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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84화 (584/1,214)
  • 584화. 연금

    한참 뒤, 천책 공간에서 나온 심협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괜찮은가? 아직 좀 더 정양하지 않고……?”

    백소천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애초에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소.”

    손을 내저으며 답한 그는 두 손가락을 들고는 원 도인이 전수해준 파훼법에 따라 커다란 꽃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그의 입에서는 읊조림이 끊이지 않았고, 법결도 바꾸지 않은 채 두 바퀴 째를 돌았다.

    이를 본 백소천은 궁금증이 생겨났지만, 심협과 여러 해를 같이 다녔기에 조용히 바라볼 뿐 방해하지 않았다.

    심협은 세 바퀴를 돌더니 갑자기 땅을 딛고는 몸을 돌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똑같이 세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크게 외쳤다.

    “열려라!”

    백소천과 원구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세 사람 앞에 있던 화홍색의 커다란 꽃이 갑자기 붉게 번득이더니 빛이 밖으로 새어 나와 마치 빛나는 수액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지나가는 곳마다 땅에 빛이 흐르더니 고리 형태의 부문이 지상을 시작으로 사방으로 끊임없이 퍼져 나가 순식간에 천 장 밖까지 확장됐다.

    이어서 눈부신 붉은 빛이 비치자 심협 등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완전히 바뀐 다른 세상이었다.

    심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커다란 꽃은 이미 사라졌고, 주변은 넝쿨이 무성한 고목(古木)으로 우겨져 있었다.

    심협의 눈에는 고목 너머 숲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와 안개가 자욱한 산속의 마을이 보였다.

    “심형,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백소천이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원구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심협을 커다란 꽃의 금제를 푸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하지 않은 걸까?

    “그게…… 평소에 잡서를 좀 많이 보는데, 거기에 이 방법이 적혀 있었소. 단지 정말 될 줄은 몰랐소. 나도 놀라는 중이오. 하하!”

    심협은 웃으며 은근슬쩍 지나가려 했다. 천책 공간으로 들어가 원 도인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백소천은 믿지 않는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고, 원구는 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일단 갑시다. 저 마을이 여아촌일 거요.”

    심협이 말했다.

    “흠, 비밀이라 이거지? 좋아, 어서 가세.”

    백소천은 심협이 밝히기 싫어하는 듯하자 더는 묻지 않았다.

    세 사람은 숲속을 지나 금세 마을에 도착했고, 마치 그릇을 숲속에 엎어 놓은 것처럼 반투명한 결계의 광막이 마을을 뒤덮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계 안의 마을은 집이 대체로 낮아서 가장 높은 것도 2층에 불과했다. 지붕은 두꺼운 푸른 잔디로 덮여 있었고, 담벼락도 대부분 여러 꽃과 나무로 뒤덮여 마치 전원 같은 풍경이었다.

    대부분의 집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나로도 부족해서 하나 더 있다고?”

    심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결계는 저들의 마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독이 없을 겁니다. 서원고로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구가 먼저 나서며 물었다.

    “아니,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정식으로 방문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백소천이 말했다.

    심협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우리 여아촌까지 오다니, 대담한 놈들이구나!”

    이어서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화를 내며 숲에서 달려왔다.

    이목구비가 매우 정교하고 몸매도 늘씬했으며, 검은 옷이 완벽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만 피부가 비교적 어두웠다.

    “아, 소저. 저희는 도둑이 아니라…….”

    백소천이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머리에서 단궁을 꺼내 바로 화살을 날렸다.

    짧은 화살의 기세는 맹렬했고, 어렴풋이 푸른 기운을 흘리며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백소천의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금강호체!”

    백소천은 화들짝 놀라 외치며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온몸이 금빛으로 반짝이면서 금색 종의 광막에 감싸였다.

    그제야 그는 화살촉이 쇠가 아니라 어떤 짐승의 이빨임을 알 수 있었다. 이빨의 끝이 초록색으로 빛나는 것을 봐서는 어떤 맹독이 묻어 있는 게 분명했다.

    둥!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더욱 빨라진 화살이 백소천의 심장에 꽂히려는 순간,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금빛 종이 강렬하게 흔들렸다.

