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07화 (607/1,214)
  • 607화. 지장왕(地藏王)

    심협의 신혼은 바짝 긴장했다. 신식의 힘을 전력으로 발동하자 몸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갔다. 물결 같은 충격의 파도가 일렁이면서 쉬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데 그 순간, 참기 힘든 고통이 심협의 신혼에 침투했다. 그가 발산한 신식의 힘은 혈기와 충돌할 때마다 야수에게 찢기는 것처럼 빠르게 소모되고 침식되었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피비린내였다. 이 피비린내에 물들자 심협의 식해에 그와 상관없는 기억의 단편들이 점점 몰려왔다.

    그 순간, 부서진 성과 수만의 요괴들이 성을 넘어 수사와 병사들을 물어뜯는 장면이 보였다. 그곳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또 집을 유랑민에게 빼앗기면서 집안의 남녀노소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쪽은 길거리마다 시체와 머리로 가득했고 땅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저쪽은 성 밖에 사람들의 머리가 성루와 높이가 같을 정도로 산처럼 쌓여 있었고, 새까만 까마귀들이 하늘을 뒤덮었으며 굶주린 개들이 먹이를 다투었다.

    “죽여!”

    “죽여!”

    하늘에 가득 울려 퍼지던 외침은 점점 일그러지면서 절망의 외침으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기이한 웃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배고프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심협의 신식은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눈앞은 핏빛으로 뒤덮였다. 혼란에 빠진 사이, 마르고 작은 소녀가 무뚝뚝한 표정의 초췌한 남자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가고 있었다.

    말라서 갈라진 소녀의 입에서는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중년 남자는 시종일관 무표정했고, 검은 피가 묻어서 서늘한 빛이 감도는 칼을 천천히 뽑았다.

    그의 옆에 있는 새까만 솥에는 누런 국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남자의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고, 들고 있던 날카로운 칼이 소녀의 앙상한 가슴에 조금씩 들어가자 남아 있던 심협의 이성이 마침내 끊어졌다.

    사방에서 몰려오던 핏빛 파도가 갑자기 두 배로 증폭했고, 이에 대항하고 있던 금빛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심협의 신식의 힘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의 식해가 전부 붉게 물들자 신혼 소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 몸 절반은 이미 핏빛으로 물들었고, 더 강력한 혈기가 머리로 끊임없이 밀려왔다.

    다만 그는 여전히 한 팔을 내밀어 어떻게든 막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선(善)을 위함이라.”

    심협의 신식이 무너지려는 순간, 앞에서 갑자기 작은 어스름한 등불이 켜지더니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등불은 콩처럼 작았지만 혈기로 가득한 그곳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빛났고, 침식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가올 때마다 힘을 발산하여 주변의 혈기를 막아냈다.

    작은 등불이 계속 다가오자 주변의 혈기가 일제히 물러났고 심협의 몸을 물들였던 핏빛도 허리까지 물러났다.

    신식이 다시 회복되자 그제야 심협은 자신에게 다가온 것이 등불이 아니라 하얀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령에 키가 크지 않고 볼도 수척했다. 누에가 누워 있는 듯한 하얀 눈썹 아래로 맑은 눈과 높지 않은 코, 두껍지 않은 입술이 자상해 보였다.

    붉은 가사(袈裟)를 입은 그는 승려 차림이었다.

    “시주는 뉘시오? 어찌 지옥미궁에 온 건가?”

    노승(老僧)은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심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승이 자신의 식해에 나타난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어쩌면 허곤의 신혼이 변하여 자신을 해치러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한 시주로군. 신혼의 기운에서 황정경의 기초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방촌산 출신인가?”

    심협은 그 말에 눈을 돌려 노승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념이 노승에게 닿는 순간, 그의 식해에 현묘한 범음과 불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부드러운 힘이 신혼 소인을 뒤덮자 혈기가 일제히 사라졌다.

    “시주에게 혜근(慧根)이 있을 줄이야. 불문과 인연이 있었군.”

    노승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감히 법호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심협은 이제 의심을 풀고 예를 갖춰 황급히 물었다.

    “지장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보아하니, 항하사겁(恒河沙劫)을 설파해도 다하기 어려워, 한 생각 동안만 보고 듣고 우러러 절해도 인간, 천상의 이익됨은 그 생각이 한량없네.”

    노승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심협의 식해 속에서 불경이 울려 퍼졌다.

    “지장왕(地藏王) 보살이셨군요! 후배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심협의 소인(小人)이 식해 안에서 공손하게 합장했다.

    “괜찮네, 괜찮아. 시주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군. 방촌산의 제자인가?”

    노승은 부인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후배는 심협이라 합니다. 정식으로 방촌산 문하에 들지는 않았지만, 신통을 보제 조사께 배웠습니다.”

    “시주는 어찌하여 이곳에 온 건가?”

    지장왕 보살의 계속된 물음에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오장관의 일과 자신이 여기서 겪은 일에 대해 말했다.

    노승은 아무 말도 없이 끝까지 듣더니 천천히 말했다.

    “정말 천도의 조화란 말인가? 온 세상이 이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말인가?”

    “보살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든 것은 인과(因果)와 사람의 조화로다. 본좌가 지옥으로 들어온 것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 중생의 화를 없애고 삼계(三界)의 원한을 없애 봉인이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거늘, 결국은 이 환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로다.”

    지장왕 보살은 천천히 말하고는 심협을 바라봤는데, 두 눈에 갑자기 이채(異彩)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심협은 눈앞이 흐려지더니 눈이 자기도 모르게 지장왕 보살의 두 눈으로 향했다. 눈을 마주친 순간, 마치 성진대해(星辰大海)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떨떨한 사이 눈앞의 성진은 다시 사라졌다.

