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86화 (586/1,214)
  • 586화. 단서

    “모용 장로! 그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다니, 규율에 어긋나지 않나?”

    박 장로가 벌떡 일어나며 언짢아했다.

    “어머, 박 언니. 우리 반사동과 여아촌은 줄곧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그런 상투적인 관습까지 신경 써야 하나요? 방금 여러분을 대신해 그쪽에 정확한 소식을 물어보고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교태가 넘치는 여인은 종종걸음으로 노파에게 다가가 팔을 살짝 당기며 투덜거렸다.

    “됐네. 모용 장로가 외부인도 아니니 같이 앉아서 의논하세.”

    손 파파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교태스러운 여자의 이름은 모용옥(慕容玉), 반사동의 대승기 장로였다. 이번에 연신단과 여아촌을 연결해준 것도 그녀였다.

    “여러분, 연신단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랍니다. 최근에 대당 관부와 맞서다 보니 오명을 쓴 것뿐이고요. 대당 관부와 한통속인 화생사 같은 문파도 같이 연신단을 헐뜯은 것이더라고요. 우리와 연신단은 오랫동안 원한이 없었고 최근에도 서로 사이가 좋으니 저들도 굳이 방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모용옥이 자리에 앉자마자 유세를 떨었다.

    “확실하게 물어본 건가? 저들은 우리 여아촌의 독경으로 무얼 하려는 거지?”

    손 파파가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물어봤죠. 종문 제자들의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려면 독련신(毒煉身)이라는 무공을 연마해야 한대요. 구체적인 건 기밀이라고 말을 안 해줬지만요. 손 파파, 독경 3권을 줄 수 있겠어요?”

    “13종의 독문 기독의 목록은?”

    손 파파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아, 깜빡할 뻔했네. 당연히 줬죠. 먼저 직접 보세요.”

    모용옥은 이마를 톡 치고는 서둘러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건넸다.

    손 파파는 모용옥에게서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펼쳐 천천히 보고는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가 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신단 쪽에서 그러던데요. 서둘러 대답할 필요는 없고, 성의를 표하기 위해 비법을 사용해서 여아촌의 대승 절정 수사들을 진선기로 돌파시켜주고 나서 계속 함께할지를 결정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 말에 손 파파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여아촌 대승기 장로들의 눈빛이 무의식적으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손 파파가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일제히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안 될 건 없지.”

    손 파파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이 술법을 시전하려면 영기가 짙은 곳이 좋겠다고 해요. 장소는 연신단에서 제공할 테니 대신 필요한 것들은 여아촌에서 부담하라더군요.”

    모용옥이 잠깐 쉬었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만약 정말로 그들의 도움을 받을 거면 매번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나? 영기 충만한 장소는 우리 여아촌에도 있으니 우리 쪽으로 사람을 보내라고 하게. 필요한 준비는 우리 여아촌에서 준비하겠네.”

    손 파파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할게요.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모용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편, 석실 안의 다른 사람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대다수가 진선 경지에 도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번 합작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심협과 백소천은 조금씩 마을에 익숙해져갔고, 손 파파의 말대로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으면 누구도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어딜 가든 여아촌 사람들의 주목을 받긴 했다.

    사실 이마저도 처음 이틀 정도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지, 이제 그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 서로 익숙해졌다.

    새벽.

    심협이 가부좌를 틀고 1층 대청에서 토납하며 기운을 조절하여 체내의 순양검배를 온양하고 있는데, 뒤편 계단에서 발소리에 이어 백소천이 내려왔다.

    “또 가는 거요?”

    심협이 눈을 뜨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여인을 쫓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꾸준함이 아닌가!”

    백소천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 매일 꽃을 꺾어다 갖다 주는 게 정말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거요?”

    심협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심형은 정말 여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세상 모든 여자는 아름다움을 좋아한다네. 이른 새벽의 이슬이 담긴 꽃이야말로 여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이지!”

    백소천이 일장연설을 했다.

    “그럼 그녀가 받아주었소?”

