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41화 (641/1,214)
  • 641화. 백 년

    때는 정월 대보름이었다. 장안성에는 겨울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성안은 시끌벅적했다.

    거리 양옆 상점들의 화려한 등불과 온갖 음식과 향신료 냄새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떠들썩한 소리가 좀처럼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기운이 넘쳤다.

    청의의 남자가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다소 힘없는 걸음걸이와 어두운 표정은 환하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다른 행인들과는 확연히 대조 되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청초하고 안색이 좀 창백한 청년은 다름 아닌 심협이었다.

    다만 그의 눈가는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까맣고 깊은 눈에는 온갖 고생의 흔적이 느껴졌다.

    심협은 좀 전에 장안 서사의 주인에게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가 꿈에 들기 전으로부터 벌써 백 년이나 지나 있었던 것이다.

    “백 년…… 벌써 백 년이나 지났다니……. 큰일이다. 치우의 봉인이 느슨해졌을 거야!”

    심협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꿈속에서 그들은 온갖 고생을 겪었고, 모든 이의 목숨을 바치면서 치우를 겨우 다시 봉인했다. 한데 결국 구한 것은 어두운 미래뿐이었다.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백 년이 훌쩍 지나갔고, 인간 세계는 많이 바뀌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장안성 사람들을 바라보던 심협은 갑자기 찾아온 무력감에 몸서리를 쳤다. 평안하게 정월 대보름을 지내는 백성들은 자신들을 찾아올 처참한 미래를 알지 못했다.

    “우선 관부로 가서 정국공 등에게 지금 상황을 물어보자.”

    결정을 내린 심협은 곧장 관부로 향했다.

    거리를 지난 그가 성안의 주도로에 도착했을 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비켜! 어서 비켜!”

    돌아보니 몸길이가 1장에 이르는 커다란 황소가 네 발로 성난 듯 달려오고 있었다. 황소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뚱뚱한 소년이 고삐를 당기는 중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소의 돌진은 너무도 빨랐고 기세도 대단해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아 그대로 심협을 향해 돌진해왔다.

    심협은 덤덤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죽…….”

    뚱뚱한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으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소의 커다란 머리는 심협의 손에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펑!

    묵직한 소리와 함께 황소의 머리는 움푹 파였고, 그대로 몸 안으로 처박혀버렸다.

    뚱뚱한 소년은 관성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10여 장 밖의 돌길까지 날아갔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피떡이 될 것이 분명한 그때, 푸른 빛이 소년을 감쌌고, 이 빛에 둘러싸인 소년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검은 옷의 수사가 뒤에서 황급히 달려오더니 이미 바지에 오줌을 지린 뚱뚱한 소년 앞에 버티고 섰다.

    “감히 우리 도련님의 탈것을 망가트리다니, 네놈은 누구냐!”

    검은 옷의 수사는 심협을 노려보며 차갑게 외쳤다.

    심협은 그의 추궁을 듣지도 않고 몸을 굽혀 쓰러진 황소를 자세히 살폈다.

    그의 앞에 있는 황소에게는 피와 살이 전혀 없었다. 남은 것은 각종 바퀴와 철제 파편뿐이었다.

    “꼭두각시? 좀 다른데…… 영력 파동이 없어.”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무렵, 간신히 정신을 차린 뚱뚱한 소년은 얼굴이 새빨개져 심협의 등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때려! 저놈을 당장 때려죽여! 저놈이 감히 내 언수(偃獸)를 부쉈다고!”

    검은 옷의 수사는 그 말에 표정이 변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언수가 전속력으로 달려 충돌할 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앞에 있는 이자는 그 힘을 너무도 쉽게 막았고, 심지어 언수를 가볍게 부쉈다. 상대는 수사임이 분명한 이상 절대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됐다.

    “이게 뭐요?”

    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심협이 부서진 황소의 파편에서 둥근 은색 구슬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 그건 언추(偃樞)인데…… 모르시오?”

