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08화 (608/1,214)
  • 608화. 최후의 사명

    “보살님은 계속 저더러 변수라 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변수는…… 말 그대로 변수라네. 자네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천책이 무슨 용도인지는 알고 있나?”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만, 천책은 천도의 규칙에 따라 생기는 것으로, 여기에 적혀 있는 천계, 선계, 불계의 진짜 이름이 마족에 대항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무기이자 치우를 제압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 물건은 천도의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지면서 천도가 나누어졌고, 천도 법칙이 정상적으로 순환하지 못하면서 천도의 힘으로 치우를 제압할 수 없게 된 것이네.”

    “천도의 힘으로 치우를 제압하다니요! 그렇다면 다섯 권의 천책을 다시 하나로 합치면 천도의 힘이 돌아와 치우도 다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져 다급히 물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천도의 힘만으로 치우를 제압할 수 있었다면 천책이 나누어지기 전에는 치우가 어떻게 봉인을 해제했겠는가?”

    “그럼 뭐가 더……?”

    궁금한 듯 묻던 심협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설마…… 산하사직도(山河社稷圖)?”

    “참 똑똑한 시주로군. 자네 말이 맞네. 치우는 죽일 수 없으니 오직 산하사직도만이 치우를 봉인할 수 있지. 그리고 또 하나가 더 필요해.”

    “그게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 바로 믿음이네. 삼계 중 인간은 선과 마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삼계의 균형을 좌지우지하지. 과거 처음으로 치우를 봉인한 것도 사람, 바로 인간의 시조인 헌원황제와 신농염제였지. 그러니 인간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네.”

    “그렇다면 당승 사제 일행이 서역으로 가서 진경을 가져올 때 마지막에 대승 불법을 널리 설파한 것도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욕심 같은 잡념을 버리고 인간 세계의 기상을 바르게 하여 봉인을 굳히기 위함이었던 것입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인간 세계의 태평이 오래되면서 마족의 공포를 모두 잊고 물욕에 빠져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했지. 불법(佛法)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네. 옛날, 지부의 악귀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알게 되었네.”

    지장왕 보살은 쓰게 웃었다.

    “보살님, 사실 다섯 권의 천서는 이미 모두 모았습니다. 다만 산하사직도는 부서진 이후로 당성의 제자들이 가지고 가서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히 못 찾을 걸세. 산하사직도는 사실 밖으로 흘러나간 적이 없으니 말일세.”

    지장왕 보살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심협의 두 눈이 밝아졌다.

    지장왕 보살이 손목을 돌리자 손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크기가 모두 다른 네 개의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그중 두 개는 축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둘둘 말려 있었다.

    “그때, 투전승불 등이 환생한 이후로 산하사직도를 내게 두고 갔다네. 이것이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렇게 자네가 나타났으니 내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군.”

    지장왕 보살이 손을 휘두르자 두루마리들이 심협에게로 날아갔다.

    심협은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산하사직도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산하사직도를 지키기 위해서 당승의 사제가 무엇을 바쳤는지 모르겠지. 부디 자네가 이것을 복원하여 삼계를 구해주길 바라네. 이것이 마지막 기회야.”

    지장왕 보살의 당부에 심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배, 반드시 보살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데 어떻게 복원해야 합니까? 이렇게 찢어진 상태로는 사용하지 못하는 겁니까?”

    “산하사직도도 하늘을 감지하는 영물이니 그것을 복원하려면 천책의 힘을 빌려야 할 게야.”

    지장왕 보살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고, 몸도 점점 흐릿해져갔다.

    “보살님!”

    무언가 알아챈 심협이 서둘러 손가락을 내밀어 신혼의 힘을 나누려 했으나, 지장왕 보살은 해탈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내 힘은 이미 소진되었으니 헛수고하지 않아도 되네.”

    “보살님, 아직 잔혼이 있으니 이름을 천책에 남기면 다시 살아남을 기회가…….”

    심협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천책을 꺼냈다.

    “천책이 감당할 수 있는 이름은 태을 이하라네. 지존 위로는…… 쓸 수가 없지. 너무 괴로워 말게. 내 사명은 이미 다했어. 이제 자네들에게 부탁하겠네.”

    지장왕 보살의 미소는 실로 부처의 그것과도 같았다.

    “보살님…….”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심협은 상대에게서 진정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느낄 수 있었기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허곤은 선도 악도 아니고 그저 식욕 본능만 남았지. 내 지옥미궁에 가둔 것도 본래 생명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였을 뿐. 이제 지옥이 진짜 지옥이 되었으니 상관없겠지. 자유롭게 놔주마.”

    지장왕 보살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지자 금색 부적이 허공에서 나타나 불꽃으로 타오르더니 점점 사라져갔다.

    심협은 어렴풋이 괴수의 울음을 들은 것 같았다. 공간이 강렬하게 흔들리더니 이어서 주위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고, 어둠은 점차 투명해져갔다.

    심협은 그제야 자신이 이미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서 현재 검은 대나무 숲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적막이 흘렀다.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지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두 발이 땅에 닿았고, 심협은 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으로 바로 앞의 반투명해진 허공의 허상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지장왕 보살이 앉아 있었다. 피부는 이미 더없이 까매졌고 온몸에서 썩은 기운이 감돌았다.

    “자네에게 더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아쉽군. 마지막 선물이 자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네.”

