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더 강력한 존재
한편, 심협의 잔혼 역시 마기에 침투당하면서 신혼과의 연결을 타고 흘러든 마기가 그의 본체에 침투하고 있었다.
대진 앞의 양전도 이 현상을 금방 알아챘다. 심협과 종규의 몸에서 마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는데 특히, 종규는 십이존자에 맞먹는 마족이 되어갔다.
그가 막 무슨 행동을 취하려는데, 불현 듯 심협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미간에서 한 줄기 빛이 그대로 법진을 뚫고 황미의 미간으로 떨어졌다.
쾅!
황미의 식해 공간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섭채주 등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식해 공간에서 하얀 빛이 밝아지면서 마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힘이 갑자기 뿜어져 나왔다.
주변의 마기는 이 힘에 닿자 마치 정화된 것처럼 일제히 사라져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황미는 경악했으나,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그의 신혼체에 한 사람의 신혼이 나타나더니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마기가 침투되어 신혼이 매우 불안정한 와중에도 종규가 고개를 들어서 보니 심협의 분신이 하얀 빛과 점점 합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점점 흐려졌지만, 마른 체구의 노승은 점점 선명해졌다.
“지장왕 보살님…….”
종규는 그를 알아보고는 황급히 엎드렸고, 우마왕 등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갔다.
자비로운 표정의 마른 노승이 손을 휘두르자 종규로서도 다시 닫기 힘들었던 귀안의 소용돌이가 닫혔다.
“자네들은 아직 더 필요한 존재들이니 이런 곳에서 쓸데없는 희생을 해서는 안 되네.”
“지장…… 마, 말도 안 돼! 당신은 이미 사라졌…….”
황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달달 떨었고, 말을 채 마치지도 못했다.
“아미타불. 생사적멸은 헛된 것에 불과하다네. 자네는 당시 이미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서 어찌 또 길을 잃은 겐가?”
지장왕 보살이 불호를 외우며 물었다.
“큰 잘못? 난 단지 대세에 따랐을 뿐이다. 그게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퍼뜩 정신이 든 황미는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대세를 따르느라 도를 따르지 않음은 도가 없음이로다. 그것이 옳은가?”
지장왕 보살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대세를 따라 천도를 멸하면 마도가 바로 도다. 어찌 도가 없단 말이냐?”
황미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차갑게 비웃었다.
“됐네. 됐어. 내 자네가 찾는 도를 보여주지.”
지장왕 보살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세가 순식간에 증폭했다. 황미의 식해 공간임에도 마치 지장왕 보살의 공간 같았다. 그가 손을 내밀자 주위가 변했다.
황미는 급히 맞서려 했지만, 눈앞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면서 사방이 어두워졌다.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며 곳곳에서 끝없는 살육과 울부짖음, 비명, 피 그리고 불길이 대지를 뒤덮었다. 삼계에는 더 이상 인간 세계, 연옥, 선역의 구분이 없었고, 모든 곳이 마족의 땅이 되었다.
“이것이 자네가 원하던 마도인가?”
지장왕 보살의 목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졌다.
“이런 환상 따위…… 선불의 위선이 가득한 것보다는 차라리 마족의 천하가 낫다! 다가오는 것이 파멸이라 해도 나는 절대 회심하지 않을 것이다!”
황미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험악한 얼굴로 광기에 차 소리쳤다.
“불문의 혜택을 무수한 세월 동안 입었으면서도 불문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구나. 자네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나?”
지장왕 보살은 탄식과 함께 손바닥을 쳤다.
황미의 신혼이 강하게 흔들리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희는 목숨을 구차하게 연명할 뿐이다. 깊은 잠에 빠진 치우가 곧 깨어날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이냐? 그때가 되면 삼계의 어디나 지옥일 것이니 모두가 지옥에 빠지리라!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신혼에 갑자기 불꽃이 타올랐고 금색의 서책이 허공에 나타났다. 동시에 신혼의 불꽃에 뒤덮였다.
“어찌 이렇게까지……?”
