강신천은 심협에게 혐의가 없음을 확신했지만, 종문의 엄명이 있었기에 그래도 그를 감시해야 했다.

“강형, 나를 감시해야 하는 것이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뚫어져라 볼 건 없지 않소? 굳이 계속 따라다닐 필요는 없을게요.”

“심형은 뭘 하려는 게요?”

“무 소저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니 각자 수련이라도 하고있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거 좋은 생각이오.”

심협의 말에 강신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10여 장 정도 거리를 벌린 심협은 한 오래된 나무에 등을 기대고 가부좌한 후 정양하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사실 체내에서는 파도가 몰아치고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체내에 있던 치우의 마기가 다시 발작하여 몸을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의 발작을 통해 마기가 발작하기 전에 찾아오는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으나, 마기의 발작은 갈수록 제어하기 어려웠다.

그가 법력을 운공하자마자 두 눈은 붉게 물들었고, 경맥에서도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모공에서는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마기가 다시 폭발할 것 같았다.

심협은 바로 두 손을 결인하여 단전 안의 법력을 운공했다. 그러자 단전에 있던 참마검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농후한 순양의 힘이 뿜어져 나와 전신의 경맥으로 흘러갔다.

순양보전 공법의 도움으로 위능이 더욱 강해진 참마검의 순양의 힘은 온몸을 돌아다니며 경맥 곳곳에서 폭주하는 치우의 마기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허나 치우 마기와 순양의 힘의 이번 싸움은 달랐다. 이번 치우 마기의 폭주는 분명 이전보다 더 강렬한 반면 순양의 힘은 이전보다 강력하게 제압하지 못했고, 두 존재는 마치 지친 것처럼 고착화되는 형세를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심협은 마기를 제압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본래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이 약한 불로 변하면서 고통은 더욱 길어졌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황혼이 지나 태양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심협은 또다시 폭주를 제압할 수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얼굴도 창백했으며, 눈은 조금 움푹 들어간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탁한 숨을 내뱉었다. 고민은 오히려 더 깊어갔다.

만약 마기의 폭주가 이렇게 지속된다면 그의 몸속은 전쟁터가 될 게 분명하다. 또한, 치우 마기와 순양의 힘은 수시로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그의 몸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깜짝 놀라 곧장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마기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느라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누구냐?”

심협은 순양비검을 쥐고 달려들며 외쳤다.

순양비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풀숲에 통로를 만들자 누군가 나타났다.

여덟 살 남짓한 여자아이였는데, 푸른 옷이나 은 장신구를 한 모습이 무만아와 퍽 비슷했다.

그가 검을 거두는 순간, 멍해 있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언니! 귀신이야!”

아이의 목소리는 숲 전체에 울려 퍼졌고, 아이의 커다란 눈에서는 주르륵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심협은 여자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통해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움푹 들어간 눈동자와 음산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숲에 서 있으니 귀신으로 보일 만도 했다.

서둘러 단약을 먹고 법력을 운공하여 흡수하자 금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협은 그 상태로 웃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인사를 건네려던 것이다.

한데 그때, 여자아이의 커다란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언니, 빨리! 귀신이 사람으로 변했어!”

그녀의 외침에 심협이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진토인(塵土刃)!

그러더니 전방에서 갑자기 황토색 빛이 반짝였고, 진흙을 뭉쳐서 만든 듯한 인형이 장도를 든 채 찔러 들어왔다.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이 진흙 인형은 생각보다 빠르고 끈질기게 쫓아왔다.

심협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진흙 인형을 베어버렸다.

인형은 노란빛이 감돌더니 바로 진흙으로 변했다.

심협이 검을 내리고 여자아이를 돌아보는 순간, 한 여인이 달려와 그녀를 뒤로 감쌌다.

이 무렵, 가부좌하고 있던 강신천도 서둘러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강신천의 질문에 심협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한편, 여자아이의 몸을 감싼 사람은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영롱한 몸매와 솟아오른 가슴은 육감적이었고, 붉은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분홍색 연꽃을 꽂았다. 부드러운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너희는 귀물이냐?”

