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10화 (610/1,214)
  • 610화. 마음을 묻다(問心)

    그때, 줄곧 묵묵히 서 있던 종규가 공수하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종규 도우, 편하게 말하시오.”

    진원 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과 저는 천 년 전에 자주 교류했소. 내 지금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유명귀왕과 싸울 때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쯤 여기에 없었을 것이오.”

    “흥! 그게 저놈의 수법인 걸 모르시오? 옥호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나서서 도와줘서 환심을 샀소! 그 이후의 일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게요.”

    “그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갑자기 미약한 목소리가 검은 대나무 숲에서 들려왔고, 모두가 돌아보는 가운데 안색이 창백한 남자가 숲에서 걸어 나왔다.

    청노를 본 심협은 의외의 등장에 다소 놀랐다.

    “당신들 말이야! 휴…… 심 선배님은 당신들을 찾겠다고 지부로 와서 흑산노요의 저택에서 지도를 훔치다가 발각돼 흑산과 구명에게 죽을 뻔했고, 어렵게 지옥미궁으로 도망쳤다가 또 허곤을 만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하시오? 만약 정말 배신자라면 그런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까지 연기를 하겠소? 그리고 그렇게 연기해서 또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야 네놈의 말일 뿐이지, 사실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옥면공주와 홍해아 등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듯 우마왕은 적극적으로 심협을 몰아붙였다.

    “그게 다 우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지. 네놈과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어찌 믿겠느냐!”

    그때, 화 도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양전(楊戩), 우마왕. 너무 단정하지는 말게. 심 도우, 만약 자네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있다면 어서 말하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흠, 방법이 있긴 하군. 내게 문심경(問心鏡)이라는 보물이 있으니, 원한다면 우리가 자네를 데리고 돌아가 그 거울로 비춰보겠네. 어떤가?”

    뇌 도인이 갑자기 불쑥 다가와 말했다.

    “문심경?”

    진원 대선 등이 일제히 의의라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황미, 자네 스승인 미륵불이 돌아가시면서 원심경이 마족의 손에 넘어간 줄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대의 손에 있는 것이오?”

    양전, 즉 화 도인이 뇌 도인에게 말했다.

    “원심경이 있다면 해보는 것도 괜찮겠군. 심 도우, 어떤가?”

    진원 대선이 말했다.

    “원심경이 무엇입니까? 만약 신혼의 기억을 살펴보는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억울한 누명이나 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를 믿지 못하고 기억을 살펴볼 생각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모두와 헤어지겠습니다.”

    심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자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만약 결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여기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양전의 차가운 목소리에 심협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심 도우, 안심하게. 원심경은 자네의 심경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네. 질문의 답에 거울이 진위를 판단해주는 게지. 신혼이나 기억까지 살펴볼 수는 없네.”

    진원 대선이 말했다.

    “그렇다면 시도해볼 만하군요.”

    심협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영롱보탑과 진해빈철곤을 거두며 말했다.

    “만일을 위해 우선 자네를 가둬야겠네.”

    양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꿈도 꾸지 마시죠.”

    심협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당당하다면 뭐가 걱정인가?”

    우마왕이 불쑥 끼어들자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배신자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니까 그러는 것 아니오!’

    그때, 먼 산골짜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또다시 일고여덟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부드러운 눈빛은 매우 눈에 익었다. 섭채주였다.

    그가 섭채주를 봤을 때, 그녀도 그를 발견했다. 눈에 희색이 스쳤으나,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 의심이 풀리지 않음과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기에 그녀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심협의 시선은 그녀에게 한참을 머물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중에는 키가 크지 않고 외모가 앳된 동자도 있었다. 그는 사내아이였지만 머리에는 두 개의 비녀를 꼽고 있었고, 연꽃이 그려진 치마를 입은 데다 허리에는 붉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가슴에는 금색의 둥근 고리 장식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어 다소 기이했다.

    “당신이 심협인가요?”

    근처에 이르자 섭채주가 말하기도 전에 그 동자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낭랑해서 더욱 앳돼 보였다.

    “그렇다.”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롱보탑이 당신에게 있죠?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심협은 그 말에 담긴 의미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는 언제나 신중하셨어요. 그분이 영롱보탑을 당신에게 줬으니 저는 당신이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믿어요. 아, 저는 이나타(李哪吒)에요. 탁탑천왕 이정(李靖)이 제 아버지죠.”

    심협은 그 말에 마음이 조금 풀어져 그에게 공수했다.

    ‘왜 찾아온 거예요? 제가 글을 남겼잖아요. 찾지 말고 혼자 도망가라니까?’

    이때, 섭채주의 전음이 들려왔다.

    심협은 옷에 적혀 있던 글이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당신이 아니라면 찾지 말고 혼자 도망가요. 만약 당신이라면…….’

    만약 그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섭채주는 그가 자신들을 찾지 말고 혼자 도망치기를 바랐다.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말 그가 배신자라면 섭채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리라.

    “내가 아니야. 난 배신하지 않았다.”

