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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57화 (657/1,214)

657화. 빚을 갚다

황혁이 일격에 당하려는 순간, 발아래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기혈번이 나타나 그의 몸을 휘감았다.

강철 정은 기혈번에 가로막혔다.

기혈번은 충격에 붉은 빛을 발하면서도 갑자기 활짝 펼쳐지더니 하천산을 향해 날아가 그를 꽁꽁 감싸려 했다.

하천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짧게 외치며 손을 휘둘러 십여 개의 검은색 정으로 기혈번을 막아냈다.

허나 그가 안도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갑자기 달빛이 떨어졌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간 심협은 순양검배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고, 한 손으로 금색 검배를 쥔 채 다른 손으로 결인하며 외쳤다.

“순양분검!”

그 순간, 순양검배에서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 검의 허상이 사방에 나타나더니 질풍과 폭우처럼 하천산을 향해 쏟아졌다.

기혈번에 둘러싸인 하천산은 움직임에 제한이 커 푸른 방패로 검날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콰쾅! 쾅!

점점 어두워지는 밤하늘 아래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푸른 방패 위에 나타났던 소용돌이는 끊임없이 부서졌고, 방패의 푸른빛도 점점 어두워졌다.

심협의 광풍과 같은 공격에 하천산의 두 눈에서 기이한 푸른 빛이 반짝이더니 등에서 하얀 빛이 뭉쳐져 날개 형상이 떠올랐다. 동시에 몸의 기운도 치솟았다.

“우쭐대지 마라!”

짧은 외침과 함께 하천산의 등에서 두 날개가 활짝 펼쳐졌고, 온몸에서 터져 나온 웅장한 기운은 그대로 푸른색 방패로 파고들었다.

방패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울리면서 거대한 파랑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창날과 같은 부리로 위를 찔렀다.

불꽃의 검과 푸른빛의 거대한 새가 충돌했다. 새의 몸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렸지만, 위로 솟구치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순양검배의 칼날에 부리를 꽂았다.

콰쾅!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푸른 새의 몸이 폭발하면서 강력한 폭풍이 솟구치자 심협도 수백 장을 날아갔다. 헝클어진 머리가 바람에 휩싸이면서 이리저리 휘날렸고, 말라비틀어진 몸에서 피가 쏟아지면서 더없이 처참해 보였다.

그는 온몸의 독혈을 모두 제거하면서 법력의 소모와 정혈의 손해가 모두 심각했으나 황혁을 구하기 위해 무리한 터라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천산도 온몸이 불꽃과 검기에 휩싸여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영기의 소모가 심한 푸른 방패로 기혈번의 포위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낯빛은 어두웠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독혈에 당해서 저런 꼴이 된 심협이 이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제법 손실이 컸다.

“망할 놈.”

그는 욕을 내뱉으며 검은색 정으로 심협을 죽이려 했다.

그때, 고함소리와 함께 빠른 둔광이 멀리서 날아왔다.

“도우, 잠시만 기다리시오!”

하천산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다 보니 그사이에 누군가 끼어든 것이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자를 본 하천산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부동래…….”

그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이를 악물고 상대의 이름을 내뱉었다.

비경에 막 들어왔을 때, 그는 심협에게 함께 부동래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심협은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심협을 죽이려 하자 부동래가 만류하지 않는가.

“하 도우였군요.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니 도우는 그만 멈춰주지 않겠소?”

부동래가 웃으며 말했다.

“부 도우, 나는 죽기 살기로 싸워서 겨우 점수를 얻게 됐는데 나더러 가라고 하면 이들의 머리를 당신에게 바치는 것과 다름없지 않소?”

“아, 그건 그렇지.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하 도우가 먼저 저들의 목숨을 끊으면 그때 다시 도우와 싸우겠소. 그러면 악의적인 약탈이 아니지 않겠소?”

부동래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말을 마친 그는 정말로 부서진 돌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러나 말없이 하천산을 보고 있는 그의 몸에서 감추지 않고 드러난 대승 후기의 기운은 부상 전의 황혁보다도 강렬했다. 게다가 감추었던 살기마저 그대로 흘려보내자 부동래가 뿜어내는 압박감은 더욱 강해졌다.

“으으…….”

하천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심협과 싸우느라 법력의 소모가 너무 컸기에 지금 부동래와 싸우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부동래, 지금은 분명 내 당신의 적수가 못 되지만, 죽기 살기로 싸우면 당신에게도 그리 좋지는 않을 게요. 그러니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게 어떻겠소?”

“어떻게?”

“이들 중 황혁의 점수가 가장 높으니 그의 머리는 내가 갖겠소. 당신은 나머지 둘 중 한 명을 죽이고 그의 법보와 기물을 모두 가지시오. 어떻소?”

“좋은 방법이긴 한데 하 도우가 뭔가 착각한 것 같소. 나는 살인을 하러 온 게 아니라 그들을 구하러 온 거요.”

부동래는 씩 웃더니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오?”

하천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부동래와의 짧은 대화에 상대가 바보인지 아니면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벌써 세 번째군.”

부동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가 세 번째라는 거지?”

“휴, 오는 길에 몇 번의 생사를 건 싸움을 마주쳤는데, 나는 그때마다 멈추기를 권했소. 한데 매번 바보 취급하거나 아니면 내가 자신들을 놀린다고 생각하더군. 당신도 지금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았소?”

부동래는 머리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들어오기 전에 모두 생사장에 서명했는데 왜 착한 척을 하는 것이냐!”

