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개막
금세 보름이 지났다.
삼계무도회에 관한 소식이 퍼질수록 장안성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성 안팎에는 구경 온 수사와 백성으로 가득했고, 어디서나 삼계무도회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성의 수많은 상회는 벌써부터 도박판을 열었다. 그러나 인간족에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안성 남영양(南永陽) 한쪽,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의 청풍관(淸風觀). 이곳은 1년 내내 닫혀 있었고, 좀처럼 외부에 개방하지 않았다.
붉은 칠이 된 문밖에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고리를 잡고 몇 번 두드렸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심 사형, 어서 들어오십시오.”
앳된 얼굴의 도동(道童)이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고는 말했다.
“나를 아는가?”
심협은 침착하게 물었다.
“저희 청풍관은 평소에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니 부인이 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사부님께서 당부하셨기에 사형께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동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청풍관은 면적이 넓지 않았지만, 영관전(靈官殿)이나 삼청전(三淸殿)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심협은 도동의 안내를 따라 뒤쪽 삼청전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삼청조사에게 향을 피우고 있는 보라색 수염의 진사원을 볼 수 있었다.
진사원 옆에는 회색 도포 차림의 마른 노인이 공손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청풍관의 관주임을 알 수 있었다.
“심 도우, 어서 오시오.”
진사원이 모든 예를 마치고는 문밖에 서 있는 심협을 보며 인사를 건네자 심협은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 관주, 일전에 소개했던, 춘추관의 명맥을 이어가는 심협 도우요.”
진사원은 마른 노인에게 소개하고는 다시 심협에게 말했다.
“심 도우, 이분은 청풍관의 우해(于海) 관주요. 모두 장안에 있으니 앞으로 자주 왕래하는 것도 좋겠소.”
“심 도우, 어서 오시오. 나와 춘추관의 나(羅) 도인은 사형제 관계라오. 일전에 함께 백산도장(白山道長)께 도법을 배웠소.”
우해는 환하게 웃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나 도인께는 가르침의 은혜가 있었지만 한 번도 언급한 걸 들어본 적이 없군요.”
심협은 예의상 공수하며 대답했으나, 내심 불쾌했다.
‘사형제? 그렇다면 춘추관이 위험에 빠졌을 때는 뭘 하고 있었지?’
우해는 그의 대답에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아무래도 심 도우가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음…… 삼계무도회에 대해서는 확실히 일부러 숨긴 게 맞소. 사죄하리다.”
진사원이 공수하며 허리를 숙였으나, 심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서 모두 드러낼 수 없었소. 오늘은 숨김없이 말씀드릴 테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오.”
진사원은 다시 공수하며 말했다.
“말해 보시죠.”
심협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자 옆에 있던 우해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이번에 심 도우에게 삼계무도회에 참가해 달라 청한 것은 우승을 원해서가 아니라 도우가 우리를 도와서 한 명을 제거해주길 바라서요. 그 일만 처리하고 시련이 끝날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는다면 큰 위험은 없을 것이오.”
“살인을 시키려던 것입니까?”
심협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 도우, 그자는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오. 수양산(首陽山) 집법당 장로의 관문 제자로, 일전에 우리 소모산 영역에서 요괴를 제거한다는 이유로 두 마을의 백성을 죽였소. 그 피로 법보를 제련하려는 것을 말리자 우리 소모산의 많은 제자를 죽였는데, 그중에는 우리 소모산 산주(山主)의 어린 아들도 있었소.”
진사원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양산이라면 심협도 들어본 적이 있다. 실력이 상당한 종문으로, 소모산과 막상막하였다. 비록 방촌산과 오장관 같은 대종문은 아니어도 쉽게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수양산 제자가 어째서 천 리나 떨어진 소모산 영역에서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그게…… 몇 대 위의 사문 선배들과 원한이 있었던 모양인데, 말하기는 좀 그렇소. 아무튼, 때문에 수양산에 그 흉수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못하는 상황이지.”
진사원의 표정은 어딘가 어색했다.
사실 심협은 잘 알고 있었다. 종문의 싸움에서는 상대방을 최대한 헐뜯어야만 자신이 얼마나 정정당당한지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다.
“심 도우,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소. 허나 그자의 법보를 본다면 내 말이 허언이 아닌 걸 알게 될 게요. 이번에 그자만 죽여준다면 <순양보전> 완전판을 춘추관의 전승으로 남겨주겠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춘추관의 <순양보전>이 완전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춘추관의 순양보전에는 순양검결과 순양검배의 정련과 온양하는 법만 있지 가장 중요한 마겁지법(磨劍之法)과 순양검식(純陽劍式)이 빠져 있소.”
심협은 그 말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항상 순양검배의 위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자신의 수련이나 온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양검결은 어검의 기초일 뿐, 마검지법을 빼놓을 수 없소. 순양검배가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려면 그에 가장 적합한 순양검식이 있어야 하오.”
진사원은 심협의 표정이 조금 변하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면 어째서 소모산 제자를 보내지 않는 것인지 알고 싶군요.”
심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믿을지 모르겠네만, 소모산의 일대제자 중 조사당 장로의 직계 외에는 대승기 수사가 없다네. 한데 수양산의 그 대승 중기 제자라는 자는 괴상한 연혈술(煉血術)을 익혔지.”
진사원의 표정은 씁쓸하면서도 난처해 보였다.
한마디로 소모산 직계의 목숨은 소중하니 함부로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고 심협의 목숨은 비천하니 성공하지 못해도 아쉬울 게 없다는 것 아닌가.