    “오늘은 받아줄 걸세.”

    심협이 웃으며 묻자 백소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도 그렇게 말했소.”

    심협은 매정했다.

    “음…… 됐소. 심형과 실랑이할 시간 없네. 더 있으면 늦을 게야.”

    백소천은 심협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문을 나섰다.

    심협은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내저었다.

    백소천은 여기에서 지낸 이틀째부서 매일 아침마다 마을의 꽃을 한 다발씩 꺾어 임심모에게 바쳤다. 하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독초를 꺾으러 마을을 나섰다.

    백소천은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저 멍하니 그쪽에 서서 들고 있던 꽃다발은 모두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명은 꽃을 꺾고 한 명은 독을 꺾는다.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심협은 흐름이 끊긴 김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탁자 앞에 앉아서는 한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원 도인, 며칠 동안 풀어 놓은 고충이 적어도 30마리는 되는데, 소식이 있소?”

    “이곳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중간 규모의 종문과 같아서 워낙 넓다 보니 30마리 고충으로는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군요. 수천 마리를 풀면 어떻겠습니까?”

    원구의 목소리가 심협의 식해에서 울려 퍼졌다.

    “그랬다가는 금방 발각될 거요. 유비서가 절대 가지 말라고 한 박약원 같은 곳을 중점적으로 찾아보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심씨!”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니 유비서가 서 있었다.

    “유 소저, 오늘은 웬일로 날 찾아온 것이오?”

    심협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시끄럽고, 따라와.”

    유비서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

    “무슨 일이오?”

    “뭘 그렇게 캐묻는 거야? 여아촌의 풍경을 구경시켜주려는데, 싫어?”

    유비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화를 냈고, 심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유비서는 심협이 거의 곧바로 대답하자 표정이 조금 풀어졌고 ‘가자’라는 한마디만을 남기고는 곧장 몸을 돌려 마을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은 마을 결계 근처에 도착했다.

    유비서가 소매에서 손바닥만 한 청목 영패를 꺼내 결계를 향해 흔들었다. 청목 영패에서 빛이 나오더니 결계에 떨어졌고, 곧이어 결계에 자동으로 사람 하나가 지나가기에 충분한 문이 생겼다.

    “내가 도망칠까 우려는 안 하시오?”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네 벗은 마을에 있지 않나? 그리고 네 목적도 아직 달성하지 못했고.”

    유비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손 파파께서 포기하라고 했는데? 혹시 내게 기회가 생긴 것이오?”

    심협이 놀라며 말했다.

    “어디 한번 훔쳐보던가.”

    유비서가 몸을 돌려서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럼 구범청련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겠군요.”

    심협은 웃으며 농을 건넸다. 하지만 실제로도 훔쳐볼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유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심협은 이내 그녀와 처음 만났던 곳에 도착하자 뭔가 깨달았다.

    “율율이 여기서 실종된 것이오?”

    “역시 네놈 짓이었구나!”

    유비서는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몸을 돌려서 활로 심협을 겨냥했다.

    “휴, 생각을 좀 하시오. 정말 내가 그랬으면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했겠소?”

    심협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율율이 여기서 사라진 건 어떻게 알았지?”

    유비서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심협을 쏘아보며 물었다.

    “저번에도 여기서 소저를 만났는데 여기로 또 데려왔다는 건 이곳을 자주 배회한다는 의미 아니겠소? 여기 자주 온다는 건 혹시 놓친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일 것이고……. 보아하니 퍽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그 아이는 내 여동생이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여동생보다 더 각별했지. 정말 그녀가 어디로 간 건지 모르는 거야?”

    유비서는 그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지금도 내가 그녀를 납치했다고 생각하시오?”

    “나는 단지…… 정말 그녀를 되찾고 싶어서…….”

    유비서는 먹먹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협은 한숨을 내쉬고는 현음미동을 운공하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그자에게 부상을 입혔소?”

    잠시 살펴보던 심협이 유비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 화살이 어깨를 스치긴 했는데 맞지는 않았어.”

