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02화 (602/1,214)
  • 602화. 황천도(黃泉渡)

    심협은 몇 걸음 만에 나무 아래로 가서 흙을 팠다. 그곳에는 구슬 비녀와 옷이 있었다.

    구슬 비녀를 꽉 쥐고 한참을 기다리던 그는 다시 땅을 팠다.

    옷과 함께 섭채주의 시체가 있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신념으로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협은 굳은 팔로 천천히 잡아당겼다. 푸른색 옷이 뽑혀 나왔다.

    시체는 없었다.

    심협은 속으로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들여다보니 피로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아니면 찾지 말고 혼자서 도망쳐요. 만약 당신이라면…….”

    그 다음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어찌 해야 할지 몰랐으리라.

    심협은 이 글이 자신에게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단지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면 널 찾지 말라니……. 나라면 당연히 어떻게든 널 찾지!’

    심협은 묵묵히 옷을 거두고는 구슬 비녀를 바라보다가 품에 넣었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검은 마기를 뿜어내는 놈들 한 무리가 어느새 살금살금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후후, 역시 그물에서 빠져나간 물고기가 있었군. 오랫동안 기다린 게 헛수고는 아니었어. 경지가 높지 않은 것이 좀 아쉽군.”

    가장 앞에 선, 추악하게 생긴 마족 사내가 대도를 어깨에 걸친 채 냉소했다.

    진선 중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심협이 억지로 억누르면서 새어 나온 기운은 출규기 정도로 보일 터였다.

    뒤를 따라온 마족들은 대부분 출규와 대승기였다. 한눈에 봐도 전쟁이 끝나고 전장을 정리하러 온 굶주린 승냥이 같은 놈들이었다.

    심협은 천천히 일어나서 적막한 눈으로 그들을 훑었다.

    마족 우두머리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다시금 큰소리를 쳤다.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수십 마리의 마족이 일제히 심협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창해!”

    심협은 조용히 혼잣말을 말하고는 발끝으로 땅을 찍었다. 그러자 물기가 섞인 극한의 기운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그를 향해 돌진하던 마족들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얼음 조각상이 되었다.

    심협은 천천히 우두머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가장 앞에 있는 마족의 얼음 조각상을 가볍게 툭 두드렸다.

    그 순간, 꽝꽝 얼어붙었던 모든 마족들은 예외 없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심협의 소매가 스쳐 지나가자 가루로 변해버렸다.

    혼자 남은 마족 우두머리는 두 다리만 얼어붙은 채 살아 있었다.

    “너, 너는…… 태을 진선……?”

    대전 이후로도 살아남은 태을 진선이 있다는 것도, 감히 홀로 이곳에 올 거라는 것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심협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앞으로 다가가 한 손가락으로 미간을 쿡 찔렀다.

    다음 순간, 심협의 신념의 힘이 거침없이 마족 우두머리의 식해로 흘러 들어갔고, 거리낌 없이 그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펑!

    마족 우두머리의 식해는 태을 진선의 신념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모두 지부(地府)로 도망갔나?”

    심협은 손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오장관은 인간들 최후의 보루인 셈이었다. 이곳이 뚫렸으니 양지의 어느 곳에도 그들이 의탁할 곳은 없었다. 명부로 도망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는 일전에 꿈속 세상에서 명부로 갔다가 그곳에서 구혼마면을 만났고, 그와 함께 흑산노요에게 쫓긴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부는 이미 함락됐다는 건데…… 설마, 다시 빼앗은 건가?”

    하지만 지부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지부는 말하자면 종문과 같고, 지장왕 보살이 다스리고 있다. 각종 귀도 수사와 귀선이 있는 곳으로, 종규와 십전 염군 같은 부류도 모두 귀선에 속한다.