“안 믿어도 상관없고 그들을 죽이려 해도 좋소. 나는 내 능력껏 막을 것이고, 막지 못하면 그것도 그들의 운이겠지. 다만 도우는…… 주먹과 발에는 눈이 없는 법.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일에는 난 손에 사정을 두지 않소.”

부동래는 천천히 손을 펼치며 말했다.

하천산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심각한 부동래의 표정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울 기세를 펼치는 모습에 하천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뭐, 됐소. 당신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이번에는 내가 손해를 보기로 하지. 인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천산은 그 말만을 남기고는 두 팔을 펼쳐 순식간에 날개로 변하더니 밤하늘로 날아갔다.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부동래의 표정이 갑자기 급변했다. 하늘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수백 개의 검은색 정이 심협 등을 향해 쏟아진 것이다.

“갈(喝)!”

부동래가 두 팔을 휘두르며 외치자 맹호출동(猛虎出洞)이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온몸에서 빛이 크게 번득이면서 백 장 크기의 거대한 호랑이 허상이 나타나 그대로 검은색 강철 정들을 흩트리고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하 도우, 한 번 더 해보겠소?”

부동래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하늘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고, 하천산의 모습은 그제야 완전히 사라졌다.

부동래는 천천히 기세를 거두고는 좌우를 둘러본 뒤에 빠른 걸음으로 심협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심 도우, 괜찮으시오?”

“괜찮…… 쿨럭쿨럭! 괜찮소.”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부동래의 부축을 받은 심협은 천천히 앉아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부형 덕분에 목숨을 구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소. 한데 심형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심협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몰골의 조통을 흘끗 보고는 쓰게 웃으며 방금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부동래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경멸하는 눈으로 조통을 노려봤다.

심협은 황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황형, 상처는 괜찮으시오?”

“상처는 별것 아닌데 정혈의 소모가 크고 법력도 메말랐소. 당분간은 회복이 어려울 게요.”

황혁은 천천히 눈을 뜨며 답했다.

“부형, 송구하지만 이 영천수액을 황형에게 좀 가져다주겠소?”

심협이 영천수액 몇 병을 꺼내 건네자 부동래는 지체하지 않고 황혁에게 건넸다.

“두 분은 안심하고 몸을 회복하시오. 내 잠시 두 사람의 호법을 서겠소.”

“고맙습니다.”

말을 마친 심협은 두 병의 영천수액을 마시고는 대개박술을 운공하여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 * *

날이 밝아왔다.

아침 해를 맞이한 심협의 온몸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전처럼 쭈글쭈글한 모습은 아니었다.

옆에서 묵묵히 호법을 서던 부동래는 그의 엄청난 회복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혁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심협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다.

심협은 천천히 두 눈을 떴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래에게 공수했다.

“부형, 정말 감사드리오. 훗날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 반드시 돕겠소.”

“그럴 것 없소. 사실, 비경에 들어오기 전에 육 도우가 심 도우를 꼭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소.”

부동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심협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다만 그제야 부동래가 도와준 것이 완전히 선량함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육형의 부탁이 있었다 해도 부형의 구명지은은 마음 깊이 간직하겠소.”

말을 마친 그는 황혁에게로 다가갔다.

“황형, 좀 어떻소?”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아무래도 1위는 내 몫이 아닌 듯하오.”

황혁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팔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1위가 그리 중요하오?”

“내가 아니라 종족들 사이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느냐가 달려 있지 않소? 나도 사문의 부탁을 받아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지 인정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았건만…… 결국은 이 꼴이 되어 버렸구려.”

반죽음이 되어 버린 조통을 바라보는 황혁의 눈에는 원망이 더해졌다.

심협은 조통을 힐끗 보고는 다시 황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사실 어젯밤부터 줄곧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황형은 왜 날 도운 것이오?”

“모르겠소?”

황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나와 황형은 아무런 인연이 없지 않소?”

“심 도우는 우리 방촌산의 비전인 황정경 공법을 수련하지 않았소?”

“그것 때문이었소?”

“한데 우리 방촌산 제자도 아닌 심 도우가 어찌 황정경을 수련한 것이오?”

“그건…….”

심협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소. 분명히 사조께서 유랑하던 중 우연히 만난 도우를 마음에 들어 하셨을 것이오. 도우는 사조님의 눈에 들었으니 입문하지 않았어도 동문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동문이 위험에 처했는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소?”

황혁이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황혁이 그렇게 짐작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머쓱했으나, 굳이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조들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말하기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좋소.”

그의 표정을 본 황혁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믿는 듯했다.

“저자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오?”

황혁은 화제를 돌리며 물어봤다.

“황형은 저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소? 그러니 어쩌겠소? 살려둬야지.”

“심 도우가 오해한 모양이오. 오는 길에 그는 여러 번 마찰을 일으켰는데 그때마다 내가 도와줬소. 그러니 인정은 이미 갚은 셈이지. 게다가 나는 이제 중상을 입었으니 그를 보호하고 싶다 해도 불가능하지 않겠소?”

“그것도 맞는 말이오. 그럼 내 빚을 좀 갚아야겠소.”

심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통은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 박혀 있다가 심협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눈빛이 크게 떨려왔다. 그는 어젯밤부터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심협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심협은 조통의 이마에 붙어 있는 동물 가죽 부적을 떼지 않고 그의 몸을 관통한 검은색 정을 천천히 뽑아내 옆으로 던졌다.

조통은 몸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시…… 심 도우, 우리 대화를 좀 합시다. 살려만 준다면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드리겠소.”

그는 심협이 천천히 순양검배를 소환하는 것을 보자 황급히 말했다.

“오, 어떤 선물이기에 나를 죽이려 든 자의 목숨을 살려줘야 할지 궁금하군.”

심협은 검배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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