“소모산의 직계가 그런 상태라면 수양산에 눌릴 만도 하겠군요.”
심협은 속으로 냉소했다.
“심 도우의 높은 경지와 충분한 경험을 높이 산 것이오.”
“그럼 뒷일은? 내가 수양산의 보복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삼계무도회에 참가한 자들은 생사장을 쓸 테니 암암리에라도 보복할 생각은 못 할 거요. 그랬다가는 인, 선, 마, 요족 모두의 제재를 받게 될 테니.”
“생각해보겠습니다.”
심협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진사원은 다시 한번 권해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심협이 말없이 인사하고 떠나려 할 때였다. 진사원이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심 도우, 미안한 마음을 순양분검(純陽焚劍)으로 대신할 테니 부디 받아주시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심협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동해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이것이 순양검식인가!’
* * *
며칠 뒤, 장안성의 거리는 텅 빈 반면 황궁 앞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이번 삼계무도회를 위해 대당 조정은 황궁 서문 밖에 커다란 건물을 철거하고 본래의 주작 광장을 열 배나 넓혀 십만 명을 수용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거대한 회장을 만들었다.
회장 중심에는 33장 크기의 둥근 연무대(演武臺)가 만들어져 있었고, 뒤쪽 성문 근처에는 9척 높이의 대를 만들어놓았으며, 위에는 빈 의자가 늘어서 있었다.
비무대 밖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앞쪽은 종문이 관전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평범한 백성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종소리와 함께 회장 사방에서 열띤 함성이 터져 나왔고, 각 관전 구역에서 수많은 수사가 차례대로 들어와 앞쪽 구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심협도 사람들을 따라서 비무대 앞까지 왔지만, 바로 올라가지 않고 비무대 아래에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비무대 아래 머물렀다.
심협은 옆에 늘어서 있는 아홉 명의 인간족 수사를 바라봤다. 표정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기운을 정확히 간파할 수 없는, 칠순쯤 되어 보이는 백발노인이 있었다. 심협의 시선을 눈치챈 노인이 선한 미소를 짓자 얼굴의 주름이 활짝 펴졌다.
심협도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노인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흑의를 입은 채 오른팔에 가죽 갑옷을 덧댄 키가 큰 청년이 서 있었다. 엄숙한 표정에 눈썹은 단정했고, 살짝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앞뒤로 가볍게 흔들렸다.
‘저 황혁이란 자는 호흡법도 익힌 모양이군. 걷고 멈추는 동안에도 수련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한 게 틀림없어.’
심협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저자는 성격이 과묵하고 법력이 강하니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황혁 옆에 선 둥근 얼굴의 청년은 복장이 화려했고, 머리에는 옥관을 쓰고 있었다. 눈이 기이할 정도로 커서 조금 앳돼 보였다. 그도 은연중에 심협을 살피고 있었는데, 눈빛이 다소 불쾌한 듯했다.
그가 바로 수양산 집법당 장로의 직계 제자 조통(趙通)이었다.
‘내가 소모산의 의뢰를 받고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본래 기습으로 끝내려던 계획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상대도 대비하고 있을 테니 공방전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는 걸까?’
순양분검 일식을 받은 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은 데 대한 미안함과 성의 표시였을 뿐이니 그만두려면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을 터였다.
심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보니 연무대 맞은편에서 우람한 체구의 호랑이 머리 요물이 자기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 이름이 부동래였던가?’
심협은 상대를 알아보고 공수했다.
‘한데 저자가 왜 삼계무도회에 나왔지?’
심협은 의문이 들었다. 육화명은 분명 저자가 싸우는 것보다 문서 정리하는 일을 좋아해 문직에 몸담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부동래 옆에는 요염한 몸매에 착 달라붙은는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를 비롯해 여러 마족이 서 있었다. 다른 자들은 모두 남자였고, 몸집이 거대했으며, 살기가 새어 나왔다.
편견과 선입견 때문인지, 심협은 마족에 대한 느낌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들을 한참이나 살핀 뒤에야 심협은 시선을 선족에게로 옮겼다.
반대로 선족은 오히려 여자가 더 많아 절반 이상이었다. 그중 한 명은 머리를 곱게 올린 데다 복장은 화려했고, 몸이 노을빛으로 빛나 마치 선녀 같았다.
선족 제자들은 기품이 넘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인은 심협의 시선을 눈치챘으나 화를 내기는커녕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고, 심협은 왠지 부끄러웠다.
선족과 마주보는 자리에는 요족이 있었는데, 그중 아홉 명이 남자였다. 유일한 여자는 얼굴에 솜털이 가득했고, 뒤에는 보송보송한 긴 꼬리가 있었다. 고양이 요족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줄곧 옆에 선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를 향해 있었다. 그는 푸른색의 가벼운 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에는 옥으로 만든 관을 써서 보라색 머리를 정갈하게 올렸으며, 귀밑머리에는 하연 털이 나 있었다. 기다란 두 귀는 뾰족했다.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 옆의 여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일전에 육화명과 백소천이 여러 경로를 통해 모아 온 적지 않은 정보를 주었기에 그는 종족의 미래를 짊어진 저 천재들의 이름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선녀 같은 선족 여인의 이름은 희요(姬瑤). 천궁(天宮) 소속이다. 요족의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는 마왕채(魔王寨) 출신으로, 이름부터가 살기 가득한 칠살(七殺)이다.
그리고 오직 칠살만을 바라보는 고양이 요물은 화리(花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