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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53화 (653/1,214)
  • 653화. 흩어지다

    심협이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몇 개의 유광이 나타나더니 9척 길이의 높은 대 위로 내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번 대회의 주최인 대당 관부의 정교금이 있었고, 좌우로 큰 키에 화려한 날개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 은색 갑옷을 입은 장신의 거한이 있었다.

    여자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고,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가리고 있어 한눈에 봐도 선족임을 알 수 있었다. 은색 갑옷의 거한은 몸은 사람이었지만 얼굴은 여섯 개의 송곳니가 솟은 코끼리였다. 마족이 분명했으나, 마기를 잘 감춰 마족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한의 옆에는 그와 체격이 비슷한 남자가 있었는데, 등에는 두 날개가 달렸고, 몸에는 상반신과 한쪽 팔만 가린 검은색 비늘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붉은 이 남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칠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족 여자 옆에는 긴 검은색 옷에 허리에는 옥대를 찬 환갑노인이 있었다. 가슴에는 금색 구름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아래로 고전자로 천기라 쓰여 있었다.

    “천기성 사람인가?”

    심협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금문장로(金紋長老)인데, 품급이 낮지 않다오.”

    심협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옆에 있던 백발노인이 대답했다.

    “금문장로?”

    “도우는 모르시오? 천기성의 제자와 장로들은 등급이 나뉘어 있소. 보통 검은색 옷을 입는데, 가장 평범한 제자들은 소매에 하얀 실로 천기라는 글자를 수놓소. 이들이 가장 낮은 백정(白丁)이오. 한 단계 위는 소매에 붉은 구름을 추가하는데, 이들이 보통연사(普通煉師) 혹은 대연사(大煉師)라 하지. 장로가 되면 가슴에 은색 실로 글자와 붉은 구름을 수놓는데, 그제야 진정한 언사(偃師)라 할 수 있소. 한 단계 높은 장로는 저렇게 금실로 수를 놓아 대언사라 한다오.”

    “도우의 설명에 감사드리오.”

    심협은 삼계의 각 종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한탄했다.

    “별말씀을. 청림문(靑林門) 장문 이장청(李長靑)이오.”

    노인이 전음으로 말했다.

    “춘추관의 심협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종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말이 끊겼다가 동시에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 일족의 출전자들은 연무대로 올라가시오.”

    정교금의 외침에 심협 등은 일제히 뛰어 연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번 무도회는 삼계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행사이자 각 종족의 새로운 행보이기에 모두가 역사의 창시자가 되어 승패와 상관없이 그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고 전해지게 될 것이오!”

    정교금의 말에 모두 가슴이 뜨거워졌다.

    연무대 서쪽, 육화명과 나란히 앉은 백소천이 그를 놀려댔다.

    “육형, 스승님의 언변이 청산유수이십니다그려.”

    “어쩔 수 없지 않소. 스승님은 본래 이런 일에 참여하기 싫어하시는데 폐하와 국사께서 나서길 원하지 않으시니 스승님이 나서실 수밖에…….”

    육화명은 화내지 않고 같이 웃었다.

    “정국공께 내 말을 고자질하지는 마시오. 난 아직 좀 더 살고 싶소.”

    백소천이 빙긋이 웃으며 농을 건넸다.

    그때, 정교금이 다시 한번 격려의 말을 한 뒤 무도회의 규칙을 선포했다. 참가자 모두 규칙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관람하는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번 무도회의 전체 일정은 삼계검회(三界劍會) 비경에서 진행되오. 비경 안에서는 신식이 제한되고 천지영기가 근절되어 일단 들어가면 생사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오. 각 종족이 경쟁하고 동족끼리는 서로 동맹을 맺어 용감하게 싸우고 자기 종족을 자신처럼 여겨 운명을 다투고 기연을 두고 다투게 될 거요!”

    삼계무도회는 동족끼리의 동맹을 장려하고 다른 종족 간에는 서로 싸워 생사를 따지지 않는 셈이다.

    “시련에 참여한 자는 1점, 다른 사람을 죽이면 1점을 더 얻게 되오. 시련이 끝나고 우승자에게는 승선대(升仙臺)를 사용할 기회를 줄 거요.”

    그 말에 광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졌고, 모두가 감격스러워했다.

