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43화 (643/1,214)

643화. 세 가지 일

“호법 선배님이셨군요! 선배님의 성취를 경하드립니다.”

심협은 의아한 눈으로 흑곰 요괴를 살펴보다가 공수하며 예를 올렸다.

옆에 있던 청의의 여자 등도 황급히 공수했다.

“한눈에 내 경지를 간파하다니, 심 소우의 안목은 여전히 날카롭군. 하하하!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물러가도 좋다.”

흑곰 요괴는 크게 웃더니 옆의 세 사람에게 말했다.

“네!”

청의의 여자 등은 인사하고는 물러갔다.

“따라오시게.”

흑곰 요괴가 아래로 내려갔고, 심협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종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보타산 뒤편 자죽림 부근의 한적한 골짜기로 내려가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커다란 약원으로, 안에는 붉은색, 푸른색, 보라색, 노란색 등의 각종 금제가 설치되어 약원을 여러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안에는 수백 종의 영초가 자랐다. 하나같이 천재지보급으로, 금제에 막혀 있음에도 짙은 약향이 풍겼다.

“무극초(無極草), 향촉등(香燭藤)…… 저것은…… 자뇌화(紫雷花!)”

심협의 눈이 굳어졌다. 이곳에는 자뇌화가 적잖이 있었던 것이다.

문득 조음동 부근에서 자뇌화가 자라던 것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흑곰 요괴는 오랫동안 이곳을 지켰으니 여기 자뇌화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영초들은 내가 삼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힘겹게 모은 것들이네. 그럭저럭 괜찮지 않나?”

흑곰 요괴는 심협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런 진귀한 영물은 선배님 같은 대능만 모을 수 있을 겁니다.”

흑곰 요괴는 정성을 다해 만든 이 약원에 오는 자는 너무 적어 자랑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심협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데에는 편하게 대화하려는 것 외에 한편으로는 자랑하기 위함도 있었다.

“알아주니 고맙네. 하하하!”

심협의 칭찬에 흑곰 요괴는 기분이 좋아져 껄껄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수많은 명주와 옥석이 박혀 있었고 바닥에는 미옥(美玉)이 깔려 있었다. 천장에는 각종 장식이 걸려 있어 매우 화려했다.

“호법 선배님, 채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심협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허허, 심 소우. 그리 걱정할 것 없네. 소장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만 있으니까. 지금 화련금지(花蓮禁地)에서 폐관하며 진선기로 돌파를 시도하고 있네.”

“진선기 돌파!”

심협은 깜짝 놀랐다.

지난 번 꿈에 들기 전에 섭채주는 대승기로 돌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진선기라니!

허나 생각해보면 백 년이 지났고, 섭채주의 자질은 워낙 뛰어나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채주가 벌써 진선기 돌파를 시작했구나. 나도 서둘러야겠군.’

심협은 마족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풀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소장문의 자질은 아주 뛰어나다네. 게다가 우리 보타산의 자원이면 수련 정진의 속도가 빠른 것도 당연하지. 오히려 심 소우의 수련 경지가 조금 지체된 것 같군. 이전에 소우와 함께 왔던 백소천 도우도 얼마 전에 보타산을 방문했었는데, 곧 대승 후기에 도달할 것 같던데 말이야.”

흑곰 요괴의 말에 심협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백 년을 자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것이다.

허나 옥침은 깨졌어도 꿈속의 경험과 기억은 남아 있으니 대승기에 관한 깨달음을 잘 알고 있었다. 충분한 원기만 있으면 금방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일이 조금 있어서 얼마 전까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새 많이 뒤처졌군요. 저도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심협이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건가?”

흑곰 요괴는 내심 긴장한 듯 물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벌써 해결되었으니 선배님은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심협이 자세히 말하지 않자 흑곰 요괴도 더는 묻지 않았다.

“선배님, 혹시 감로수 같은 수(水) 속성 영력이 담긴 보물이나 단약이 있으신지요? 비록 제 경지는 낮지만 모아놓은 자원은 좀 있으니 가능하다면 교환하고 싶습니다.”

심협은 공수하며 물어보고는 탁자 위로 소매를 휘둘렀다.

