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삼계의 성대한 행사
“육형.”
심협은 손을 내리고는 역시 환하게 웃었다.
상대는 바로 육화명이었다. 한데 그의 옆에는 미모의 여인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고화령이었다.
“심 도우.”
고화령이 먼저 인사했다.
심협은 그녀의 등장이 의외였으나 곧장 공수로 화답했다.
“심형, 그동안 어딜 갔었던 게요? 어찌 소식도 없었소?”
육화명이 물었다.
“설명하기가 참 어렵소.”
심협은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시며 즉답을 피했다.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회포는 풀어야하지 않겠소? 하하하!”
육화명이 웃으며 권하자 심협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근래 장안성이 시끄럽던데, 무슨 잔치라도 열리나 봅니다.”
심협은 삼계무도회가 떠올라 곧장 물었다.
“첫 삼계무도회가 곧 장안성에서 열리는데, 몰랐소?”
육화명이 의외란 듯이 되물었고, 심협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근 백 년 만에 삼계에서 가장 성대한 일인데 정말 몰랐다고?”
육화명이 재차 확인하자 심협은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사실, 몇 년 전에 선인의 유적에 잘못 들어갔다가 법진의 함정에 빠져 갇혔지 뭐요. 반년 전에 겨우 탈출해서 장안에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소.”
“그랬군. 심형이 그런 변고를 겪었을 줄은 몰랐소.”
육화명은 심협을 매우 신임했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고화령은 그 말을 듣고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르는 게 당연하겠군. 삼계무도회는 삼계의 각 종족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비무 대회요. 이번에 삼계의 일부 문파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도회에 참가하는데, 대련으로 자신을 높이고 상금도 탈…….”
“마기다!”
육화명의 설명을 듣던 심협이 갑자기 경계하는 기색으로 싸늘하게 외쳤다. 조금도 숨기지 않은 마기가 느껴졌으나, 분명 고령화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기가 느껴지는 곳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몸집에 갑주를 입은 호랑이 머리 요괴가 손에는 공문서 두루마리를 든 채 당당하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심협의 탐색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막 손목을 돌려 용각추를 꺼내던 심협은 이내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 머리 요괴가 눈을 크게 뜨며 환하게 웃더니 마치 옛 벗에게 인사라도 하듯 긴 발톱이 달린 손을 들고 흔든 것이었다.
심협은 하얀 빛이 반짝거리는 송곳니를 보고는 넋이 나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육화명도 한 손을 들고는 호랑이 머리 요괴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호랑이 머리 요괴의 모습이 복도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심협은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육화명은 심협의 표정을 보고는 설명했다.
“저 친구는 부동래(府東來)라고 하는데, 관부에서 근무하고 있소. 전력은 약하지 않은데 문직(文職)을 더 좋아하지.”
“내가 잘못 본 거요? 아니면 저자가 마족이 맞소?”
심협이 허탈해하며 묻자 육화명이 깜빡했다는 듯 이마를 두드렸다.
“심형이 한동안 비경에 갇혀서 세상일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잊었구려. 이제 마겁은 사라졌고, 삼계는 평화로워졌소. 이제 마환(魔患)은 없지. 인간, 신선, 마족 간에 동맹을 맺고 공존하고 있소.”
“지금 뭐라고…… 마겁이 사라졌다고 했소?”
심협은 머릿속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소. 마겁은 사라졌고 지금은 삼계가 태평한, 보기 드문 국면이 도래했소.”
육화명은 심협의 놀란 모습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대며 말했다.
“어찌 된 게요?”
이번에 깨어나서 본 세계는 모든 게 이상했다. 자신이 치우를 쓰러뜨리고 다시 봉인한 것은 미래다. 그러니 지금 세상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어야 한다.
한데 지금, 이 세계는 이전과 너무도 달랐고 천지가 개벽할 변화가 일어났다.
“대략 백 년 전의 일이오. 심형이 말도 없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족 내부에 소란이 있었지. 일부 마족들이 더는 치우의 봉인을 풀기 위해 자신과 후손들의 희생을 원하지 않았소. 이들은 어느 반란군 지도자의 인솔에 따라 비밀리에 천궁과 대당 관부를 비롯한 인, 선, 요, 삼족과 연합하여 다른 마족 세력들의 계획을 무너트리고 구명을 죽였지.”
