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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73화 (673/1,214)

673화. 빌려 씁시다

한 차례의 풍파가 지나가고도 교역회는 계속됐고, 족히 한 시진이 넘어서야 끝났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졌지만, 곳곳에 등불이 밝혀진 오장관은 여전히 환했다.

“더 교환할 분이 없는 듯하니 이번 백과선회가 원만히 끝났음을 선포합니다. 벌써 날이 저물었으니 도우들께서는 중요한 일이 없다면 관내에서 쉬시고 내일 백진연(百珍宴)에 참석해주십시오.”

접인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바라보며 선포했다.

“백진연?”

심협이 전음으로 오홍에게 물었다.

“오장관의 선과를 내와서 맛보게 해주는 연회요.”

심협은 먹고 마시는 연회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거래도 끝나지 않았고 진원자도 만나봐야 했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유리전에서 나온 뒤 사람들 중 몇몇은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고, 대부분은 오장관 시종의 안내에 따라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얼마 후 너른 장원(莊園)이 나왔다.

장원 안은 독립된 건물이었는데, 접대용으로 사용되는 듯했다. 안에는 누각과 아담한 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가 심 도우의 숙소입니다.”

오장관 제자가 심협을 앞쪽 다락방으로 안내했다.

심협은 주변를 둘러봤다. 방 앞에는 화원이,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위치나 풍경이나 장원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다. 수선 세계 역시 이익으로 움직이는 곳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만약 방금 교역회에서 염룡용각 같은 기물을 꺼내놓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곳에 머물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주 좋군요. 명월(明月) 도우께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오.”

심협은 오장관 제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당연한 일입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편히 쉬십시오.”

명월은 인사하고 물러나려고 했다.

“도우께서 별일 없으면 들어와 차 한잔하시는 게 어떻겠소?”

“안 될 것도 없지요.”

심협이 불쑥 청하자 명월은 당황했으나, 곧바로 웃으며 답했다.

심협은 명월을 방으로 들인 뒤 영차 두 잔을 우려냈다. 금양종 종주 민천의 저물법기에서 얻은 것으로, 동해의 특산물인 무산(霧山) 영차였다. 맛도 뛰어난 데다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상품이었다. 다만 생산량이 적어 명성이 널리 퍼지지 않았다.

“아주 좋은 차로군요. 이 차는 이름이 무엇입니까? 어디 것인지요?”

명월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한 모금 마신 뒤 감탄했다.

“동해 특산물인 무산 영차입니다. 명월 도우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심협은 두 봉지의 영차를 건넸다.

“음…… 이런 과한 선물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을 수는 없습니다.”

명월은 무산 영차가 마음에 들었지만, 받지 않으려 했다.

“그저 차일 뿐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심모가 물어볼 것이 있으니 부디 명월 도우의 조언을 바라오.”

“무슨 일인지 말씀해보십시오.”

명월은 심협이 도움을 청할 게 있다는 말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이번에 오장관에 온 것은 백과선회 때문이 아니라 진원자 선배님을 뵙기 위함입니다. 명월 도우께서 진원자 선배님과 만남을 주선해주실 수 있을지요.”

“스승님을 말씀입니까? 심 도우께서는 무슨 일로 스승님을 뵈려는 겁니까?”

명월은 곧장 경계하며 물었다.

“저의 중요한 법보가 손상됐습니다. 연기술에 능하다는 진원자 선배님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기에 혹여 제 법보를 고칠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심협은 숨김없이 말했다.

“아, 법보를 고치기 위함이셨군요. 그야 어렵지 않죠. 스승님의 일월주천로는 매우 신비로워 만물을 연화할 수 있으니 어떤 법보든 복원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스승님께서는 지금 관내에 안 계십니다.”

명월은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말했다.

“관내에 안 계시다니요? 진원자 선배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언제 돌아오시는지 알 수 있습니까?”

