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88화 (588/1,214)
  • 588화. 비경

    “설마 그곳이……?”

    심협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갈피를 잡은 모양이군. 어찌 할 생각인가?”

    백소천은 심협이 또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물었다.

    “마을을 떠날 방법을 찾아야겠소.”

    심협이 심각하게 말했다.

    “떠난다고?”

    그 말에 백소천의 안색이 변했다. 임심모와의 관계에 겨우 진전이 생겼다 여기자마자 떠나자 하니 꺼려진 모양이다.

    “백형…… 임심모는 절대로 마음을 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제발 내가 아는 백형으로 돌아오시오.”

    심협은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

    “음, 알겠네.”

    백소천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알아들은 것처럼 대답했다.

    “떠나자고 말은 했어도 쉽지 않을 것이오. 율율을 납치했다는 오해도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손 파파가 쉽게 놔줄 리가 없소.”

    “그럼 시간을 좀 더 두고 의논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백소천은 냉큼 그렇게 말했는데, 입가가 웃을 듯 말 듯 실룩거리는 것을 보며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심협은 본래 며칠 더 머물 생각이었으나, 그날 아침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방에서 한창 수련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비서에게 멱살을 잡힌 채 마을 동쪽의 의사당으로 끌려갔다.

    가는 길에 보니 하늘은 새까만 솥뚜껑을 덮은 것처럼 어두웠고, 공기가 진득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협은 유비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그를 끌고 갔다.

    의사청에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손 파파는 의사청 나무 탁자 상석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두건을 두른 두 사람이 앉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공손하게 옆에 서 있었다.

    심협은 안쪽을 둘러보다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를 발견했다. 옷이 너덜너덜했고, 머리가 헝클어졌으며, 안색은 창백했다. 소녀는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몸을 덜덜 떨었다.

    “손 파파, 이게 도대체……?”

    “율율, 고개를 들어라. 널 납치한 게 저자가 맞느냐?”

    손 파파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소녀에게 말했다.

    ‘율율? 실종됐다던 그 소녀? 어떻게 돌아왔지?’

    심협은 매우 당황했다.

    한데 소녀는 고개를 들어 심협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더니 다급하게 손 파파의 옆으로 기어갔다.

    그 순간, 의사청의 모든 사람이 분노한 눈으로 심협을 노려봤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유비서도 눈살을 찌푸렸지만, 눈빛은 복잡해 보였다.

    억울함에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심협은 소녀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그 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녀의 눈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 파파 뒤에 숨은 채로 천천히 심협 곁으로 다가와 코를 찡그리며 냄새를 맡았다.

    심협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율율의 겁에 질린 표정이 점점 평온해졌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파, 아니에요. 절 납치한 건 이 사람이 아니에요.”

    “증거는?”

    손 파파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날, 납치당할 때 불휴초(不休草)를 땅에 뿌려서 모두에게 흔적을 남기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불휴초는 찾을 수 없었어.”

    유비서가 말했다.

    “그자가 씨앗을 발견했으니까요. 하지만 그에게 불휴초 향이 남았을 거예요. 다들 알겠지만, 그 냄새는 쉽게 알아챌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라지려면 1년이 걸리죠. 그런데 이 사람에게서는……그 냄새가 나지 않아요.”

    유비서의 눈에 안도하는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상황을 좀 설명해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심협이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아이는 며칠 전 실종됐다던 내 제자 율율이네. 오늘 새벽에 마을 밖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걸 발견했지. 그날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갇혀 있다가 오늘 방심한 틈을 타서 도망쳤다고 하더군.”

    손 파파가 설명했다.

    심협은 듣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게 간단했다?”

    “왜? 문제가 있나?”

    손 파파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흠, 아닙니다. 돌아왔으니 다행이죠. 단지 돌아온 게 원래의 그녀인지 조사해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심협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답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손 파파 옆에 있던 사람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심협은 그녀를 흘끗 보고는 답할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율율 소저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제 누명도 풀린 겁니까?”