    “큭!”

    백소천은 낮게 신음했으나, 한 발로 땅을 강하게 딛어 오히려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들었고, 입에서는 불문의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

    이 포효에 그의 몸을 뒤덮은 금빛이 더 커지면서 순식간에 화살을 제압했다.

    펑!

    화살이 산산이 터져 나갔고, 백소천을 감싼 금빛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도리가 없는 여인이로군!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공격 먼저 하다니!”

    백소천은 버럭 화를 냈다.

    “흥! 너희 같은 도둑놈들과 할 말은 없다! 화살을 받아라!”

    여인이 계속해서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다시 화살을 쐈다. 더욱이 이번에는 한참 힘을 모아서인지 그 뒤로 검푸른 꽃의 허상이 떠올랐고, 처음에는 커다란 맷돌처럼 크게 빛나더니 금방 점점 줄어들면서 화살 속으로 들어갔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화살이지만 꽃의 허상이 빛이 되어 들어가자 나무 막대에서 검푸른 부문이 떠올랐고, 이어서 푸른 빛이 화살촉을 완전히 감쌌다.

    여자는 차갑게 웃으며 활을 당긴 손을 놓았다.

    한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여인의 손목을 내려쳤다. 심협이었다.

    이 강력한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여인은 태산처럼 굳건하던 팔이 흔들리면서 막 시위를 떠나던 화살의 궤적이 살짝 틀어졌다.

    백소천은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만 살짝 틀어 가볍게 피했다.

    화살은 허공을 가로질러 뒤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명중했다.

    펑!

    10여 개의 고목을 연이어 꿰뚫은 화살은 땅 위로 튀어온 바위에 화살대까지 깊이 파고든 후에야 멈췄다. 그러자 바위는 검푸른 기운이 스며들더니 빠르게 부식되어 완전히 부서졌다.

    한편, 여인은 심협이 자신의 팔을 붙잡은 것을 보고는 다른 손으로 등 뒤에 있는 화살을 잡아 손을 돌려서 그의 오른쪽 눈을 찌르려 했다.

    심협은 화살에 맹독이 묻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손으로 막지 않고 발밑에서 달빛을 반짝이며 사월보를 시전해 황급히 피했다.

    “소저, 우리는 악의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니 제발 공격을 멈추시오!”

    심협은 뒤로 물러나서 크게 외쳤다.

    * * *

    “세상 모든 남자가 하는 말은 다 감언이설이라고 파파(婆婆)께서 그러셨다! 그러니 네 말은 믿지 않는다!”

    여자는 차갑게 비웃고는 다시 활시위를 당겨 이번에는 심협을 겨냥했다.

    심협은 지금껏 이토록 억지스럽고 말이 안 통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 불쾌했다. 이에 절로 표정이 굳어졌고, 손을 돌려서 순양검배를 조종하며 동시에 푸른 물줄기를 몸 옆에 띄웠다.

    이를 본 여인도 긴장된 얼굴로 시위를 당긴 손에 더욱 힘을 주자 초록색 소용돌이가 화살촉 주변에 맺히기 시작했다.

    이때, 뒤에서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서, 그만해라.”

    여자는 그 소리를 듣고도 활을 내려놓지 않고 고개만 살짝 돌리며 말했다.

    “파파, 이 도적놈들은 위험합니다.”

    심협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로 보니 보랏빛 치마를 입은 백발 여인이 마을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결계에 가까워진 여인이 손을 휘두르자 문이 생겨나 길을 내줬다.

    한데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달리 얼굴은 매우 젊었고, 몸매가 빼어나 ‘파파’라는 호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비서야, 이들은 악인이 아니다.”

    백발의 여인이 말했다.

    “하지만 파파…….”

    “두 사람 중 한 명은 화생사의 신통을 시전했고 한 명은 방촌산의 신법을 사용했다. 두 사람 모두 명문 대종 출신이니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네가 멀쩡하게 서 있을 성싶으냐?”

    백발 여인의 설명에도 검은 옷의 여자는 분이 식지 않은 듯했으나, 서서히 활을 든 팔을 내렸다.