    검은 옷의 수사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당황하며 대꾸했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언추도 모르는 것을 보니 분명 어디 시골구석에서 튀어나온 애송이로구나. 아무런 배경도 없다면 두려울 게 없지.’

    그런 생각에 그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덧붙였다.

    “어이, 너! 네가 우리 도련님을 다치게 할 뻔했으니 어서 무릎을 꿇어라!”

    심협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곧장 사월보를 시전하여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검은 옷 수사의 옆에 나타나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눌렀다.

    연기기에 불과한 검은 옷의 수사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두 다리가 풀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펑!

    무릎에 찍힌 바닥의 돌이 부서졌고,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기고만장했던 뚱뚱한 소년은 넋이 나가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심협이 바라보자 소년은 깜짝 놀라 검은 옷 수사 옆에 무릎을 꿇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바지가 다시 축축해졌다.

    “언추가 뭐지?”

    심협이 물었다.

    “서, 선배님. 정말로 언추를 모르십니까?”

    검은 옷의 수사는 괜히 트집 잡힐까 봐 더는 건방지게 굴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심협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가볍게 흘겨보았다.

    “언추는 언수의 핵심으로, 언수를 가동하는 연료와 같습니다. 안에는 부싯돌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자동으로 타올라 언수를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검은 옷의 수사가 서둘러 설명했다.

    “이 황소가 그 언수란 말이지? 부싯돌로 움직인다?”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에 그도 화린 부싯돌을 사용하는 비주를 탄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정도의 효능이 있는 부싯돌은 매우 진귀했다.

    ‘이 황소 언수의 정교함은 비주에도 뒤처지지 않았는데 평범한 부싯돌로 움직인다? 게다가 법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 언추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의아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 황소가 언수입니다. 저번 달에 천기각(天機閣)에 막 도착한 새로운 물건입니다.”

    검은 옷의 수사가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천기각? 천기성과는 무슨 관계지?”

    “천기각은 천기성이 설립한 곳으로, 대당에 130여 지점이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상식도 모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검은 옷의 수사는 의아한 눈으로 심협을 살폈다.

    심협은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천기성은 심협도 알고 있었다. 적뢰산의 싸움에서 천기성의 안택이 도와준 덕분에 그와 많은 호족이 살아남지 않았던가.

    다만 천기성은 그 이후 치우를 토벌하는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심협과 검은 옷의 수사가 일문일답하는 사이, 주변에는 어느새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검은 옷의 수사로서는 매우 창피했지만, 감히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한데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곧 검은 갑옷의 기병들이 사람들 사이로 다가왔다.

    검은 옷의 수사는 생명줄을 잡는 심정으로 크게 외쳤다.

    “도둑이다! 여기 도둑이 있소!”

    그 목소리에 검은 갑옷 기병들은 바로 도를 뽑아 들고 다가왔다.

    빛나는 검은 갑옷과 미세하게 새겨진 부문, 은은한 광택이 비치는 도. 결코 평범한 병졸은 아닐 터였다.

    “무슨 일이오?”

    그중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우리는 국구부(國舅府) 사람이고, 이분은 국구야(國舅爺)의 아드님이오. 한데 방금 이자에게 기습을 당해 언수가 부서졌소. 어서 이자를 체포하시오!”

    검은 옷의 수사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검은 갑옷의 기병은 대당 관부 직속이었고, 대부분이 연기 3, 4층 정도의 수사였다. 평소에는 황성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데, 비록 경지는 높지 않아도 배후에 대당 관부가 있으니 누구도 감히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심협은 사실을 왜곡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뒷짐을 진 채 평온해 보였다.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기른 검은 갑옷 기병의 우두머리는 한쪽에 놓인 황소의 파편과 심협 등을 살피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언수를 부쉈으니 더 일을 키우지 말고 배상하고 어서 가시오.”