    “율율이 자네가 아니라고 했으니 자네 혐의는 모두 사라졌네.”

    “그럼 이제 마을을 떠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자네들이 안 나가면 나가 달라고 할 생각이었네.”

    심협은 그 말을 듣자 어제 여아촌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던 백소천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그는 곧장 이곳을 벗어나 눈물 요괴를 잡았을 때 발견했던 그 비경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심협은 가볍게 포권을 했다.

    “그간 자네들을 가둬었으니 결례를 범했네. 구범청련은 줄 수 없지만, 우리 여아촌의 자랑인 백해단(百骸丹)을 사과의 뜻으로 줄까 하는데, 어떤가?”

    “백해단?”

    손 파파의 입에서 처음 나온 이름의 단약에 심협이 되물었다.

    대답은 유비서가 전음으로 대신했다.

    “백해단은 우리 여아촌의 해독성단(解毒聖丹)이야. 우리 여아촌에서 가장 강력한 독도 몇 종류나 해독할 수 있을 정도지.”

    심협은 포권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오해가 풀렸으니 우리도 더는 심 도우를 붙잡지 않겠네.”

    축객령을 들은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천이 돌아오면 함께 떠나겠습니다.”

    * * *

    의사청에서 나오자 하늘의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고, 그 사이로 은연중에 햇살이 비쳤다.

    쿵!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자 천지가 흔들렸다. 그러나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고, 여아촌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어렵게 찾아낸 백소천에게 떠나야 한다는 말을 전했으나, 그는 내키지 않아 했다.

    “여아촌을 떠나는 것뿐이고, 채운도를 떠나는 것은 아니오.”

    심협이 그렇게 말하고서야 백소천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전, 유비서만이 홀로 나와 심협에게 재차 고마움을 전하며 배웅했다.

    두 사람은 마을을 나오자마자 바로 샛길을 따라 채운도 끝으로 가서 비주에 올라타 떠났다.

    “심형, 날 속인 거야? 섬은 안 떠난다면서.”

    백소천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아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쩌겠소? 그래도 실망하지 마시오.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그럼 이제 어디로……?”

    백소천이 궁금한 듯 물었다.

    “우선 부적을 제련할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새하얀 번개가 반짝이더니 이어서 천둥이 울려 퍼졌다.

    휘이잉!

    돌풍이 불고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져 바다에 뿌려졌다.

    비주는 바다 중앙의 민둥민둥한 무인도로 내려갔다.

    * * *

    이틀 뒤, 심협과 백소천은 채운도를 떠나서 곧장 눈물 요괴의 동부로 향했다.

    “심형, 여기는 왜 다시 온 건가?”

    백소천이 뭔가 이상했는지 물어봤다.

    “백형, 그때 여기서 본 하얀 빛의 광막 기억하시오?”

    “당연히 기억하지. 한데 그건 왜 묻는 건가?”

    심협은 구범청련에 대한 추측을 백소천에게 설명했다.

    “그래서 비경 이야기를 한 게로군. 그렇다면…… 심형 생각에는 눈물 요괴의 동부 안에 있던 광막 뒤에 구범비경(九梵秘境)이 있을 거라는 건가?”

    백소천도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바로 심협의 뜻을 이해했다.

    “눈물 요괴 동부와 채운도가 이리 가까운 데다 해저에 아무런 연유도 없이 그런 금제가 있을 리는 없으니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소?”

    “잘됐군. 그럼 어서 속도를 내세.”

    백소천이 웃으며 재촉했고, 두 사람은 속도를 높여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데 백소천이 막 아래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누가 있소!”

    심협이 갑자기 백소천을 붙들고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뒤이어 한 줄기 하얀 빛이 멀리서 날아왔는데, 그 안에서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착각인가?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자는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휘휘 젓고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왜 숨는 겐가? 누가 있으면 뭐 어떻다고……?”

    “그자의 복장을 못 봤소?”

    심협의 말에 백소천은 방금 사라진 남자를 떠올렸다. 그가 있은 금색 옷에는 금빛의 태양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금양종의 표식! 그럼 그자가 금양종 사람?”