    심협도 가슴이 떨려왔다. 승선대는 진짜 진선으로 올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승 후기가 한계를 건너 진선의 길로 들어서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더욱이 승선대에서는 돌파에 실패하더라도 귀선이 되지 않는다.

    “자, 돈을 거세요, 돈을 거세요!”

    상회의 집사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내기를 시작하자 엄청난 속도로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암암리에 돈을 걸기 시작했다. 작게는 어느 일족이 우승할 지였고 크게는 최종 우승자가 누구일지 판단해 돈을 걸었다. 참가자들의 생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높은 하늘에서 두루마리가 떨어지자 연무대 위에 선 40명은 일제히 손을 뻗어 자기 앞의 두루마리를 잡고 열어본 뒤 한 방울의 피를 그 위에 떨어트렸다.

    모두가 생사장에 서명하자 비경이 곧 열렸다.

    정교금은 모든 두루마리를 회수한 뒤 천기성 장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연(祈淵) 장로, 시작해도 좋소.”

    검은 옷의 장로가 앞으로 나와 검은색 옥으로 된 인신(印信)을 꺼내 던졌다. 인신은 연무대 중앙에 떨어졌다.

    연무대 중앙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홈이 파여 있었는데, 인신은 정확히 그곳에 박혔다.

    뒤이어 연무대가 쿵 하고 떨리기 시작했고, 바닥의 벽돌들이 내려가면서 오래된 법진이 강렬한 영기 파동을 뿜어내며 떠올랐다.

    “전송 법진인가?”

    바닥의 도문을 본 심협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천기성의 장로가 두 손으로 결인했다. 그러자 연무대를 향해 하얀 빛이 날아갔다.

    이 빛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대진 전체의 법진이 눈부신 빛과 함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뿜어내더니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연무대 위의 모두를 삼켰다.

    다음 순간, 하얀 빛이 번쩍였고, 심협 등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연무대 위로 네 개의 화려한 옥벽이 10장 높이까지 떠올랐다.

    옥벽에는 영문(靈文)이 빼곡했고, 주변에는 선옥들이 박혀 있었다. 희미한 영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옥벽 겉면을 뒤덮었고, 표명에서 안개가 피어올랐으며, 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열려라!”

    천기성 장로는 짧게 외치며 손으로 옥벽을 가리켰다.

    사면의 옥벽에서 안개가 흩어지더니 광막이 불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심협 등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왔다!”

    광장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와 동시에 삼계 명문대종들의 옥벽에도 똑같이 빛이 반짝이더니 삼계무도회의 장면이 떠올랐다.

    9장 높이의 대에는 이미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천기성 장로도 물러나 자기 자리에 앉았다.

    “기 장로님, 이번에 현천경을 팔아서 떼돈을 벌었겠습니다.”

    정교금이 웃으며 말했다.

    “정국공도 농이 지나치십니다. 우리 천기성은 이런 신기하고 잡스러운 물건을 만들어 살림을 채우는 수밖에 없지요.”

    기 장로가 얼굴을 붉히며 답하자 모두 그저 웃기만 했다.

    지금의 천기성은 기 장로의 말처럼 작은 세력도, 잡스러운 물건이나 만드는 곳도 아니었다. 그들은 각종 언수와 보물, 기물 등을 만들어 수사들과 평범한 사람 모두에게 큰 인기였다. 삼계 곳곳은 물론 심지어 저승 지부에까지 상점을 열었다. 더욱이 휘하의 언사와 대언사 모두 경지가 낮지 않은 수사였기에 모든 선마 종문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연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 * *

    남쪽 현천경 오른쪽 구석, 나무그늘이 우거진 숲.

    심협은 빛이 되어 하늘에서 떨어져 숲속 공터에 나타났다.

    그가 몸을 가누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두 개의 빛이 차례대로 떨어졌다.

    그중 먼저 나타난 한 명은 마른 몸에 목은 기이하게 길었으며 팔자수염이 나 있었다. 요물의 특징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다음에 나타난 자는 뜻밖에도 호랑이 머리의 요물 부동래였다.

    세 사람은 서로 대치하며 눈을 마주쳤다.