“구명이 죽었다고 했소? 다른 십이존자는 어찌 됐소?”
심협은 의아한 듯 물었다.
“일부는 구명과 함께 죽었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반란 세력 편에 섰소. 사실 마족 내부의 몇몇 종문은 그 싸움에서 전력이 상당히 손상됐고, 이후로도 포기하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 허나 여력이 거의 남지 않았소. 게다가 천궁이 치우의 봉인을 더욱 견고하게 한 덕에 마겁의 우려는 사라지게 된 거요.”
“그 반란군의 지도자가 누구요?”
심협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모르오.”
“삼계의 공신인데 어찌 모를 수 있소?”
“그의 신분을 아는 자는 마족 내부와 삼계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도 넘지 않을 게요.”
이때, 고화령이 끼어들었다.
“삼계가 그의 신분을 공포하지 않은 것은 사실 그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군요. 마족에는 여전히 치우를 옹호하는 세력이 숨어 있을 테니…….”
심협도 고화령의 말을 듣고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족과 선족, 요족만이 아니라 심지어 우리 인간들 중에도 계속 환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자들이 적지 않지.”
“마족보다도 더 문제인 자들이구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치우라는 큰 나무가 쓰러졌으니 남은 원숭이들도 거의 흩어졌고, 쥐새끼 같은 놈들은 더 이상 큰 파란을 일으키지 못할 거요.”
육화명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삼계무도회는 인간과 신선, 마족 간의 비무 대회요?”
“그렇소. 요족은 사실 인간족보다도 더 마족을 미워했으니……. 허나 따지고 보면 그들도 마족의 한 부류가 아니오? 음…… 물론 좀 특이한 부류긴 하지.”
이들의 대화는 이어졌고, 심협은 덕분에 현세의 변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육화명은 심협을 정교금에게 안내한 후 숙소를 마련해줬다.
* * *
깊은 밤. 심협은 침대에 가부좌를 한 채 부서진 옥침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깊은 한숨이 나왔다.
꿈속을 넘나들며 쉽게 깨지 않는 악몽 같은 온갖 위험을 겪고 돌아왔건만, 현세의 급격한 변화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치우의 마겁이 이렇게 해결되었다?’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심협은 좀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잘된 일 아닌가.”
그러면서도 심협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신식을 운공한 그는 이내 다시 눈을 떴다. 한데 두 눈에는 의외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책 파편의 허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이번에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꿈속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신혼이 더욱 강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꿈속에서 수련했던 기억들이 마치 현세에서도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만 그의 경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여전히 막 대승기를 돌파한 상태였다.
“이상하군. 이번에는 수명이 다한 느낌이 들지 않아.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심협은 그 싸움에서 마지막에 마수수가 용의 발톱으로 심장을 뚫었던 것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고는 몸서리쳤다.
그 여인은 정말로 지독했다. 다행히도 육화명은 그녀가 마족의 반란 중 죽었다고 했다.
심협은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모아 순양검배를 소환한 뒤, 공법을 운공하며 천천히 온양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장안성 교외. 웅장한 천년 고찰 앞에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오래된 나무 아래에 서서 구불구불한 무늬를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원 산문에서 갑자기 환호성이 들려왔고, 조용하던 고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심형!”
뒤이어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사원 계단을 훌쩍 뛰어 내려와 청의의 남자 앞에 섰다. 그는 부채를 접더니 상대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말도 없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가?”
백소천이 반가워하며 묻자 심협은 슬며시 미소를 지은 후 입을 열었다.
“그게…….”
그는 일전에 육화명에게 설명한 내용에 조금 더 살을 보태고 구체적인 내용을 조금 수정해 백소천에게 설명했다.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그런 일에 어찌 혼자 간 게야? 왜! 내가 자네 기연이라도 뺏을 것 같았나?”