    “그렇소. 게다가 저 앞 해역에는 그만 있는 게 아니오. 내 신식에 세 명이 감지됐는데 모두 금양종 사람이오. 아무래도 금양종 소주의 죽음 때문인 것 같소.”

    심협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큰 걱정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백소천도 서둘러 신식을 펼쳤다. 그의 신식은 심협에 미치지 못했지만, 금방 심협이 말한 두 명의 다른 금양종 수사를 찾아냈다.

    “두 명은 응혼기 후기에 한 명은 출규 초기군. 금양종의 세력도 상당한 모양이지? 그나저나 저들이 눈물 요괴의 동부를 찾았나 모르겠군. 만약 찾았다면 몰래 잠입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백소천의 우려에 심협도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웃었다.

    “내게 생각이 있소.”

    그는 백소천을 천책 공간에 넣었고 자신의 신식도 따라서 들어갔다.

    * * *

    천책 공간 어딘가. 백 장 크기의 광막이 덮여 있었고, 그 안에는 눈물 요괴가 갇혀 있었다.

    “날 꺼내줘! 어서 꺼내라고!”

    눈물 요괴는 짜증 섞인 얼굴로 주변의 금빛 광막을 거세게 두들겼지만, 광막은 가볍게 흔들렸을 뿐,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부서질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때, 광막 밖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잠시 후 심협이 나타났다.

    그는 금빛 광막을 보며 만족한 표정이었다.

    옥침으로 소환한 천책은 허상에 불과하지만 천책 공간은 꿈속의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서 강력했다. 이곳에 들어가면 진선 강자라 해도 그가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천책 공간에 살아 있는 물체를 넣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전투 중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네 말대로 충분한 진주를 만들었는데 왜 날 아직도 가둬두는 것이냐? 어서 내보내줘!”

    심협을 본 눈물 요괴는 버럭버럭 소리쳤다.

    “그리 화내지 마시오. 진주가 부족할까 걱정했는데 충분하니 약속대로 이제 놔주겠소.”

    심협이 손을 흔들자 금빛 광막이 사라졌다.

    눈물 요괴는 여전히 화가 난 듯 심협을 노려봤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심협이 분신임을 간파했고, 금색 공간의 위력은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여기 은신부가 있소. 모습을 가려주는 효과가 있지.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거요.”

    심협이 손을 내밀자 하얀 빛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눈물 요괴 앞에 멈췄다. 이 빛은 하얀 부적으로 변했다.

    눈물 요괴는 은신부와 심협을 번갈아 보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은신부를 받았다.

    심협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눈물 요괴의 눈앞이 흐려지더니 금색 공간이 사라졌고, 넓은 바다에 다시 나타났다.

    심협은 가만히 옆에 서 있었다.

    요괴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았다. 자신의 동부 위였다.

    “그래도 신용은 있군. 거울 요괴를 풀어준다는 약속도 지켜야 한다!”

    눈물 요괴는 익숙한 바닷바람에 취해 있다가 심협에게 차갑게 말했다.

    “물론이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요괴는 그를 힐끔 보고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동부로 헤엄쳐갔다.

    심협은 눈물 요괴가 멀어지자 작은 소리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빠르게 작아지더니 몇 호흡 뒤에는 기다랗고 부채꼴 형태의 꼬리가 달린 물고기가 되어 풍덩 하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물고기에게는 법력 파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비늘과 지느러미 꼬리까지 살아 숨 쉬어서 평범한 물고기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변화 신통으로 물고기로 변신한 것이었다.

    지난번 꿈속에서 칠십이변을 깨달으면서 기운도 완전히 감출 수 있게 돼 진선기 수사라 해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이 변화술은 매우 현묘했다. 다만 변신한 동안에는 경지도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 결점이었다. 현재 그의 육신은 진짜 물고기로 변한 상태라 체내의 법력도 전혀 쓸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습격이라도 받았다가 제때 변신을 풀지 못하면 끝장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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