    “후배 심협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심협이 서둘러 포권하며 인사를 올렸고, 백소천과 원구도 각자 이름을 밝혔다.

    “난 손(孫)씨이니 손 파파(孫婆婆)라고 부르게.”

    백발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검은 옷의 여자를 바라봤다.

    “유비서(柳飛絮).”

    검은 옷의 여자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짧게 이름만을 말했다.

    “우리 여아촌은 선문 대종이 아니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거늘, 자네들은 어떻게 들어왔는가?”

    손 파파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심협이 나서며 말했다.

    “사문의 어른께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문의 어른이라……. 어쨌든 이리 왔으니 손님 아닌가. 나와 함께 마을로 들어가세.”

    손 파파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심협 등은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그제야 유비서도 어쩔 수 없이 손 파파를 따라서 마을로 들어갔다.

    결계로 들어서자 손 파파가 말했다.

    “자네들이 비서의 무례를 용서하게. 최근에 마을에 일이 생겼네. 노부의 제자 율율(栗栗)이 외지 남자에게 납치를 당했는데, 생김새가 자네와 매우 닮았다네.”

    “저와 닮았다고요?”

    심협이 의아해했다.

    “닮기는, 똑같이 생겼는데……. 파파, 저놈이 시치미 떼는 거라고요!”

    유비서가 앙칼지게 외쳤다.

    그리고 그제야 심협은 손 파파가 왜 그들을 들어오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율율을 납치한 사람이 심협이든 아니든 일단 그를 붙잡으려는 것이다.

    ‘아무래도 구범청련을 쉽게 얻기는 틀린 모양이군.’

    허나 한참을 생각해봐도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왜 자신의 모습을 흉내 내서 여아촌의 여제자를 납치했단 말인가?

    “손 파파, 이번 일은 저와 정말 관련이 없습니다. 저희는 구범청련을 찾으러 온 거지 마을에서 이런 소란을 피울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꿈도 야무지구나! 감히 율율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구범청련까지 노려? 그건 우리 여아촌의 지보인데 네놈 같은 외지인에게 줄 것 같으냐?”

    심협의 말에 유비서가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자네가 어떻게 구범청련을 알고 있는 건가? 그것은 보물임이 틀림없지만 세상에 나타난 적이 드물어서 알고 있는 자가 매우 적은데.”

    손 파파는 유비서를 제지하며 물어봤다.

    “그게…… 귀인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누가 알려줬든, 자네 배후에 어떤 사문의 어른이 안내했든 구범청련은 절대로 내줄 수 없으니 포기하게. 자네는 율율의 실종과도 관련이 깊으니 이 일이 밝혀지기 전까지 자네는 마을을 떠날 수 없네.”

    손 파파가 몸을 돌려 계속 안내하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심협은 백소천과 눈이 마주쳤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 이번 일을 조사하시는 것은 불만이 없지만, 저 때문에 생긴 일일 수도 있으니 저도 조사에 참여해서 결백을 입증하고 싶습니다.”

    심협은 다시 ‘선배’로 호칭을 바꾸며 말했다.

    “알겠네. 마을을 떠나지만 않으면 마을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아. 물론,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들은 제외네. 그건 나중에 비서가 설명해줄 거야.”

    “감사합니다, 파파.”

    심협이 다시 말했다.

    “심형, 어떻게 결백을 증명할 셈이오.”

    백소천이 전음으로 물었다.

    “누군가 날 노리고 있는 듯하니 내가 여기 있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거요. 마을에서 한두 번 어슬렁거리다가 밖으로 유인하면 가장 좋고, 안 되면 이번 기회에 구범청련에 관한 일을 알아보면 되지 않겠소?”

    심협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고, 나이 든 부인이나 서로 도망치고 쫓으며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손 파파를 보면 공손하게 ‘파파’라고 부르며 인사했다. 이어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심협 등을 바라봤다. 젊은 여인들은 대부분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고, 나이가 든 여인들은 혐오감과 적개심이 가득했다.

    그녀들 중에는 수사도 있었고 범인(凡人)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예외 없이 전부 여자였고 남자는 없었다.

    심협은 이곳의 풍습에 관해 미리 들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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