    지장왕 보살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나더니 몸에서 하얀 빛이 번득였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보살님…….”

    심협은 어렴풋이 그가 자기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괜찮네, 괜찮아. 자네가 여기까지 온 것도 아마 정해진 운명이겠지. 허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바람 앞의 등불이라, 과거를 볼 수 있고 환상도 볼 수 있지만 머나먼 미래는 볼 수가 없네. 자네의 시간은…… 어지럽군. 인과로다. 말하지 않아도 되네. 어쩌면 자네가 그 최대의 변수일 수도 있으니…….”

    지장왕 보살의 표정은 기쁨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심협은 그의 말을 들을수록 미궁에 빠졌다.

    “보살님, 방금 하신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말할 수 없네. 때가 되면 자네도 알게 될 테지. 때가 되지 않으면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니 많은 변수가 생길 걸세. 그래, 그래. 본좌가 오늘은 그것을 깨고 도박을 한번 해봐야겠어.”

    지장왕 보살은 고개를 젓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이 다시 묻기도 전에 읊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더니 노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하얀 빛이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읊조리는 소리 역시 점점 커졌다.

    다만 심협이 보기에는 이 빛은 마치 불빛이 다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하는 기운 같았다.

    하얀 빛이 점점 밝아지면서 노승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져갔고, 심협의 심해에 가득하던 혈기도 이 하얀 빛에 완전히 잠겨 전부 사라졌다.

    심협의 신혼 소인은 하얀 빛에 완전히 잠기자 온몸이 따뜻해지면서 잃어버린 신혼의 힘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신혼의 몸에 허광이 뭉쳐지더니 점점 금색과 홍색의 가사로 변했다.

    “이건……?”

    심협이 어찌 모르겠는가! 지장왕 보살은 자신의 신혼의 힘을 그에게 전수해준 것이었다.

    식해가 견고해지면서 심협의 두 눈도 다시 떠졌다.

    심협은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어둡고 조용했다. 방금 빨려 들어갔던 검은 소용돌이는 보이지 않았고, 마치 허무한 지경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오게.”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심협은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봤다. 멀지 않은 곳의 캄캄한 공간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가자 옷이 너덜너덜해지고 온몸에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보살님…….”

    “자네의 무기는 정말 훌륭하군. 투전승불의 여의금고봉과 막상막하야.”

    노인이 말했다.

    심협이 가까이 다가가보니 노인은 진해빈철곤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지장왕 보살이었다.

    다만 식해에서 만났던, 하얀 빛에 싸여 있던 자비로운 노인과는 달리 눈앞의 노인은 온몸이 부서지고 그 빛은 마치 반딧불처럼 희미했다.

    “보살님, 이게……?”

    심협은 죽어가는 지장왕 보살을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 선불의 몸은 이미 오래전에 썩어서 허곤 속에 숨어 요마들의 추격을 피하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네.”

    지장왕 보살이 진해빈철곤을 심협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보살님, 아직 살아 계셨으면서 어찌하여 진원 대선들에게 연락하시지 않은 겁니까? 혼자 이곳에서 허곤에게 삼켜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겠습니까?”

    심협이 몸을 웅크려 곤봉을 받으며 물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라네. 그 배신자가 여전히 인, 선 두 종족의 저항군 속에 숨어 있으니. 내가 섣불리 돌아간다면 필시 그들에게 멸망의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고, 치우를 봉인하고 천도를 바로 세우려는 희망도 깨질 것이네.”

    지장왕 보살은 고개를 젓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신자요?”

    “그래. 그때 지부는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았네. 십전 연군의 절반이 그자에게 해를 입거나 책략에 당해 마족과 싸우기도 전에 원기를 크게 상했지. 나중에 또 그의 인도로 지부에 설치된 방어선이 쉽게 돌파당하면서 지부 전체가 당했고, 저항할 힘도 잃고 말았어.”

    지장왕 보살은 이렇게 하소연을 했으나, 눈에는 어떤 원한도 없었다. 오직 연민만 남아 있었다.

    심협은 오장관의 참상이 생각났다.

    진원 대선이 지키고 우마왕 일행이 가세한 오장관이 그렇게 쉽게 당한 것도 아마 그 배신자의 소행일 것이다.

    “보살님, 그 배신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부끄럽게도 그자의 정체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 확신이 없다네. 그때, 그가 직접 나를 습격했을 때 사용한 것도 마족의 신통이었지. 본래 그가 마족 사람인 줄 알았더니 후에 체청이 알아내기를, 그자의 토대는 선족이라더군. 허나 애석하게도 정체를 정확히 알아내기 전에 체청이 먼저 전사했네.”

    지장왕 보살은 깊게 탄식했다.

    “보살님, 추측이라고는 해도 모두에게 알렸다면 모두가 대비했을 겁니다.”

    심협은 그자가 아직도 우마왕 등과 같이 있을 수도 있고 섭채주와도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혼란스러웠다.

    “출가한 사람이 어찌 증거도 없는 일을 함부로 말하겠나? 게다가 인(人), 선(仙)의 연맹은 단단하지 않으니 만약 첩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가는…….”

    지장왕 보살이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아도 심협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선족에 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할 테고, 서로를 경계하다가 결국은 연합이 깨지고 마족에게 몰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 배신자가 원하는 것이리라.

    “보살님, 지금은 상황이 심각합니다. 마지막 고비에 몰렸지요. 진원 대선 등이 당하면 삼계의 희망은 사라집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아신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요. 최대한 빨리 그들과 합류하셔야 합니다.”

    “자네에게도 천책 일부가 있겠지. 그렇지 않나?”

    지장왕 보살은 대답 대신 불쑥 물었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금색 천책이 나타났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자네가 바로 그 변수였어.”

    지장왕 보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에 만족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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