지장왕 보살은 깊게 탄식했다.
“같이 사라져주마. 천책을 얻을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하하하!”
황미의 신혼은 이미 일그러졌지만, 마치 모두가 함께 불타는 광경을 보는 것처럼 여전히 사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장왕 보살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섭채주 주변을 돌고 있던 버드나무 가지의 허상이 바로 날아오르더니 허공에서 점점 줄어들어 한 방울의 감로수가 되어 불꽃 속으로 떨어졌다.
똑!
가벼운 소리와 함께 금색 서책의 불꽃이 순식간에 꺼졌고, 푸른 빛에 둘러싸인 서책이 천천히 섭채주 앞으로 날아갔다.
섭채주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지장왕 보살을 올려다봤다.
“받게나. 미륵불조는 본래 관음보살의 손을 빌려 자네에게 물려주려 했네. 다만 암수를 당해서 황미의 손에 떨어졌을 뿐. 그러니 이제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간 것뿐이네.”
지장왕 보살의 격려에 섭채주는 깊게 예를 올리고는 손을 들어서 천책을 받았다.
손이 닿는 순간, 그녀의 신혼이 순식간에 점점 부서져가는 황미의 식해에서 벗어나 금색 공간에 나타났다.
한편, 지장왕 보살은 우마왕 등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삼계의 미래는 이제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종규 등은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깊게 예를 올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지장왕 보살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심협의 신혼 분신을 잠시 지장왕 보살이 차지했지만, 그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갑시다. 이곳은 곧 무너질 테니 돌아가야만 하오.”
* * *
신혼 분신이 돌아오면서 제단 앞의 사람들은 차례대로 눈을 떴다.
“마침내 깨어났군. 진원 대선과 합류해야 하니 서두르게!”
양전은 기뻐하면서도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리가 없는 그들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명이 쳐들어왔네.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으니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해!”
양전이 서둘러 설명하는 와중에도 밖에서는 비명과 외침이 들려왔고, 인간족과 선족 제자들이 도망쳐왔다.
“갑시다!”
나지막이 외치고 떠나려던 순간, 심협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그는 황미의 몸을 뒤적거리더니 매우 정교한 저물 주머니를 챙겼다.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하늘 높은 곳에서 거대한 손바닥이 내려와 지옥의 하늘이 둘로 나뉘었고, 구름이 솟구치면서 거대한 골짜기가 생겨났다.
골짜기에서 두 개의 구름이 용솟음쳤는데, 그 위에서는 진원자가 구명과 싸우고 있었다. 주변에는 마족들이 몰려와서 진원자를 죽이려 들었다.
그때,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비켜라!”
동시에 골짜기 상공에 눈부신 오색신광이 비쳤다.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휘황찬란하고 강렬한 빛이었다.
이어서 천둥소리가 쉬지 않고 울리더니 하늘의 골짜기가 미처 닫히기도 전에 더 강력한 힘이 흔들리면서 흩어졌다.
“구명! 한 번만 더 끼어들면 네놈 먼저 없애버리겠다.”
또 한 번의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쿵!
오색신광이 다시 반짝였다. 이어서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골짜기에서 진원자가 오색의 빛의 기둥에 부딪혀 땅으로 떨어졌다.
심협 등이 서둘러 다가가보니 진원자는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그의 오른팔 소매가 타오르듯 화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오색 빛의 기둥을 흡수했다.
“진원 대선!”
모두가 외쳤다.
“괜찮네. 천책은 얻었나?”
황미 신혼의 기운이 이미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아챈 진원자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성공했습니다.”
섭채주가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진원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기쁜 듯 웃었다.
“허나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치우가 곧 깨어날 것 같아요.”
이나타가 말했다.
“과거 멸세의 싸움 이후로 치우는 힘을 모두 소모하고 장안성에서 수백 년간 잠들어 있었지. 그동안 마족이 끊임없이 힘을 주입하였으니 분명 깨어날 때가 되긴 했네.”
진원자는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가 깨어났다면 우리는 절대 맞설 수 없을 겁니다.”