10여 가지 물건들이 탁자에 나타났는데, 대부분이 각종 진귀한 영초였다. 이전에 여아촌과 눈물 요괴의 동굴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흑곰 요괴는 정성을 들여 약원을 꾸몄으니 당연히 영초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진귀한 것을 꺼냈다. 다른 영재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영재들을 훑는 흑곰 요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이에 심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영초와 영재들이 진귀하다고는 해도 이는 대승기 수사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흑곰 요괴 같은 진선 후기에게는 당연히 눈에 차지 않을 터.

심협이 안타까워하며 이 요괴의 마음을 흔들려면 무엇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허! 이것은 빙개초(氷盖草)가 아닌가!”

흑곰 요괴가 갑자기 눈이 커져 눈처럼 하얀 영초를 바라봤다.

“맞습니다, 빙개초입니다. 역시 선배님의 안목은 놀랍군요!”

심협은 재빨리 받아쳤다.

“이 영초는 인간 세계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내 곳곳의 영천 동부를 찾아다녀도 찾지 못했거늘, 자네는 어디서 얻은 겐가?”

흑곰 요괴가 다급하게 빙개초를 집어 들며 말했다.

“동해 바다 밑에 숨겨진 동굴 안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저도 고적에서 간략한 기록을 보긴 했지만, 구체적인 효능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네. 빙개초는 상고 시기의 영초로, 품급은 높지 않으나 그 안에는 혼돈살기(混沌煞氣)가 담겨 있어 단약을 제조하기에 제격이지. 신체를 자극하고 육체를 정련하는 효과가 있어 나 같은 요족의 신체에 적합하다네. 상고 무족 대전 시기에 요족은 이 빙개초를 사용하여 무족과의 싸움에서 항상 우위를 점했다네.”

“육체를 정련해주는 약초로군요!”

심협의 눈이 반짝거렸지만 이내 어두워졌다.

빙개초는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을 심어서 기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원도, 시간도 없었다.

“나한테는 수 속성 영물은 많지 않네. 두 방울의 정제되지 않은 감로수가 전부지. 그 정도면 그래도 당분간 자네의 수련에 도움이 될 텐데…… 빙개초와 이거, 이거…… 이렇게 세 가지와 감로수 두 방을을 교환하고 싶은데, 어떤가?”

흑곰 요괴는 빙개초와 다른 영초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가능합니다.”

심협은 내심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흑곰 요괴도 두말하지 않고 푸른 옥병을 꺼내서 건넸다.

심협은 옥병을 받고 신식으로 살펴봤다. 들은 대로 병 안에는 두 방울의 감로수가 들어 순수한 물의 영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전에 얻었던 것보다는 못했지만, 담겨 있는 물의 영력은 상당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옥병을 챙겼다.

“심 도우는 경지가 높지 않은데도 가진 게 꽤 많군.”

흑곰 요괴도 세 그루의 영초를 챙기며 웃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보다 저에게 보물이 하나 있는데 선배님께 아주 유용할 겁니다.”

심협이 슬쩍 말을 던지자 흑곰 요괴가 궁금한 듯 바짝 다가앉았다.

“오, 어떤 물건인가?”

“어느 태을 선배님이 남긴 수련 서찰입니다. 여기에 태을 경지로 돌파할 때의 깨달음이 적혀 있습니다.”

그가 말한 태을 수사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흑곰 요괴는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경지는 이미 진선 후기에 도달했으니 다음은 태을 경지였다. 태을 수사가 돌파할 때 얻은 깨달음이라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니 어떻게 해서든 얻어야만 할 물건이었다.

보타산의 관월진인도 태을 경지로 돌파했지만, 주로 보타산이 모은 비보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 흑곰 요괴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관월진인의 수련 서찰을 함부로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 소우, 내가 무엇을 주면 되겠나?”

흑곰 요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선배님께서 저 대신 세 가지 일을 대신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심협은 노랗게 물든 오래된 옥간을 꺼내며 말했다.

“어떤 일인가?”

“첫 번째로, 지금 저는 수련용 수 속성 보물 외에는 딱히 필요한 물건이 없습니다. 호법 선배께서는 경지가 높으니 벗들의 경지도 분명히 높겠죠. 그러니 선배님께서 저를 위해 수련용 단약이나 보물을 대신 모아주십시오.”