    그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손가락을 심협의 미간에 살포시 올렸다. 심협이 반응하기도 전에 미간이 차가워지더니 식해에서 마치 야명주가 걸린 것처럼 금빛이 떠올랐다.

    그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지장왕 보살의 육체는 빠르게 부식되더니 이내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심협은 멍하니 앉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왼손에는 천책이, 오른손에는 산하사직도 파편이 들려 있었다.

    순간, 막중한 부담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동시에 섭채주 등의 옆에 배신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또 걱정이 치솟았다.

    “보살님께서 의심되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셨다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책과 산하사직도를 챙기고 다시 지옥미궁 지도를 꺼냈다. 그러다가 문득 청노를 소매에 넣어둔 것이 생각나 서둘러 그를 꺼내줬다.

    홀연히 나타난 청노는 어리둥절할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유혼이 견고하지 못하여 곧 부서질 듯한 상태였고, 심협의 소매로 들어간 후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한데 다시 나와 보니 신혼은 다시 견고해져 있었고,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해지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상선님.”

    그는 정신을 차리고는 심협의 도움에 황급히 절을 했다.

    심협은 다소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장왕 보살이 신혼의 힘을 그에게 나누어줬을 때 청노도 약간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었다.

    “일어나서 지도를 좀 보거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지?”

    청노는 바로 일어나서 지도를 들여다봤다.

    “산이 둘러싸고 있고, 주변에 독기는 없지만 음살(陰煞)의 바람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으로 보아 여기는 아마 음살곡(陰煞谷)인 것 같습니다. 앞의 저 시커먼 대나무 숲을 나가면 음귀(陰鬼) 골짜기일 겁니다. 음귀 골짜기를 지나면 음살곡…… 지, 지금 저희가 욕망의 늪을 빠져나온 겁니까?”

    설명을 이어가던 청노는 불현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심협이 자신을 거둔지 벌써 보름이 지났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대체 어떻게 욕망의 늪을 나올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의심은 의심으로 돌리기로 하고,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심협은 지도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청노의 말이 옳은 듯했다.

    두 사람은 다시 여정에 올랐고, 검은 대나무 숲을 가로질렀다.

    검은 대나무 숲은 생각보다 커서 반 시진을 걸어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심협이 도중에 화안금정으로 몇 번을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환술에 빠져 같은 곳을 계속 빙빙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때, 대나무 숲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변에서 짙고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빠르게 몰려왔다.

    심협은 신식으로 하얀 안개를 살피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방의 새하얀 안개 속에서는 엄청난 영혼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안에서는 수백 명이 조용히 모여들고 있었다.

    “귀물입니다!”

    이때 청노가 긴장한 듯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래된 청동 갑옷을 입은 수백 명의 음병(陰兵)이 짙은 안개 속에서 기세등등하게 달려왔다.

    심협이 막 반격에 나서려는 순간, 귀물들은 두 사람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일까요?”

    “누군가에게 쫓기는 모양이군.”

    말을 마친 그는 기운을 거두고는 빠르게 내달렸다.

    백 보쯤 이동했을 때, 저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시 백여 보를 가보니 검은 대나무 숲 언저리의 땅에 수백 장 깊이의 거대한 골짜기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짙은 죽음의 기운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곳이 바로 음귀 골짜기였다. 우뚝 솟은 두 개의 큰 산봉우리에는 서로 겹치는 하나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그곳이 음살곡의 출구이자 지옥미궁의 반대쪽 끝이었다.

    심협이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깊은 골짜기에서 갑자기 불꽃이 밝아지더니 백 장 크기의 용 모양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고,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는 것만 같았다.

    하늘까지 치솟은 불꽃에서 고풍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용골갑(龍骨甲)이 나타났고, 그 안에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사람이 보였다. 이 연기 인간은 역시 연기로 된 손으로 현철(玄鐵) 창을 쥐더니 심연 아래를 향해 찔렀다.

    창끝의 살기가 산과 바다를 뒤집을 기세로 심연을 향해 곧장 뻗어갔다.

    심협은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의 이 귀물은 평범한 귀왕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진선 후기였다. 청노 같은 귀왕은 일합도 버티지 못할 강자였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심연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하하, 유명귀왕(幽冥鬼王), 겨우 이 정도인가?”

    심협이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바람 소리가 들려오더니 심연 깊은 곳에서 거대하기 그지없는 나선형 회오리가 떠올랐고, 살기는 순식간에 이 회오리에 흡수되어 사라져갔다.

    이어서 붉은 옷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자는 한 손을 높이 들고 있었는데, 엄지손가락의 어렴풋이 보이는 기혈(氣穴)에서 회오리가 뿜어져 나왔다.

    휘몰아치는 광풍은 하늘 가득했던 살기를 모조리 흡수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붉은 옷의 남자는 바짝 뒤쫓아 남은 손으로 혈홍의 보검을 내리쳤다.

    심협은 그가 입은 붉은 관복의 무늬와 검은 모자에서 흔들리는 봉황의 날개를 보고는 바로 상대를 알아봤다. 바로 착귀천사(捉鬼天師) 종규였다.

    지금 종규의 기운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강력해져 태을 경지였다.

    검과 창이 충돌하자 심연의 상공에서 수많은 불꽃이 튀었다.

    콰아앙!

    음귀 골짜기 위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모습은 점점 더 흐릿해졌고, 서로 쫓고 쫓기면서 점점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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