    “도우, 나는 운상성(雲上城)에서 온 하천산(賀千山)이라 하오. 함께 힘을 합쳐 먼저 저 마족을 죽이는 게 어떻겠소?”

    하천산이 심협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부동래를 힐끗 쳐다봤다.

    부동래의 호랑이 머리는 흉악하다기보다는 다소 우직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우직한 것은 아니었기에 하천산의 생각을 예측할 수 있었다.

    “심 도우 그리고 요족 친구, 내가 이번에 비경에 들어온 것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저 시련을 무사히 끝내고 살아서 나가기만 하면 족하다오.”

    부동래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서로 아는 사이였나?”

    하천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하 도우의 호의는 충분히 알겠지만, 동맹은 하지 않겠소. 정국공 말씀처럼 각자 동족을 찾아 동맹을 맺는 게 좋을 듯하니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심협은 공수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천산은 자신의 제안을 심협이 밝힐 생각이 없어 보이자 안도하며 추세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겠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하천산이 몸을 휙 돌리자 두 팔이 새하얀 학 날개로 변하더니 숲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공터에 남은 부동래와 심협은 서로에게 경계심이 있었기에 그저 공수하고는 헤어졌다. 두 사람 모두 육화명과 아는 사이라고는 해도 종족이 다르니 삼계무도회의 시련에서는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백여 장을 날아간 심협은 오래된 나무 아래 멈춰 두 눈을 감고 신식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신념은 불과 몇 장까지밖에 펼쳐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상쇄된 것처럼 더 멀리 뻗어 나가지 못했다.

    공기와 바람의 흐름이 있었지만, 천지영기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협은 영력을 보충하는 단약을 잔뜩 챙겨왔기에 예상 이상으로 장기전이 되지만 않으면 이번 시련이 끝날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는 좌우를 둘러봤다. 주변의 빼곡한 숲은 깊고 길이 없었기에 아무렇게나 방향을 골라서 나아가야 했다.

    그가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옆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려오더니 온몸에 얼룩이 가득한 2장 크기의 표범이 굵은 나무들을 부수며 돌진해왔다.

    “요수인가……?”

    벽곡기의 표범이 달려오자 심협의 눈에는 의외라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손을 휘둘러 정확하게 표범의 머리 위를 내리쳤다. 표범은 허공에서 세 바퀴 돌더니 그대로 날아갔는데, 땅에 떨어졌을 때는 목이 비틀어져 있었다.

    이미 죽은 표범을 보자 심협은 이전 꿈속 방촌산에서 처음 표범 요괴를 만나 쫓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심협은 피식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속을 빠져나왔는데, 눈앞에는 수백 장 높이의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산봉우리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균열이 산 끝까지 나 있었는데, 마치 도끼로 산의 절반을 쪼갠 것처럼 가운데에는 좁은 협곡이 있었다.

    채 다가가기도 전에 골짜기 안에서 도와달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협곡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금방 협곡 입구에 도착했지만 바로 달려들지 않고 왼쪽의 산 위로 올라가 협곡 아래를 살폈다.

    마치 큰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양쪽 산벽 곳곳에는 싸운 흔적이 가득했고, 적지 않은 돌들이 협곡의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심협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아래를 자세히 살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어지럽게 늘어선 돌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모습이나 기운으로 봐서 인간 같았다.

    옷이 찢기고 몸에는 뼈가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가 나 있었으며, 한쪽 팔은 이미 잘려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명의 마족 남자를 바라봤다.

    한 명은 푸른 피부에 송곳니가 나 있었고, 한 명은 머리에는 뿔이 솟았고 등에는 두 개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온몸을 감도는 마기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지?”

    푸른 피부의 마족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물었다.

    “없었지.”

    “그럼 저 여자는 내 거다.”

    푸른 피부의 마족이 침을 흘리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정혈과 법력만 흡수하고 어서 가야지. 여기서 무슨 뼈까지 빨아 먹을 생각이야? 이러다 다른 인간족이 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외뿔 마족이 다그쳤다.

    “인간족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데 누가 도우러 오겠어?”

    푸른 피부 마족은 개의치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 여자는 약속대로 네 것이니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리겠다면 난 먼저 간다.”

    외뿔 마족은 핀잔을 주더니 정말로 혼자 다른 협곡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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