심협은 이미 생각해놓은 바를 말했다.

“문제없네.”

다소 번거롭긴 하겠지만, 시간만 좀 들이면 될 일이니 문제없었다.

“두 번째는 방금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육체를 정련하는 단약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선배님께서 빙개초로 그 단약을 연단하시면 제게 조금만 나눠주십시오.”

심협은 잠깐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꿈속의 전투를 통해 그는 강인한 육체가 싸움에서 얼마나 유용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허나 현실에서는 황정경을 수련해보려 해도 자질이 부족해 속도가 너무도 느렸고, 아직까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만약 빙개초로 만든 단약이 육체를 정련하는 데 효과가 좋다면 황정경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좋네. 다만 빙개초를 기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 단약까지 만들려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네. 그러니 우선은 육체를 단련하는 데 효과가 있는 다른 단약을 줄 테니 그 수련 서찰을 줄 수 있겠나? 빙심단은 후에 연단이 되면 바로 주겠네.”

흑곰 요괴가 잠시 고민한 끝에 제안하자 심협도 흥미가 있었다.

“다른 단약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효과가 좋습니까?”

“뇌골단(雷骨丹)이라는 단약일세. 19종의 진귀한 영재를 혼합하고 뇌전으로 정수를 뽑아내 만들지. 이 단약을 복용하면 그 안에 담긴 뇌전의 힘이 뼈와 육신을 정련해주니 인간족 수사에게도 유용하다네. 연체 공법과 배합하면 효과는 더 커질 걸세.”

흑곰 요괴는 설명하는 와중에 옥병을 꺼내 던졌다.

심협은 옥병을 받아 쥐고는 신식으로 살폈다. 안에는 10여 개의 오금색(烏金色) 단약이 들어 있었고, 위에는 뇌전 모양의 꽃무늬가 있었다. 하나하나가 강렬한 약효를 뿜어내는 것이 설백단보다도 강해 보였다.

“좋은 단약이군요. 다만 양이 좀 적은 것 같습니다.”

심협은 환하게 웃으며 옥병을 넣었다.

“있는 건 전부 주겠네.”

흑곰 요괴는 10여 개의 옥병을 꺼내 전부 건넸다.

“제게 다 주시면 호법 선배님이 쓰실 게 없지 않습니까?”

심협은 바로 거두지 않고 말했다.

“지금의 내게는 뇌골단이 별 효과가 없네. 모두 가져도 좋아.”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심협은 기꺼이 단약을 전부 챙겼다.

“자, 세 번째 요구는 뭔가?”

앞의 두 가지 조건만이 전부라면 값이 너무 싼 것이다.

“세 번째는…… 약원에 있는 자뇌화가 필요합니다. 부적을 만들 때 그 영초가 필요하지요. 제게 자뇌화 몇 그루와 봉황미, 월성자를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옥침이 깨졌으니 그는 꿈속의 경지를 소환할 수 있는 패가 사라졌다. 더 많은 곤토인뇌부를 만들어 대비해야 했다. 다만 요구가 과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우려가 됐다.

“좋네.”

예상 외로 흑곰 요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뇌화를 가지러 갔다.

그사이 심협은 이전에 꿈속에서 태을 경지로 돌파할 때 얻은 심득과 깨달음이 새겨진 오래된 옥간을 꺼냈고, 흑곰 요괴가 가지고 온 다섯 그루의 자뇌화와 교환했다.

흑곰 요괴는 지보를 얻은 것처럼 옥간을 받은 뒤 바로 이마에 대고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심협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저 역시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좋은 거래였습니다. 그 심득 또한 가장 필요한 곳에 쓰인 셈이니 다행입니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잠시 더 대화를 나눈 뒤, 심협은 또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영재를 흑곰 요괴의 것과 교환하고는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흑곰 요괴는 웃는 얼굴로 심협을 배웅하고는 둔광이 멀어지자 그제야 웃음을 거두고 보타산이 아닌 동해 쪽으로 날아갔다.

한편, 심협은 보타산을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춘화현으로 향했다.

일전에 동해로 간 후로 혹시나 집안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칠까 그는 돌아가지 않았었다.

허나 이제 마겁이 사라지고 천하가 태평해졌으니 서둘러 집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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