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50화 (650/1,214)
  • 650화. 한 가지 조건

    “선배님, 저희 춘추관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건지요?”

    진명이 진사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네. 소모산 장교(掌敎)의 이름을 받들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분파들의 상황을 살펴보는 중이네.”

    “분파요?”

    진명의 눈에 감동이 스쳐 지나갔다.

    춘추관은 소모산의 분파였기에 역대 관주들 모두 상종(上宗)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춘추관의 실력은 너무나 약해서 소모산의 어떤 제자와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종문으로 돌아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한데 오늘 춘추관에 드디어 온 것이었다.

    “선배님께서 친히 춘추관에 왕림하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이 영재는 저희 춘추관이 그동안 모아온 것이니 선배님을 만난 인연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진명은 이를 살짝 물더니 심협이 준 저물 법기 중에서 가장 진귀한 몇 가지 영재를 진사원 앞에 내밀며 공손하게 말했다.

    “진 관주, 이게 무슨 뜻인가?”

    진사원은 진명이 들고 있는 것들을 보고는 받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선배님은 소모산에서 오신 사자이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춘추관은 창파(創派) 이래로 줄곧 한 가지 바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종문, 소모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선배님께서 저희 춘추관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물이 부족하면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전력을 다해 모아오겠습니다.”

    진명이 공손하게 말했다.

    “춘추관이 본 산으로 돌아오고 싶다? 불가능한 건 아니네.”

    진사원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정말입니까? 선배님, 어떤 요구든 무방하니 말씀만 하십시오!”

    진명이 기뻐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우선 이 영재들은 필요 없으니 거두게. 잠시 후에 심 도우와 한 가지 일을 상의할 것인데, 이 일은 춘추관과 소모산,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니 진 관주가 이 일이 성사되도록 돕는다면 춘추관이 다시 소모산으로 돌아가도록 보장하겠네.”

    “심 사제와 무슨 일을 의논하시려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진명은 멍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심협은 현재 춘추관의 기둥이다. 어찌 보면 춘추관이 소모산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니 절대로 마음을 식게 하는 일을 시킬 수 없었다.

    진사원은 진명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약간 움직여서 전음으로 전달했다.

    진명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선배님의 부탁을 후배는 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일은 심 사제의 안위와 관계가 있으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인의 의지에 달린 일이니 저는 절대로 제 사제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뭐라고 했나?”

    진사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진명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이에 진명은 몸이 덜덜 떨렸지만,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네.”

    진사원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동부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 * *

    동부 안. 심협은 천천히 몸 안에서 팽창하는 법력을 거두고는 두 눈을 떴다.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번의 돌파는 매우 순조로웠다.

    일원진수 안의 물의 영력과 순수한 법력을 흡수하면서 꿈속의 수련 경험을 토대로 물 흐르듯이 대승 중기로 돌파한 것이다.

    허나 일원진수는 이미 모두 사용했다. 이제 그의 수중에는 혼음원정과 벽옥교룡의 요단밖에 남지 않아서, 잘해야 대승 후기가 한계일 터였다. 그다음의 수련은 흑곰 요괴가 가지고 올 새로운 물의 영물을 기다려야 했다. 진선 후기의 흑곰 요괴라면 물의 영력이 담긴 보물을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이번에는 두 달이나 폐관해버렸군. 춘추관은 어떤지 가봐야겠어.”

    그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심협이 신식을 펼치자 바로 바깥에 있는 진명과 진사원이 감지됐다.

    “대승 후기! 몰락한 춘추관에 저런 고수가 어쩐 일로 찾아온 것인가?”

    * * *

    동부 밖.

    진사원과 진명, 두 사람은 조용히 기다렸다.

    주변의 안개가 양쪽으로 물러나면서 길이 생겼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서 오신 도우인지 모르겠지만 심모가 미처 마중을 나가지 못한 점, 책망치 말아주십시오.”

    진사원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진명을 내버려둔 채 막 생겨난 길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진명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동부 안에 마련된 주청에 도착하자 심협은 탁자 위에 영차를 준비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동부가 누추해 부끄럽군요. 어서 앉으시죠.”

    심협은 진사원을 살펴보며 자리를 권했다.

    “귀하가 심 도우로군요. 진 관주께 전해 들었소. 2백 년도 되지 않아 대승기의 경지에 들다니, 심 도우는 당대의 천재라 할 만하오.”

    진사원은 심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심 사제, 이분은 진사원 선배님이시네. 소모산에서 오셨지.”

    옆에 있던 진명이 나서서 소개했다.

    “소모산!”

    심협의 눈이 반짝거렸다.

    소모산의 명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소모산의 수사셨군요. 결례가 많았습니다. 한데 진 도우께서는 춘추관에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심협은 금세 안정을 되찾고는 공수하며 물었다.

    상종 소모산 사람으로서 분파들을 살펴보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닌 진사원은 어디를 가든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심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차분했다. 이를 본 진사원은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물론 진명이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춘추관에 대해 약간의 불쾌함이 생긴 것도 한몫했다.