    당시에는 꿈속에서 바로 들어갔지만, 지금은 지부로 가려고 하니 어디에서 들어갈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면에게서 들었던 지부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대화는 그리 깊지 않았고, 심협도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마면을 지부에서 어떻게 소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심협은 기억을 더듬던 중 서역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강류대사는 일전에 지장보살이 ‘지옥이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고는 지부로 들어가 지옥의 모든 귀신을 도화(度化)시켰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말하길, 지옥에는 사대부주 곳곳에서 오는 망혼들을 맞이하는 나루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각 주성(州城) 안에 있는 것들은 서낭당(城隍堂)이라 불린다고 했다. 반면 깊은 산간벽지에 있는 것은 귀산문(鬼山門)이라고 부르는데, 초두산신(艸頭山神)들이 관리한다. 강이나 하천 같은 물에 있는 것들은 수부(水符), 수신이 다스리는 황천도(黃泉渡)라 부른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는 산과 들판에서 죽는 자가 적고 강에 빠져 죽는 사람이 더 많아서 귀산문은 찾기 어렵고 황천도는 찾기 쉽다.

    심협은 오장관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어주고는 그곳을 떠났다.

    지금은 산과 강이 무너지고 주부성(主符城)도 대부분이 부서지고 사라져서 폐허가 되었다. 안에는 천정과 지부의 신묘도 이미 요마에게 점령당했다.

    심협은 서낭당을 찾지 않고 곧장 오장관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의 황천도를 찾아갔다.

    황천도라고는 하지만 사실 진짜 나루터가 아니라 강에 둘러싸인 만(灣)이었다.

    멀리 강가에 서 있는 빼곡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수천만 명은 될 법했다.

    가까이 가기도 전에 심협은 강가 연안에 검은 안개가 끼고 원망의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았다.

    강가에 모여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도 받지 못하는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지경에 처한 한 무리의 귀혼이었다.

    지부가 공격을 당하면서 윤회는 이미 질서를 잃었고, 귀혼을 맞이하러 오는 저승사자가 사라지자 죽은 망혼들은 신식이 온전하지 못한 채 그저 황천도에서 흘러나오는 음기의 이끌려서 이곳에 모여든 것이었다.

    심협이 내려오자 그의 생기에 이끌려 수많은 귀물이 갑자기 흉악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원기가 치솟더니 귀신들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심협의 몸이 돌연 빛나더니 들어 올린 옷소매에서 보이지 않은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강가에 있던 수만의 귀물이 전부 사라졌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는 손이 가는 대로 휘둘렀다.

    이어서 핏빛이 반짝이더니 커다란 귀신의 깃발이 나타났다. 수많은 핏빛이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휘몰아쳤고, 순식간에 강가의 모든 귀물이 깃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깃발에서는 귀신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을 흔들었다.

    심협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휘둘러 깃발을 봉인하고는 거두었다.

    귀불을 연화하지 않고 거두기만 한 것은 이들을 지옥으로 데려다주기 위함이었다. 이들을 이곳에 내버려두면 언젠가 원한이 맺히고 서로 잡아먹으면서 귀왕이 탄생할 것이다.

    인간 세상은 이미 혼란에 빠졌으나,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정리해야 했다.

    강가의 귀물들이 순식간에 정리되자 이곳에 쌓여 있던 원한도 강바람에 휘날려 가듯 전부 사라졌다.

    심협은 만(灣)으로 다가 갔고, 주변을 둘러봐도 나루터는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강 아래로 향하니 만의 급류 위로 눈에 띄지 않는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그 안의 강물은 혼탁하여 저승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인 듯하군.”

    문득 강가 밑바닥을 봤는데 무언가 있었다. 심협이 손을 흔들자 강 밑바닥에서 갑자기 푸른 불꽃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도선?”

    떠오른 것은 양쪽이 뾰족하게 위로 솟아오른 오래된 낡은 나무배였다.

    나무배에는 금이 쩍쩍 가 있었고, 곳곳이 수리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뱃머리에는 기다란 막대기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끝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등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심협이 배 위에 오르자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밑으로 조금 가라앉았다.

    “나름 튼튼한 모양이군.”

