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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12화 (612/1,214)

612화. 정체

심협의 말을 끝으로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내 기억이 옳다면 천정을 먼저 함락한 다음에 마족이 지부를 공격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잠시 후, 심협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맞네.”

종규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부는 충분한 대비를 했을 텐데 어째서 그리 빨리 함락된 겁니까?”

심협이 계속해서 물었다.

한참 뒤, 종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그때의 일도 좀 수상쩍네. 지장왕 보살의 계획대로 했다면 마족을 막아내지는 못하더라도 그리 처참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걸세. 나중에 몇 년이 지나고, 사람들은 저항조차 하지 않고 투항했다고 우리를 비난하더군.”

심협은 말없이 손에 있는 박룡권을 내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종규는 심협이 입을 다물자 자신도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이상한 소리에 이어 종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하지만 그 목소리는 목구멍이 뭔가에 막힌 듯한 앓는 소리에 이어 곧 조용해졌다.

“누구요?”

심협은 긴장한 듯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예요.”

다소 딱딱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채주?”

심협은 의외였다.

“금요는 황미 스승님의 법보라서 약간의 틈밖에 벌릴 수 없어요. 나올 수 있겠어요?”

“여기는 왜 왔어?”

“그건 나중에…… 우선 꺼내줄게요.”

섭채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심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작게 답했다.

“알겠어.”

섭채주는 쓰러져 있는 종규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정교한 백옥 정병을 꺼내 두 손가락을 꼬아서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는 뭔가를 읊조렸다.

잠시 후, 버드나무 가지가 정병에서 날아오르더니 금요 위를 가볍게 찍었다.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한 방울의 영롱한 물방울이 떨어지더니 금요의 굳게 닫힌 틈으로 날아갔다.

한 방울의 물이 닿는 순간, 본래 빈틈없이 굳게 닫혀 있던 금요는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고, 금빛이 새어 나왔다.

섭채주는 긴장한 표정으로 결인하여 법력을 남김없이 물방울 속으로 흘려보냈다.

법력이 끊임없이 주입되자 물방울이 하얗게 빛나더니 점점 커지면서 거의 보이지 않는 금요의 좁은 틈을 힘겹게 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금빛이 폭발하면서 커진 물방울이 펑 하고 터졌고, 두 개의 금요도 다시 닫혀버렸다.

“안 돼!”

섭채주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고, 거의 동시에 체내의 법력이 부족하여 쓰러지려 했다.

한데 갑자기 옆에 나타난 누군가의 넓은 가슴이 그녀를 부축했다.

“오라버니!”

섭채주는 심협을 보고는 크게 기뻐했다.

“여기는 대화하기에 좋지 않으니 음귀곡으로 가서 얘기하자.”

“절 따라오세요.”

섭채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두 사람은 제단을 벗어나 지옥미궁 쪽으로 향했다.

이와 동시에, 멀지 않은 곳의 부서진 건축물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진원자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걸려들었군.”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순간, 가까운 곳에 있던 다른 사람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 * *

허겁지겁 도망쳐 음살곡 입구에 도착했 때, 섭채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심협이 황급히 물어봤다.

“오라버니는…… 정말 배신자가 아니죠?”

섭채주는 심협의 두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절대 아니야.”

심협은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럼 됐어요. 가세요. 저는 여기까지만…….”

섭채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같이 안 간다고?”

“오라버니도 다른 사람의 부탁을 짊어지고 있듯이 저에게도 스승님의 유언이 있어요. 오라버니가 죽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 직책까지 포기할 수 없어요. 그러니 저는 남아야 해요.”

섭채주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나는…….”

심협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이내 말문이 막혔다.

“오라버니,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섭채주가 다시 물었다.

“정말이야.”

심협은 또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로 천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부디 마겁을 막아서 이 엉망인 미래를 구해주세요. 그리고…… 나와 쭉 함께해줘요. 다시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섭채주의 미소는 슬퍼 보였다.

“약속할게.”

심협은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받은 섭채주의 미소는 한층 가벼워졌고, 그녀는 말없이 심협에게 손을 흔들더니 되돌아갔다.

심협은 그녀의 조금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한참 후에야 몸을 돌려 골짜기 사이의 다리로 향했다.

심협이 다리를 건너 맞은편에 도착했을 때, 앞의 검은 대나무 숲에서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심 도우, 어디를 가는 건가?”

상대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황미 도우…….”

심협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내가 올 걸 예상했나?”

뇌 도인은 심협의 반응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금요는 당신의 법보이니 변고가 생기면 당연히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원 대선의 박룡권은 건드리지 못했지요. 다만 이토록 빨리 온 것은 놀랍군요.”

심협이 웃으며 답했다.

“이상할 것도 없지. 이제 그만 천책을 내놓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자네를 살려줄 수 있네.”

“나는 또 얌전히 함께 돌아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까?”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돌아가면 자네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튼, 자네가 마족의 첩자든 아니든 나는 관심 없네. 천책만 내놓고 우리의 반정과 천도의 회복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되네. 그리고 적뇌산과 오장관은…… 자네와 그들의 개인적인 원한일 뿐이지.”

“시원시원하니 좋군요. 한데 내가 도우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출가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네. 천책을 내놓으면 바로 놔주겠네.”