심협은 당황하여 연달아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선우(仙友)를 만나러 천정 미라궁(彌羅宮)에 가셨습니다. 스승님은 언제나 행적이 묘연하셔서 어떨 때는 며칠 뒤에 돌아오시고 어떨 때는 몇 달 뒤에나 돌아오시기도 합니다.”

명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심협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진원자 선배님께서 안 계시다니,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심 도우께서는 안심하고 머무르십시오. 스승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잠시 더 대화를 나눴고, 심협은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는 명월에게 무산 영차 두 봉지를 더 꺼내 건넸다.

명월은 이 차가 마음에 들었기에 사양하지 않고 바로 거두었다.

혼자 남은 심협은 다락방 부근에 몇 겹의 금제를 설치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가 갑자기 두 눈을 뜨고는 바깥을 향해 결인했다.

방 너머의 금제 광막이 잇달아 양쪽으로 찢겨나가면서 통로가 생겨났고, 그 틈으로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람이 천천히 들어왔다.

“오셨군요.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심협은 군말 없이 염룡용각을 꺼내 옆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상대도 긴 말 없이 소매를 휘둘렀고, 그러자 푸른색 옥병과 나무 상자가 탁자 위에 나타났다.

백계의 일원진수와 마찬가지로 옥병 주위로 짙은 수령지기가 흘러나왔다.

나무 상자를 천천히 열자 금색과 청색의 선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풍뢰선자였다.

옥병과 풍뢰선자를 보는 심협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상대가 처음 제시했던 조건은 일원진수와 풍뢰선자였다. 풍뢰선자는 구천의 신과(神果)로써 반 알만 있어도 몸을 단련하는 효과가 만령금골액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좋습니다. 선과를 반으로 나눈 뒤 염룡용각을 가져가십시오.”

심협은 바로 말했다.

“잠깐, 염룡용각은 본래 한 쌍이지 않소? 교역회에서 내놓지는 않았지만 다른 한쪽도 귀하에게 있을 듯한데……?”

“그렇소. 다른 한쪽도 내게 있소.”

심협은 눈을 조금 치켜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 도우께서 이 뿔을 내놓으신 건 큰 쓸모가 없어서인 것 같은데, 다른 한쪽 뿔도 내게 파는 게 어떻겠소?”

상대는 높은 경지의 수사답지 않게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분명 제게는 큰 쓸모가 없긴 하나 당장 필요한 물건도 없기에 딱히 팔 생각은 없습니다.”

심협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염룡용각 같은 진귀한 물건은 언젠가 큰 용도가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풍뢰선자 나머지 절반과 홍련업화까지 주겠소.”

상대는 하얀 구슬을 꺼내며 말했다. 구슬 안에는 공간이 존재했는데, 그 안에는 주홍색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홍련업화가 분명했고, 그 수도 적지 않았다.

심협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굳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나를 아는 자인가? 삼계무도회에서 순양검배를 사용하긴 했지만, 안에 담긴 홍련업화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연스레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귀하는 내게 홍련업화가 필요하다는 걸 어떻게 아셨소?”

“심 도우는 경지가 높고 기운을 숨기는 수단이 있지만, 나는 진선기 수사요. 게다가 관찰술이 뛰어난 편이라 도우의 본명법보의 기운을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소.”

심협은 반신반의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고 하얀 구슬을 응시했다.

구슬 안에 담긴 홍련업화는 적지 않았다. 순양검배 안에 넣는다면 검배의 위력은 확실히 크게 강해질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염룡용각이 큰 쓸모가 없지 않은가.

“도우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계속 거절해서야 예가 아니지요.”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염룡용각을 꺼냈다.

“하하! 도우의 배포에 감탄했소. 좋은 거래였소!”

검은 도포 사람은 흥분하며 염룡용각을 받아 들었다. 그에게는 염룡용각이 매우 중요한 물건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거래를 끝낸 검은 도포의 사람은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심협도 만류하지 않고 일어나 배웅했다. 그리고 상대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심형.”