    “종문의 명을 받들어 각지의 분파를 돌아보러 다니고 있소. 며칠 전 등주에 갔다가 춘추관이 천음문의 현음도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와본 것이오.”

    심협은 그 말에 내심 놀랐다. 귀장이 현음문의 수사를 죽인 일이 이토록 빨리 폭로됐단 말인가!

    그는 진명을 돌아봤다. 진명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심협의 얼굴은 다소 어두워졌다.

    그때, 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모두 제 잘못입니다.”

    심협은 귀장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혼자서 소란을 일으킨 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춘추관에 몸담고 있으니 걱정이었다.

    “천음문의 실력이 강하긴 하나 우리 소모산의 분파도 함부로 모욕을 당할 곳이 아니긴 하오.”

    진사원은 심협과 진명의 표정 변화를 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진 도우께서 오신 것은 춘추관을 소모산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입니까?”

    그도 춘추관의 염원이 줄곧 소모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역대 춘추관 조사들의 원을 푸는 동시에 소모산의 힘을 빌려 진명을 비롯한 춘추관을 보호할 수 있게 되리라.

    “춘추관이 소모산으로 돌아오는 것이야 어렵지 않소. 다만 천음문과 척을 진다면 소모산 장교님께서 특별히 보호해준다 해도 쉽지 않을 것이오.”

    진사원이 찻잔을 들어 영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진 도우께서는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요구라고 할 것도 없소. 그저 최근에 소모산에는 시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문중의 상황이 여의치 않소. 심 도우가 도와준다면 춘추관이 소모산으로 돌아와 천음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겠소.”

    진사원의 말에 옆에 있던 진명이 입을 열려 했으나, 신협이 제지하고는 다시 진사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가능한 일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심 도우는 장안성에서 삼계무도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듣기는 들었습니다만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삼계무도회는 인, 마, 선 삼계 종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비무시합이자 성대한 행사요. 우승한 자에게는 막대한 상이 내려지고, 그가 속한 종문은 삼계의 공동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삼계 제일의 문파로 도약할 수 있을 게요.”

    “그렇군요!”

    심협은 내심 감탄했다. 상품도 상품이지만 종문이 삼계의 지지를 받는 것은 더욱 대단한 일이었다.

    “마겁 이후, 많은 종문이 상당한 손해를 입었으니 무도회를 열어 하루빨리 삼계를 다시 일으켜 피해를 복구하자는 취지요.”

    “그렇군요.”

    “포상이 큰 만큼 삼계무도회는 매우 격렬할 게요. 참가자들은 비무 중에 승부를 가리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테지.”

    “승부를 내기 위해 생사까지 건다?”

    심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우리 같은 수선들이야 일찍부터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별로 큰일도 아니오. 그런 막대한 포상 앞에 한두 사람의 목숨이 대수겠소? 게다가 이번 기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종문에 복수할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여기겠지.”

    진사원은 웃으며 말했지만, 심협은 차가운 얼굴로 말없이 듣기만 했다.

    “무도회 동안 삼계 사람들은 천기성이 만든 현천경(懸天鏡)으로 상황을 지켜보게 될 테니 아주 흥미로울 게요.”

    진사원은 심협의 표정을 못 본 것처럼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진 도우께서는 제가 소모산을 대표하여 삼계무도회에 참가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렇지. 어떻소?”

    진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심협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원숭이 재롱부리는 듯한 무도회는 평소의 그라면 절대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춘추관을 일으키고 천음문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생각해봐야 했다. 자신이 계속 춘추관에 있을 거라면 모르겠지만, 언젠가 청화산을 떠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럼 춘추관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심협은 문득 진명을 돌아보았다.

    “심 사제, 무도회는 목숨이 걸린 일이니 춘추관 때문에 나설 필요는 없네.”

    심협은 사형의 말에 씩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부 입구로 가서 바깥을 내다봤다.

    춘추관의 건물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그의 경지 정도면 그곳의 시끌벅적한 광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춘추관은 백 년을 잠들어 있다가 어렵사리 다시 일어나고 있다. 만약 이대로 다시 무너진다면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겁이 사라졌으니 이제 사숙조와의 약조에 따라 춘추관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심협은 사숙조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마침내 생각을 굳혔다.

    “좋소! 심 도우는 역시 통쾌하오. 내 춘추관이 다시 소모산으로 돌아오고 천음문의 위협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약조하겠소!”

    진사원은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가슴을 치며 말했다.

    진명은 심협의 결심에 감격해 가슴이 벅차왔다.

    “삼계무도회는 언제 개최합니까?”

    “앞으로 열흘 뒤요. 준비가 필요하면 말만 하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돕겠소.”

    진사원은 전음 진반을 꺼내 건넸다.

    “감사합니다.”

    심협은 인사치레를 하지 않고 받았다.

    두 사람은 삼계무도회에 관한 중요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사원은 다른 분파를 마저 둘러보기 위해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사제, 삼계무도회는 매우 위험할 텐데 괜찮겠나?”

    진사원이 떠나자 진명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형,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는 자신 있습니다.”

    진명은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했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후 잠시 몇 마디 잡담을 나누었고, 이내 진명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심협은 동부 안을 거닐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밀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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