    기병 대장의 말투에는 거침이 없었지만,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뭐라고? 우리 도련님을 다치게 했으니 절대 이대로 가게 둘 수 없소!”

    검은 옷의 수사가 바로 소리쳤다.

    뚱뚱한 소년도 멍하니 있다가 바로 바닥에 드러누워 비명을 질러댔다.

    지켜보던 자들은 그 광경에 야유를 보냈다.

    “대당의 법에 따르면 성안에서 짐승이 사람을 다치게 하면 투옥이오. 잘 생각하고 말씀하시오.”

    기병 대장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검은 옷의 수사는 머뭇거렸으나, 바닥에 쓰러졌던 소년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투옥? 내 숙부님이 형부에 계시는데?”

    그 말에 기병 대장은 곤란한 듯했다. 그들은 평소 황성의 치안을 지키기에 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그들의 체면을 살려줘야 했다.

    검은 옷의 수사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더니 이때가 기회라는 듯 또 외쳐댔다.

    “저자는 수사인데 행적이 아주 수상하오. 지명수배자일 수도 있으니 데리고 가서 심문해 보시오.”

    기병 대장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선사님, 수고스럽지만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내가 왜 그대들을 따라가야 하오?”

    심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이 모습을 본 검은 옷의 수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심협이 반항하면 기병들이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을 터. 그리 되면 분명히 대당 관부의 수사를 불러올 테니 저자가 아무리 강해도 관부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죄만 더 키우는 꼴인 것이다.

    기병 대장은 심협이 말에 조금 짜증이 난 듯 생각하더니 말했다.

    “근래에 장안성은 삼계무도회(三界武道會)를 준비하고 있기에 장안으로 들어오는 선사와 수사는 모두 관부에 등록해야 합니다. 선사께서 이미 등록하셨다면 문첩(文牒)이 있을 테니 저희가 한번 검사해 보겠습니다.”

    “문첩? 없소.”

    삼계무도회라는 말조차 생소한 심협이 그런 것을 가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할 것 같군요.”

    “성에 들어와도 등록하지 않았다니, 도적이 틀림없소!”

    검은 옷의 수사가 재빨리 끼어들었으나, 심협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뒤집어 금색 영패를 꺼내더니 기병 대장에게 건넸다.

    “문첩은 없소. 허나 이 정도면 신분은 증명이 될 듯한데……?”

    기병 대장은 심협이 건넨 옥패를 받아서 보고는 안색이 급변해 황급히 공수했다.

    “아이고, 제가 집안사람도 몰라뵀군요. 관부의 수사셨다니, 부디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선배님.”

    “괜찮소. 그대가 법대로만 일을 처리한다면 내 책망할 게 뭐가 있겠소?”

    심협이 영패를 거두며 슬며시 웃었다.

    기병 대장은 그 말을 듣자 표정이 굳어졌고 바로 호통쳤다.

    “감히 사실을 왜곡하고 무고한 사람을 모함한 저자를 잡아들여라!”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바로 달려와 어안이 벙벙한 검은 옷의 수사를 꽁꽁 묶었다.

    그가 막 용서를 빌려는 순간, 시커먼 도의 등이 그의 입을 후려쳤다. 검은 옷의 수사는 애원 대신 비명을 질러대며 피를 쏟았다.

    뚱뚱한 소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검은 옷의 수사가 끌려갈 때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심협은 더는 시간을 낭비할 뜻이 없었기에 기병 대장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기억에 따라 대당 관부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관부 대문 앞에 도착했다.

    경비병이 그의 앞을 막아섰고, 심협이 남긴 영패를 꼼꼼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휙 돌려 갑자기 날아온 주먹을 잡았다.

    “그렇게 가버리고는 한참을 안 보여서 신선이라도 된 줄 알았더니, 드디어 돌아온 게요? 하하하!”

    주먹을 뻗은 자는 호탕하게 웃었는데, 누가 들어도 매우 기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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