오홍이 언제 왔는지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심협과 가까운 다른 다락방에 머무는 중이었다.

“오형, 밤이 깊었는데 쉬지 않고 있었소?”

“근심이 깊어 잠이 오지 않아 잡담이나 나눌까 하고 왔소. 반갑지 않은 모양이오?”

“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서 들어오시지요.”

심협은 유쾌하게 웃으며 오홍을 안으로 안내했다.

“음! 일원진수와 풍뢰선자라……. 이 구슬 안에 있는 것은 홍련업화 아니오? 그자가 이토록 많은 보물을 제시했으니 심형이 단번에 허락한 것이었구려.”

오홍이 탁자 위를 보고는 감탄했다. 검은 도포의 남자를 배웅하느라 미처 보물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다 오형 덕분이오. 오형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가시오.”

“심형에게 주었으니 용각은 심형의 것이었소. 그러니 이 물건들도 당연히 심형 것이지.”

심협은 오홍의 말에 감탄하며 물건을 거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오홍은 몇 번이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형, 이 야심한 밤에 온 것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아닙니까? 괘념치 말고 편하게 말하십시오.”

“심형 말이 맞소.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온 것이오.”

오홍은 머뭇거리다가 쓰기 웃으며 말했다.

“어서 말해보시오.”

“심형에게 모든 독을 치료해주는 구슬과 상고시기 지보인 부러진 참마검이 있다는 말을 들었소. 내게 잠시 빌려줄 수 있소?”

“제게 참마검과 그런 구슬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일을 밖으로 알린 적이 없는데…… 오형은 어떻게 아신 거요?”

심협은 가슴이 철렁해 물었다. 참마검이야 그렇다 쳐도 만독혼원주에 관한 일은 백소천과 원구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원구 도우에게 들었소. 몇 년 전 동해에서 요물을 사냥할 때 우연히 알게 되었지.”

“역시 원구였군요.”

원구는 본래 천책 공간에 있었는데 천책이 사라졌으니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심협은 그가 살아 있는지 걱정하던 차였는데, 이제 보니 멀쩡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그의 비밀을 말하고 다니는 듯했다.

“오형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빌려드리지요. 한데 고작 그것 때문이라면 그토록 진귀한 염룡용각까지 줄 필요도 없었소. 그냥 말해도 됐을 것을…….”

“심형에게는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오.”

오홍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얼마나 빌려드리면 되오?”

무슨 일에 쓰려는 건지 물어보려던 심협은 생각을 바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고맙소, 심형. 사흘 안에 반드시 돌려주겠소.”

오홍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현재 그의 몸에 침투한 마기를 참마검에 의지해 억제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홍은 심협이 건넨 참마검과 만독혼원주를 서둘러 받았다.

심협은 두 보물의 사용법을 알려줬고, 오홍은 기억에 새긴 후 바로 물러갔다.

오홍이 돌아가고 방으로 돌아온 심협은 방금 얻은 옥병에서 일원진수 한 방울을 꺼내 손에 올려놓았다.

매우 짙은 물의 영기가 흘러나오더니 잠시 후, 다락방 전체가 습해졌다.

검은 도포 남자가 준 일원진수는 그 순수함이 흑곰 요괴가 주었던 것 못지않았다.

심협은 무명 공법을 운공하여 진수의 영력을 흡수했다.

하룻밤 사이 진수의 1할 정도 되는 물의 정화를 흡수하자 법력이 약간 정진했다.

날이 밝자 그는 멍한 표정으로 밀실에서 나왔다.

거실 탁자에는 2척 길이의 청옥갑이 놓여 있었는데, 은은한 빛을 내는 게 범상치 않은 물건 같았다.

“누군가 왔다 갔구나!”

심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방 주변에 몇 겹의 금제를 설치해두었다. 양의미진진은 아니지만 매우 고명한 금제였는데 누구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입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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