    “아니, 맞았소. 안 그랬으면 벌써 그 화살을 되찾지 않았겠소? 단지 그자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못 맞혔다고 착각한 것이겠지요.”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분명히 몇 번이나 찾아봤다고. 정말 맞았으면 내가 왜 혈흔을 발견하지 못한 거지?”

    유비서가 조금 흥분된 말투로 물었다.

    “율율을 납치한 것은 아마 금유리(金琉璃) 요물일 것이오. 이 요물은 유리 광채로 변할 수 있어 각종 형태로 변신도 가능하지. 피 또한 특수해서 투명하지요.”

    심협은 그렇게 말하면서 땅에 있는 풀잎을 따더니 유비서에게 건넸다.

    유비서는 반신반의하며 풀잎을 받아서 자세히 살폈다.

    “금유리의 피는 말라도 사라지지 않고 결정(結晶)같이 굳어버리지요. 잎을 높이 들어서 태양에 비춰보면 무언가 보일 겁니다.”

    유비서는 그의 말대로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가 풀잎을 높게 들었다. 그러자 정말로 잎에서 얇고 투명한 결정이 태양에 반짝였다.

    “이제 날 믿겠소?”

    “네가 한 게 아니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금유리 요물인지 뭔지 난 오늘 처음 듣는 건데 그런 게 있다는 네 말을 어떻게 믿지?”

    “간단합니다. 결정이 흩어진 곳을 따라 안내할 테니 그대는 그 도적이 도망친 길이 맞는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심협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마치고는 그는 현음미동으로 금유리 요물이 도망친 곳을 찾았다.

    유비서는 뒤를 따르며 그 종적을 살폈고, 마침내 그때 본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다.

    그녀는 심협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제는 그녀도 심협이 납치범이 아니라는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사과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네 짓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정말 율율을 찾는 걸 도와줄 거야?”

    “물론입니다. 내 결백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하니 내가 그대를 돕는 건 나 스스로를 돕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또 혹시 모르지요? 내가 공을 세우면 손 파파가 구범청련을 줄지도…….”

    심협은 웃으며 말을 맺었다.

    “구범청련은 꿈도 안 꾸는 게 좋을 거야. 율율을 찾아줘도 손 파파가 절대 줄 리가 없어. 그것은 우리 여아촌에게 매우 중요한 거라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이제 유비서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진 상태였다. 며칠을 지켜본 바, 심협은 정말로 그런 짓을 벌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심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기대를 안 하는 게 좋겠구나. 정말로 안 된다면…… 훔치기라도 하는 수밖에…….’

    심협은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들킬까 재빨리 말을 돌렸다.

    “율율이 정말로 금유리 요물에게 납치된 것이라면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이 요물들은 천성이 온화하여 다른 종족을 공격했다는 소문은 거의 없으니까요. 하물며 잔인하게 죽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소. 다만 이들이 나섰다면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전에 이 요물을 본 적이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장안의 어느 스님이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금유리에 관한 정보는 서역으로 갈 때 강류대사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유비서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리 낙심하지 마시오. 적어도 율율이 금유리 요물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유비서는 그의 위로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아촌 사람들은 독을 쓰는 데 능하니 각종 기이한 꽃과 풀을 잘 알지 않습니까? 혹시 마을에 수명을 연장해 주는 다른 영초는 없습니까?”

    “수명을 연장하는 영초? 네 말대로 우리가 독약에 능숙하다는 걸 알면서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뭐, 물론 독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영약과 같은 효능을 볼 수도 있지. 가끔은 더 좋은 효과를 내기도 하고. 허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독약은 들어본 적이 없어. 아니면 마을 상점에서 찾아보던가.”

    유비서의 대답에 심협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마을에 상점이 있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많은 독약과 영초를 우리 여아촌 혼자서 다 쓸 줄 알았어? 당연히 바깥에 팔기도 하지.”

    “그렇다면 다른 영초도 있겠군요. 그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좋아.”

    심협의 기대 어린 눈빛에 잠시 머뭇거리던 유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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