“하하! 천책을 내놓아라 이 말인가? 아무래도 그럴 필요 없겠군. 이리 되었으니 더는 속일 필요 없겠지. 그래, 난 마족에 투항했다! 본래 마지막에 공을 세우려 했건만, 아쉽게도 발각됐구나! 허나 지금쯤 구명 대인께서 18층 지옥과 지옥미궁을 협공하기 위해 두 갈래로 병사를 보내셨을 게다.”

심협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뇌 도인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협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허, 심 도우. 농담이 지나치구려. 하마터면 속을 뻔했소. 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럼 힘을 쓰는 수밖에…….”

황미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갑자기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심협의 앞에 나타나 머리를 노리고 손을 휘둘렀다.

심협은 두 손이 여전히 박룡권에 묶여 있던 터라 사용할 수 있는 법력이 제한되었기에 사월보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의 발에서 달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갑자기 발밑이 강하게 흔들리고 커다란 돌이 떠올랐다. 이에 심협의 보법은 일순 느려지고야 말았다.

황미의 공격이 막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심협은 기합과 함께 남은 모든 법력을 사용하여 영롱탑을 소환했다.

금빛이 반짝이더니 금탑의 허상이 솟구쳐서 그를 감쌌다. 황미의 공격이 떨어지자 탑의 금빛이 강하게 흔들렸고, 허상도 조금 움츠러들었다.

“박룡권에 묶인 채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뇌 도인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일견 느려 보이지만 매우 빨랐고 기세도 강력해 좀 전의 공격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펑!

둔탁한 굉음과 함께 탑이 흔들리면서 더욱 줄어들었고, 금빛도 어두워졌다. 심협은 충격에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뇌 도인이 계속 공격해오자 심협이 황급하게 외쳤다.

“요풍, 어서 나와서 돕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내가 죽으면 너도 열매는 없다.”

그의 외침에 황미는 표정이 급변했고, 들어 올렸던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

그 순간, 검은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크게 일더니 누군가가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곧바로 뇌 도인에게 들이닥쳤다.

뇌 도인은 심협에게 향했던 손의 방향을 바꿔 검은 소용돌이를 내리쳤다.

소용돌이 속의 그는 황미와 충돌하자 곧장 뒤로 물러났다.

모습이 드러난 그는 검은 옷에 삿갓을 쓴 채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짙은 마기가 물씬 풍겼다.

“요풍?”

뇌 도인은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지금 가지 않으면 잠시 후 마족 대군이 올 게다.”

심협은 그 틈에 요풍의 뒤로 가서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뇌 도인을 돌아봤다.

“정말로 마족에게 투항한 건가?”

뇌 도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연한 소리! 인선 두 종족은 미약하기 그지없건만, 마족에게 투항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잠복 임무만 아니었다면 진즉 세련을 받고 마족이 됐을 것이다!”

심협이 콧방귀를 뀌며 답하자 뇌 도인의 안색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망설이는 듯한 눈으로 검은 대나무 숲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며 조용히 물었다.

“구명이 그대에게 잠복을 명한 것이오?”

“아니, 내 직속 상사는 용진 존자다. 이번에는 임무를 위해 차출된 셈이니 구명 대인께 신분을 노출시켰을 뿐이지.”

심협은 비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한데 그 말에 뇌 도인은 표정이 풀어지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편이군.”

“같은 편?”

심협은 의아한 듯 되물었으나, 이내 상대를 사납게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하! 내가 이따위 수작질을 믿을 것 같으냐?”

“허허, 안 믿을 줄 알았소. 이전에 오장관을 함락할 때 구명에게 참천대진(參天大陣)의 진도(陣圖)를 넘긴 건 자네가 아니지 않은가?”

뇌 도인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후 다소 경계하는 얼굴로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말 같은 편이라는 말이지? 다른 증거는?”

“증거? 자네부터 내놓지?”

뇌 도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따지듯 내뱉었다.

심협은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까지 살피며 조용히 답했다.

“나 같은 자가 증거를 가지고 다니겠소? 발각되면 어쩌려고? 나와 진룡 존자는 줄곧 직접 연락을 해왔고, 내 진짜 정체를 아는 것도 그녀뿐이오. 그럼에도 굳이 증거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녀가 경하 용왕과 인간 사이의 여식이고 본명은 마수수라는 것 정도면 되겠소?”

그제야 뇌 도인의 눈에서는 마지막 의심마저 마침내 사라졌다.

진룡 존자는 자신의 과거, 특히 인간이었을 때의 일을 깊이 숨기고 있는 만큼 마족 중에서도 그 정체를 아는 자가 매우 적었다. 그러니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녀와 관계가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으리라.

“심 도우가 같은 편일 줄은 생각도 못 했소. 그럼 더는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겠군. 그럼 방금 말했던 구명의 협공도……?”

뇌 도인이 웃으며 바로 물었다.

“물론 허세 아니겠소! 당신이나 나나 정보를 보낸 적이 없는데 그들이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겠소? 요풍 도우도 본래 여기서 날 만나기로 약조돼 있었지.”

심협이 웃으며 답하자 뇌 도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심협은 그가 던진 마지막 질문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정보를 보낸 적이 없고 심협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유용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을 터. 그러니 당연히 정보를 보냈을 리가 없고, 구명도 당연히 공격해 올 리가 없다. 심협이 만약 공격이 진짜라고 했다면 오히려 의심을 사고 정체가 발각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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