    심협은 모두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에게, 특히 섭채주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섭채주는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설령 천년을 보지 못했음에도 이 한마디에 그녀의 가슴속에 있던 체증이 내려갔다.

    그녀는 믿었다. 그는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배신자가 아니다.

    “그럼 문신경의 질문을 받겠나?”

    뇌 도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받겠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을 뒤로 돌렸다.

    진원자는 심협의 태도가 달라진 것과 짧은 순간 섭채주를 바라보던 눈빛을 보고는 어렴풋이 알아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소매에서 은색 고리가 날아가면서 커지더니 아래로 내려와 심협을 덮었고, 이내 줄어들면서 그의 허리춤을 묶었다.

    “이건 내 박룡권(縛龍圈)이네. 잠깐 자네의 법력을 봉인할 뿐, 억지로 벗어나려고만 하지 않으면 털끝도 건드리지 않을 걸세.”

    “상관없습니다. 이미 결심했으니 다른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지.”

    진원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그의 소매가 펄럭이면서 강한 바람이 곧바로 심협과 청노를 감싸더니 그대로 음귀곡을 지나 맞은편 골짜기로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뒤를 따랐다.

    “소매 속의 건곤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역시 지선의 선조군요.”

    청노는 진원자의 소매 속 공간에서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날 위해서 나서다니, 의외로군.”

    심협이 청노를 돌아보며 말했다.

    “상선님께서 저를 몇 번이나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제가 큰 쓸모가 없음에도 말입니다. 저 역시 의외였습니다. 게다가…… 상선님이 억울하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구명은 정말로 상선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청노가 웃으며 말했다.

    “날 믿어주는 사람이 고작 몇 명뿐일 줄이야…….”

    심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명이요? 저는 저 혼자인 줄 알았는데…….”

    청노는 어리둥절했고, 심협은 쓰게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한참이 지난 뒤, 심협은 눈앞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청노와 함께 떠올랐다.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들은 하얀 돌의 부서진 제단 위에 있었고, 주변에는 수십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너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대략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뇌 도인이 조용히 걸어 나와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황색 주머니에서 정교하게 생긴 작은 청동 거울을 꺼내서 제단 위로 던졌다. 이어서 가볍게 주문을 외우자 청동 거울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순식간에 수백 배로 커져 제단 중앙에 펼쳐졌다. 겉에는 은빛이 반짝였는데,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맑아서 짙은 먹구름이 보였다.

    “심 도우. 문심경 위에 올라가면 우리가 질문을 하겠네. 자네가 본심으로 말하면 거울에서는 크저 작은 물결이 출렁이겠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숨긴다면 거울에서는 격한 물결이 일어날 걸세. 알겠나?”

    뇌 도인이 물었다.

    “알겠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걸어 가 스스로 문심경 위에 올랐다.

    거울을 딛고 서자 작은 소리가 울렸지만, 거울은 여전히 평안했고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좋아. 그럼 진원 대사께서 먼저 물어보시죠.”

    진원자는 사양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서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는 인선 연맹의 정보를 마족에게 넘겨서 배신한 적이 있나?”

    “없습니다.”

    심협의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대답했지만 거울은 여전히 평온했고 한 점의 물결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것을 보자 조용한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엇!”

    “진짜 아니네?”

    “문심경이 틀릴 리가 없는데…….”

    섭채주는 평온한 거울을 보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심협을 바라보는 두 눈은 더욱 반짝였다.

    “그렇게 물어보면 소용없습니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우리 쪽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배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끊었다.

    “그렇군! 처음부터 마족 놈이었다면 우리를 공격한 게 배신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군.”

    사람들이 또 소동을 일으켰다.

    “자네는 마족의 편에 섰었나?”

    진원자가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심협이 고개를 저었다.

    이때, 거울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어났지만 이내 바로 사라졌다.

    “이정이 본심으로 자네에게 천책을 넘겼는가?”

    진원자가 화제를 바꿔서 물었다.

    “……네.”

    심협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때 그는 옥침이 부여한 끊임없는 재생 능력으로 이정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니 이정의 본심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답을 마치자 거울에서 갑자기 이전보다 조금 더 큰 물결이 일어났다.

    이에 심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이나타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심협이 정말로 이정의 인정을 받아서 영롱보탑을 받았다면 그도 불만이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친의 물건을 절대로 하찮은 자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천책은 자네에게 있나?”

    진원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심협도 머뭇거리지 않았고, 거울도 평온했다.

    “오장관이 습격을 받을 때 어디에 있었지?”

    우마왕이 갑자기 끼어들어 물었다.

    “오지산에서 폐관하며 태을경으로 돌파했습니다.”

    심협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물결이 다시 일렁였지만, 여전히 크지 않았다. 이곳 시공간에 있었던 그때, 그는 정말로 폐관하고 있었다.

    “적뇌산이 공격을 당할 때 왜 사라졌고 보이지 않았던 거지?”

    우마왕이 한 걸음 다가오면서 물었다.

    “저는…….”

    심협은 말문이 막혔고 뭐라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대답한단 말인가? 당시 그는 시공간을 뚫고 현실 세계로 돌아가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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