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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85화 (585/1,214)
  • 585화. 교분(交分)

    마을의 2층 높이 나무 건물 앞에서 손 파파는 걸음을 멈추고는 유비서에게 말했다.

    “네가 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고 알려줄 것들을 모두 알려줘라.”

    “네, 파파.”

    유비서는 심협을 노려봤다. 내키지 않는 게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손 파파.”

    심협 일행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손 파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 건물로 들어갔다.

    “유 소저, 고생 좀 해주시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유비서는 그날 그자가 옆구리에 율율을 끼고 도망치는 걸 직접 봤기에 가슴속에서 미안함과 분노의 감정이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 소저, 믿든 안 믿든 율율 소저를 납치한 건 정말 제가 아니오. 어쨌든 이번 일이 무관하다 할 수 없으니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오. 그자를 찾는 데 나도 전력을 다해 돕겠소.”

    심협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유비서는 그의 결연한 표정에서 아무런 거짓과 가식이 느껴지지 않자 조금 당황했다.

    “따라와.”

    잠시 후,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세 사람은 그녀를 따라 마을 한가운데로 향했다.

    한데 저 앞의 나무 건물에서 하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머리 위에는 길고 뾰족한 귀가 달린 요족이었다.

    심협 등을 등진 채 다른 젊은 여자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것이 즐거워 보였다.

    “유 소저, 여아촌은 인간 여자만 받는 게 아니었소? 요족도 보이는군요.”

    심협이 참지 못하고 물어봤으나, 유비서는 내심 불쾌했다.

    ‘내가 억지로 참고 길을 안내해주는데 감히 그런 것까지 물어봐?’

    잠시 후, 그녀가 설명했다.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우리 여아촌은 은밀한 곳에 있지만 외부와 단절된 게 아니야. 그러니 너희 같은 도적들도 찾은 거겠지.”

    “아…….”

    “우리 여아촌이 외부와 교류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종문도 있어. 저 요족 여자는 반사동(盤絲洞)의 제자다. 두 종문은 오랫동안 교분이 있었기에 은밀히 교류하고 있지.”

    유비서의 설명이 이어졌는데, 말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심협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백소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유 소저, 마을에 담황색 옷을 입은 선자도 있소?”

    “호색한, 왜 그런 걸 묻지?”

    유비서는 백소천을 노려보며 호통쳤다.

    “소리치는 걸 보니 있나 보오. 이름이 임심모가 맞소?”

    백소천은 환하게 웃었으나, 유비서는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일행은 마을 중앙 커다란 고목 옆 2층 건물의 다락방에 도착했다.

    “앞으로 너희는 여기서 지낸다. 파파께서 행동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니 마을 동쪽의 의사당(議事堂), 수련장, 마을 서쪽의 박약원(璞藥園) 그리고 조화수(祖花樹) 부근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은 자유롭게 가도 좋다.”

    “알겠소.”

    세 사람이 일제히 답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우리 여아촌 사람과 접촉하지 마라. 혹시라도 딴마음을 품었다가는 반드시 네놈들을 땅에 묻어 버릴 거다.”

    유비서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엄중히 말했다.

    “알겠으니 안심하시오.”

    심협은 머쓱한 듯 짧게 답했다.

    한데 그는 말을 끝맺을 무렵, 맞은편 멀지 않은 곳에 담황색 옷을 입은 여인이 광주리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형, 일단 참…….”

    퍼뜩 놀란 심협이 말리기도 전에 백소천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누군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는 화살을 들고 백소천을 겨냥하며 소리쳤다.

    “호색한, 무엄하다!”

    유비서가 외쳤다.

    “심모 소저!”

    백소천은 그녀를 지나서 뒤에 있는 임심모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임심모도 당연히 알아챘지만,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비서, 무슨 일이야?”

    그녀는 유비서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긴장을 풀라는 뜻을 표했다.

    “심모 언니, 저놈들이 언니를 안다고 하던데?”

    유비서가 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한 번 만나 적이 있긴 해.”

    임심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정하지 않았다.

    “임 소저, 일전에 어째서 우리를 그 산골짜기로 보낸 것이오?”

    심협이 다가와서 물어봤다.

    “당신들도 이제 알겠지만, 최근 마을에 일이 생겼어요. 한데 당신들 같은 낯선 자들이 갑자기 여아촌을 물어보는데 어찌 경계하지 않겠어요?”

    임심모는 심협을 쳐다보지도 답했다.

    “소저의 말에 일리가 있소. 우리가 실례했소.”

    백소천은 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임심모를 바라봤고, 지금 그에게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맞는 말로 믿었다.

    “그렇다면 시시비비도 가리지 않고 넝쿨 요괴와 독벌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소. 우리는 하마터면 당신에게 속아서 죽을 뻔했소!”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비서는 그 말에 의외라는 듯 반사적으로 임심모를 바라봤으나, 이내 심협을 꾸짖었다.

    “무사히 살아서 나왔으니 더는 따지지 마라! 너희가 여아촌을 찾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지 유비서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이를 본 심협은 속으로 탄식했다. 더는 따질 수도 없었다.

    “임 소저도 여아촌의 제자입니까?”

    백소천은 심협이 더는 따지지 않자 화색을 띠고 다시 물었다.

    “심모 언니는 반사동의 제자다. 호색한, 내 경고하는데, 다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쫓겨날 거다!”

    유비서는 차갑게 비웃고는 경고했다.

    한편, 심협은 임심모가 반사동의 요족이라는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반사동의 여자는 미혹 술법에 능하다고 들은 적이 있다.