백소천은 눈을 부라리고는 짐짓 화가 난 듯 따졌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도 여행 갔다가 우연히 들어간 건데 어떻게 부르겠소? 그리고 괜히 둘 다 고생하는 것보다야 혼자 고생하는 게 나았을 거요.”
심협은 웃으며 답했다.
“흠, 어쨌든 돌아와서 다행이네. 더는 육화명을 찾아가서 따질 필요가 없게 됐군.”
백소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에게 뭘 따졌단 말이오?”
“자네가 하도 연락이 안 되니까 나는 또 관부에서 자네에게 마족에 관한 비밀 임무라도 준 줄 알고 계속 따졌지 뭔가.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니…….”
백소천의 말에 심협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가서 실컷 마시세. 오늘 밤은 취할 때까지 마셔 보자고!”
백소천은 심협의 어깨를 움켜잡고는 다짜고짜 끌고 가며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은 화생사를 나와 장안의 한 주점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다.
성문 입구에서 헤어질 때쯤 백소천이 심협의 소매를 잡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심협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답했다.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집이나 보타산에 다녀와야 할 것 같소.”
말을 마친 그의 눈빛은 조금 어두워졌다.
수행자에게야 백 년은 별것 아닌 시간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두 세대가 지났을 세월이다. 춘화현 집도 아마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근래 나는 대승 후기로 돌파할 중요한 순간이라 함께 가기는 힘들겠네. 그러면 스승님께 호되게 혼날 게야.”
“내가 무슨 어린애요? 얼른 돌파나 하시오.”
백소천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하자 심협은 농담 섞어 꾸짖었다.
두 사람은 헤어진 뒤 각자의 길을 갔다.
심협은 생각에 잠긴 채 장안 관부로 향했다.
꿈속에서 섭채주가 했던 말이 떠오른 그는 길게 심호흡하고는 중얼거렸다.
“보타산에 다녀오자.”
심협은 장안성을 떠나 순양검배로 몸을 감싸고는 붉은 무지개가 되어 보타산 쪽으로 날아갔다.
경지가 높아진 그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보타산에 도착했다. 보타산 위에는 구름이 피어올랐고, 선학이 날아다녔다. 백 년 전보다 선기(仙氣)가 더 충만하여 마치 선경 같았다.
심협이 보타산에 다가서자 몇 개의 둔광이 날아와 막아섰다.
그가 속도를 늦추자 둔광들도 멀지 않은 곳에 멈췄다. 둔광이 사라지고 세 명의 젊은 남녀가 나타났는데, 경지는 높지 않았다. 선두에는 청의(靑衣)의 여인이 있었는데 출규 초기였고, 다른 두 명은 응혼 후기였다.
“선배님은 누구십니까? 보타산에는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지요?”
선두의 여인은 신식으로 심협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기운을 느끼고는 놀란 기색으로 공수했다.
그때, 여인 뒤에 있던 응혼 후기의 마른 청년이 갑자기 외쳤다.
“호, 혹시…… 심협 도우, 아니 심협 선배님?”
심협은 그를 돌아봤지만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아마 저를 기억하시지는 못하겠지만, 제가 그때 보타산에서 선배님의 거처를 지켰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기억이 날 듯했다. 그때 보타산에서 폐관할 때 흑곰 요괴가 그의 거처를 지키기 위해 배정해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저 백 년이 지나면서 상대의 외모가 조금 달라져 한순간 못 알아본 것뿐이었다.
“심협 선배님이라고? 소장문(少掌門)의 부군?”
청의의 여인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심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가 말한 소장문이 섭채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채주가 벌써 보타산의 소장문이 되었나? 아무래도 백 년간 적잖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가볍게 공수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심협이오. 이번에 보타산에 온 것은 섭 소장문을 만나 의논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나 어째서인지 청의의 여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소장문을 뵙는 건 조금 곤란합니다만…….”
“왜 그러시오? 채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하하, 심 소우가 오셨구먼! 멀리 마중 나가지 못한 걸 용서해주시게.”
우렁찬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더니 허공에서 검은 곰이 불쑥 나타났다. 흑곰 요괴였다.
흑곰 요괴의 요기는 더욱 강렬해져 진선 후기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