“소저, 농이 심하시오. 우리가 어딜 봐서 귀물처럼 보이시오?”

“귀물이 아니면 어찌 귀물 분장을 하여 소노(小奴)를 놀라게 한 것이오?”

“방금까지 깊은 수련에 빠져 있었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소. 작은 소저께서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모양이오. 정말 송구하오.”

심협은 무기를 거두며 사과했다.

“언니, 저자의 말을 믿으면 안 돼! 방금 얼굴이 막 이렇게…… 이렇게 생겼었다고!”

여인이 화답하기도 전에 소노라 불린 여자아이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얼굴 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꼼지락거리며 외치고는 재빨리 다시 뒤로 숨었다.

여자아이의 열정적인 설명에 강신천도 심협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유치하게 왜 아이를 놀라게 한 것이냐고 꾸지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 소저께서는 신목림의 제자가 맞으시지요?”

심협은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여인이 말릴 틈도 없이 머리가 다시 나오며 말했다.

“천성 언니,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소노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알게 되자 후회하며 말했다.

“운소노(雲小奴), 요 가벼운 입을 어쩌면 좋니? 다음부터는 절대 안 데리고 나올 거야.”

여인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안 돼! 언니랑 만아 언니 말고는 아무도 나 안 데리고 나간단 말이야! 만아 언니도 없는데 언니까지 나랑 안 놀아주면 난 심심해 죽을 거야. 엉엉!”

“아, 만아…… 생각하니까 또 화나네. 걔가 혼자서 몰래 빠져나가는 바람에 운(雲) 장로님이 엄하게 감시하시니까 근처도 마음대로 못 돌아다니잖아!”

심협은 이 크고 작은 여자들이 낯선 사람 앞에서 아무런 방비도 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천진난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데 그때, 심협과 강신천 모두 경계심을 잔뜩 끌어올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우거진 숲이 갑자기 미쳐 날뛰더니 어느새 그들을 에워싼 것이다.

“소저, 이건 무슨 뜻이오?”

운소노에게 원망을 토로하던 여인은 심협의 말에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다! 운 장로님이야!”

이어서 여인은 서둘러 소노를 잡고 한 손으로 결인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이 황토색으로 빛나더니 곧바로 땅속으로 사라졌다.

심협과 강신천은 그저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 앞의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푸른 빛이 솟아오르더니 푸른 나무 덩굴이 4장 높이까지 땅을 뚫고 나왔다.

나무 덩굴에는 두 사람이 묶여 있었는데, 바로 운소노와 천성이었다.

이어서 풀숲이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가운데 통로가 생겨났다. 뒤이어 푸른 옷에 검은 나무 지팡이를 든 은발의 노파가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의 주름도 그 미모를 가리지 못했다.

우아한 분위기의 노파는 가까이 다가온 뒤에야 멈췄다.

“운…… 파파, 저희는 그냥 산책 나온 거지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거 좀 풀어주세요. 네?”

여자가 호칭을 바꾸며 말했다.

“만천성(滿天星), 조용히 해라! 소노, 네가 말해라. 어디 가려는 거였지?”

운 장로가 가볍게 꾸짖고는 물었다.

“그, 그게…….”

덩굴에 감긴 운소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지 못하겠느냐!”

운 장로가 크게 호통 쳤다.

“처, 천성 언니가 전서성(滇西城)에서 맛있는 거 사준다고…… 그래서…….”

운소노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운소노 너,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그렇게…… 읍! 읍!”

만천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덩굴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파, 파파가 사실대로 말하라고 해서…….”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운소노에게 만천성은 계속해서 뭔가 소리치는 듯했지만, 아쉽게도 한 글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끄럽다! 너희가 받을 벌은 돌아가서 알려주마!”

운장로의 호통에 만천성은 바로 입을 다물고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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