양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과거 천정의 싸움은 매우 격렬했는데, 그는 직접 겪었던 사람이자 생존자였다. 원고 시대 전쟁의 신의 진정한 실력을 그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네. 마족은 구명뿐만 아니라 더 강력한 놈도 합류했어. 지금은 역부족이니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야 하네.”
한데 진원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는데, 마치 누군가 싸우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다시 한번 욕설이 울려 퍼졌다.
“구명,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저 잡것들은 네 맘대로 해도 좋지만 진원자는 내 몫이다. 네 위치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널 먼저 죽여주마!”
“흥!”
구명은 콧방귀를 뀌었으나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구명이 한 수 접게 만들다니, 도대체 어떤 강자란 말인가!
“심협, 자네는 지옥미궁으로 들어왔으니 돌아가는 길도 알고 있지 않은가?”
양전이 물어봤다.
“저는 허곤에게 끌려왔습니다. 지도가 있긴 한데 길은 전혀 모릅니다.”
심협이 씁쓸한 표정으로 지옥미궁의 지도를 꺼냈다.
한데 지도를 펼친 그는 멍해졌다. 지도에는 음살곡을 통과하여 욕망의 늪으로 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건 길이 아닌가요?”
이나타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이 길은 제가 간 길이 아닌데…… 설마 지장왕 보살께서……?”
심협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강력한 위압감이 몰려왔다. 이에 태을 강자들마저 가슴이 철렁했다.
“쫓아왔군.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자네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먼저 철수하게.”
말을 마친 진원자의 몸에서 푸른 빛이 폭증하더니 몸이 산처럼 커졌다. 그는 그대로 구름에 손을 밀어 넣었다.
콰르릉!
천지가 흔들리면서 폐허 전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양전이 황급히 외치며 모두를 이끌고 음살곡으로 달려갔다.
심협이 선두에서 지옥미궁의 지도를 들고 지도에 그려진 길의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며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상선님.”
그가 옆을 바라보자 청노가 있었다.
“왜 도망치지 않았어?”
“제가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이제 상선님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청노는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심협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다리를 건너 검은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곳 지부로 도망친 잔여 세력은 만 명에 가까웠는데, 그중 인, 선 두 종족은 소수였고 오히려 요족 수사가 더 많았다.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족은 처음부터 인, 선 두 종족을 노렸고, 오히려 요족은 자신들 휘하로 끌어들이려 했다. 물론 이를 거부하는 자는 모두 죽였다.
무리가 지옥미궁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마족 대군이 쫓아왔다.
음살곡을 지나자 심협 등의 앞에는 광활한 평원이 나타났다. 그곳은 눈처럼 하얗고 초목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매우 황량해 보였다.
평원에 들어선 그들은 새하얗게 보이는 것이 수많은 뼈들임을 알게 됐다. 대다수는 인간의 뼈였고, 커다란 요족의 시체도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오래되어 이미 썩어서 가루가 된 상태였다.
그들은 감히 함부로 달리지 못하고 심협의 안내에 따랐다.
하지만 얼마 가기도 전에 대열의 우측 멀지 않은 곳에서 땅이 갑자기 무너지더니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그 동굴에서 거대한 해골 손이 튀어나와 땅을 짚으며 거대한 몸이 기어 올라왔다.
그 몸은 족히 백 장은 되어 보였다. 전체적인 윤곽은 인간의 뼈와 다를 게 없었지만, 네 개의 팔에 뼈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고, 위에는 싸늘한 도깨비불이 타올랐다.
살아 있는 생명들을 감지하자 해골은 커다란 눈에서 귀물의 불을 활활 불태우며 네 개의 창을 휘둘렀다. 그러더니 사람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달려요!”
이나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불꽃이 튀면서 해골의 거대한 몸은 폭발해 가루가 되어 무너졌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쪽에서 땅이 무너지더니 세 개의 거대한 코끼리뼈가 땅을 뚫고 올라와 돌진해왔다. 이번에는 우마왕이 나서서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