    허나 그녀가 정말 미혹 술법을 사용한 것이라면 어째서 백소천만 걸린 걸까?

    심협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백소천을 보고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여아촌 사람이 아니면 말도 섞지 말라는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것 아니오?”

    “너…….”

    백소천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유비서는 할 말을 잃었다.

    “비서야, 가자. 내가 방금 독초를 많이 땄거든. 안 그래도 너에게 독성을 섞어달라고 할 참이었어.”

    임심모가 유비서의 옷을 당기며 말했다.

    “좋아요.”

    유비서는 환하게 웃으며 임심모의 팔짱을 끼고 함께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두 손가락으로 심협 등을 가리키고는 다시 자신의 두 눈을 가리켰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심협은 그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세 사람이 작은 건물로 들어가 보니 1층은 회의청이라 원목 탁자와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었다. 뒤에는 2층으로 오르는 나선 계단이 있었다.

    2층에는 방이 두 개뿐이었다. 유비서가 꾸민 짓임을 안 심협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이 원구를 천책 공간으로 돌려보냈다.

    나무 건물로 들어간 손 파파는 한참을 대청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실로 향했다.

    건물 안의 뒷벽에는 팔각형 구리거울이 걸려 있었다. 손 파파가 손을 흔들자 구리거울이 흔들리더니 벽에서 한 변이 6촌에 이르는 사각형 돌이 천천히 내려갔고, 컴컴한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안에서 어렴풋이 불빛이 비쳤고, 바닥에는 굽이굽이 내려가는 돌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손 파파는 돌계단을 따라서 어두운 지하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에는 큰 직사각형 돌탁자가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등받이가 있는 회백색 돌의자 몇 개가 있었다. 거기에는 일고여덟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가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대승기 수사였다.

    “손 파파,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안쪽 의자에 앉아 있던 회색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외투)을 걸친 노파가 몸을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높이 튀어나온 광대뼈와 푹 파인 눈동자는 더욱 나이가 들어 보이게 했다. 지렁이 같은 주름은 곧 죽을 때가 다가온 것 같았으나, 그녀는 마을의 몇 안 되는 진선경 수사 중 한 명이었다.

    “마을에 잘못 들어온 외부인들이니 개의치 말고 본론부터 이야기합시다.”

    손 파파가 자리에 앉으며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을 상황을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오. 만독혼원주(萬毒混元珠)를 잃어버린 이후로 우리 마을에 오랫동안 새로운 진선 수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소.”

    손 파파의 말에 석실의 분위기는 더 무거워졌고, 모든 수사가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여아촌은 대대로 독경(毒經) 공법을 수련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수련 속도는 다른 종문의 비법보다 빠르고 위력도 대단하지만 진선기에 들어가면 만독을 먹어 도움을 받아야지, 안 그러면 죽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허나 만독의 반작용이 일어날 가능성도 크니 독이 일어나면 몸이 죽고 신혼이 사라지는 결과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보라색 두봉을 두른 키가 큰 여자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만독혼원주는 천하의 모든 독을 억제할 수 있어서 본래 이 난관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열쇠였는데, 그걸…….”

    다른 사람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아쉬워해봐야 아무 소용없소. 연신단(煉身壇)이 우리를 돕기로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손 파파가 그녀의 말을 끊고 다시 물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가 노쇠한 얼굴의 노파가 말했다.

    “연신단의 명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수많은 종문 세력이 사도(邪道)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봐도 확실히 정도를 가는 자들이 아니니 저는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박(朴) 장로님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여아촌이 수련한 공법과 신통도 모두 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외부로 많이 활동하지 않아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그들도 우리를 정도로 보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외부에 떠도는 장사의 구분을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신단이 말한 물건이 우리에게 정말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죠.”

    하얀 옷을 입은, 몸매가 풍만한 젊은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견설(李見雪)로, 여인촌 장로 중 한 명이었지만 대승 절정에 불과했다. 한 걸음 남은 진선기는 그녀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과거 명성이 보잘것없던 신비의 종문 연신단이 이렇게 빨리 성장하게 된 것은 분명 남달리 뛰어난 무언가가 있거나, 그들이 연구한 연신성성성선지법(煉身成聖成仙之法)이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새우등의 노파가 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추수(秋水) 장로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능력이 없으면 연신단이 그토록 많은 종문의 견제를 받을 리가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건 좋은 일이죠. 어쨌든 우리를 견제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대다수의 대승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저들이 거짓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이건 종문과 관련된 일이니 만일에 대비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박 장로의 미간에는 주름이 더 깊어졌다.

    “연신단도 당연히 그렇게 후할 리가 없소. 그들은 우리의 독공 공법 일부와 13종류의 여아촌 특제 기독(奇毒)을 원하고 있소.”

    손 파파가 말했다.

    “독공의 일부라……. 얼마나 원하는 겁니까?”

    박 장로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교태가 흐르는 목소리가 대신 대답했다.

    “물어봤더니 그저 기본 3권 정도더군요.”

    뒤이어 하얀 연기가 통로에서 흘러들어와 조금씩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일순 긴장했던 장로들은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경계를 풀었다.

    그녀는 몸은 작았고, 피부는 눈처럼 하얀 데다 외모는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오른쪽 눈썹에는 붉은 점이 있었고, 조금 둥근 얼굴에는 태생부터 타고난 교태가 흘렀다. 살구 같은 눈에는 물빛이 흘러서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석실에는 모두 여자뿐이니 이런 미모도 큰 쓸모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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