    심협이 기다란 막대를 잡고 등잔을 내리자 안에는 노랗고 끈적끈적한 기름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사람의 몸에서 뽑아낸 기름이었다.

    심협은 눈살을 찌푸리며 등잔을 뾰족한 뱃머리에 걸고는 막대기를 물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 급류의 소용돌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배는 금방 부서질 것 같은 생김새와 달리 급류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천천히 나아갔다.

    먼저 뱃머리가 가라앉더니 이어서 배 전체가 흔들리다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러나 심협은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배가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심협의 몸에는 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마치 어떤 결계를 뚫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물에 빠진 인도선이 공중으로 다시 솟아오르더니 물 위로 떨어졌다.

    심협은 고개를 숙이고 아래의 강을 바라봤다. 강에는 푸른 불빛만 반짝였다. 이미 명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시선을 거두고 신식을 펼쳐서 주변을 살폈고, 막대기를 잡고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나아갔다.

    그러던 중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뒤를 돌아봤다.

    뒤쪽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고, 실체가 없는 그림자가 밑에서부터 떠올랐다.

    “물귀신?”

    잠시 살펴보니 몇 마리의 출규기 물귀신이었다. 심협은 개의치 않고 속도를 높였다.

    지형이 갑자기 바뀌었는지 물살이 점점 빨라졌고, 뒤에 있던 물귀신도 갑자기 속도를 높여 금방 근처까지 헤엄쳐왔다.

    가까이 다가온 물귀신들은 심협의 기운이 약하지 않음을 감지했는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그저 한참을 지켜보다가 서둘러 앞으로 떠내려갔다.

    심협이 손을 들어 크게 휘두르자 금빛 초승달 모양의 예리한 칼날이 물속으로 떨어졌다.

    퍼펑!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강물에서 백 장 높이의 파도가 일어났고, 흐르는 물도 잠시 끊기면서 바닥에 가득한 해골들이 나타났다. 몇 마리의 물귀신들은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심협이 손을 들자 배 아래에서 강물로 만들어진 작은 손이 튀어나오더니 그에게 암홍색의 혈부(血符)를 건넸다.

    “혈폭부(血爆符)…… 진선 초기를 상대하기에는 적당하지.”

    그는 냉소했다. 진선기의 귀왕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지만, 정확한 경지를 알 수 없으니 몇 마리 물귀신을 보내 탐색전을 펼친 것이었다.

    심협은 몸을 돌려서 뒤를 바라봤지만, 이상한 기운은 없었다.

    “은신술이 제법이구나. 허나 탐색은 그만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아량을 베풀 때 가거라. 그러지 않으면…….”

    심협은 말을 끊었지만, 뒤로 길게 이어진 천 리 정도의 명계 강물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수백 리 떨어진 강물에서 푸른 옷을 입고 얼굴이 눈처럼 새하얀 남자가 커다란 요괴의 뼈로 만든 저승의 배를 타고 강을 따라오다가 앞의 강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자 기겁하며 뛰어올랐다. 그사이 강에 있던 배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실체가 없는 이 남자는 심협이 있는 곳을 한참을 바라봤는데, 새하얀 얼굴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풀렸는지 개운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얼음 깊숙이 넣었다. 푸른 저승의 불꽃이 타오르더니 이내 얼어붙은 저승의 배가 녹으며 얼음 위로 올라왔다.

    그는 다시 저승의 배를 타고 그대로 쫓아왔다.

    심협이 강물을 따라서 가는 동안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고, 물속에서는 더 많은 물귀신이 둥둥 떠다니면서 나뭇가지처럼 흘러내려 갔다.

    딱히 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심협도 귀신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최대한 빨리 지부로 가고 싶었기에 다른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데 그때, 물살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배가 통제력을 잃은 것처럼 쏜살같이 나아갔고, 순식간에 암초와 충돌했다.

    쾅!

    굉음과 함께 이 낡고 작은 배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심협은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는데, 눈가에는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방금 일어난 일은 물살이 갑자기 빨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배를 끌어 속도가 높아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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