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81화 (581/1,214)
  • 581화. 절세 미모에 마음이 움직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보름이 지났다.

    심협은 객잔 방에서 나왔다. 몸에서는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기운은 한층 강해진 상태였다. 설백단의 힘을 빌려 고되게 수련한 덕에 그의 경지는 또다시 상당히 정진했다. 출규 후기 절정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멀지는 않았다.

    설백단의 약력은 그의 예상보다 강했다. 그동안의 수련 상태로 미루어 스무 병 정도면 출규기 절정에 도달할 것 같았다.

    심협은 환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 일약재로 향했다. 그리고 반각 뒤, 일약재에서 나오더니 성안의 연기 상점에 들렀다가 비주를 타고 채운도로 날아갔다.

    심협과 백소천은 비주를 타고 날아갔고, 저녁 무렵에야 오색찬란한 안개로 뒤덮인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섬은 작지 않았다. 좌우의 양 날개는 넓었고, 가운데는 약간 좁았다. 남쪽에는 두 개의 좁고 긴 반도(半島)가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화려한 색의 나비처럼 보였다.

    비주를 섬 남쪽 길게 이어진 좁고 긴 반도에 착륙시키려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 짙은 독기군. 아무래도 독성이 강한가 보오.”

    심협이 내심 긴장한 듯 말했다.

    “혀에 십향반생환(十香返生丸)을 머금으면 독기는 모두 막아낼 수 있으니 따로 방어하지 않아도 될 걸세.”

    백소천은 백옥색 병에서 수박씨만 한 단환을 꺼내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은 단환을 혀 아래 머금었다. 그러자 조금 씁쓸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고, 머릿속까지 시원한 기분이 들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두 사람은 비주에서 뛰어내렸다. 두 발이 닿자 땅이 흔들린다는 직감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길게 이어진 반도는 사실 10여 개의 청흑색 넝쿨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독기가 난무하고 식물이 우거진 것을 보니 여기가 채운도라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백소천은 물에 떠 있는 넝쿨에서 몸을 흔들며 웃었다.

    “올라가 봅시다.”

    심협은 짧게 답하고는 바로 섬으로 향했다.

    흙은 매우 부드러웠고, 잔뜩 우거진 식물들은 생기가 넘쳤다. 다만 곳곳에 독기가 가득했고, 섬에 오르는 길이 없어서 마치 원시림 같았다.

    신식을 퍼뜨려 살펴보니 주변에 적지 않은 요물들의 영력 파동이 느껴졌고, 대부분은 기운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넝쿨이 엉킨 숲속을 한참을 걸어가자 앞에서 갑자기 나뭇잎이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긴장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조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에서 화홍색 구렁이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입을 쩍 벌리고 두 사람에게 접근했는데, 입에서 짙은 유황 냄새가 나는 노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심협과 백소천은 재빨리 피하자 표적을 잃은 구렁이는 여기저기 나무들에 부딪쳤다. 나무들은 부러졌고, 바닥은 고랑처럼 파여 숲속에 통로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 구렁이는 두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곧장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심협과 백소천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백형, 우리 둘 다 방향을 못 잡는 것 같으니 차라리 저 구렁이를 따라갑시다. 저리 급히 가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오.”

    “좋은 생각일세. 숲을 헤매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백소천이 부채를 쫙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둘러 사라진 구렁이를 쫓아갔다.

    그러던 중 심협은 길가의 풀 틈에서 잎사귀 없는 영롱한 하얀 꽃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아직 꽃망울을 품고 있는 것이 다 자라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여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가늘었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왜 그러는가?”

    옆서 백소천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직 오래되지 않은 귀절초(鬼切草)를 찾았는데, 이 풀 주변에서 자라는 것은 전부 월견초(月見草)요.”

    심협이 설명했다.

    “월견초, 귀절초…… 전부 영약이 아닌가?”

    “영초라고도 할 수 있고 독약이라고도 할 수 있소. 여기 잎사귀의 엽맥을 보시오. 화홍색의 무늬가 있지 않소? 아마도 독성이 더 강한 것 같소.”

    심협은 월견초 잎사귀에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더니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고는 기침을 해댔다.

    “생각해보면 아까 그 구렁이도 이상한 데가 있소. 이 부근에 화독천(火毒泉)이 있는 모양이오.”

    “화독천?”

    백소천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화독을 품은 샘물이오. 밖으로 흘러나온 독기가 그 구렁이를 이끈 것 같소. 오랜 세월이 흐르면 여기 있는 모든 영초의 성장에 영향을 줄 거요. 아마도 범상치 않은 화독천인 모양이오. 주위 대부분이 독초이니 운에 맡기는 수밖에……. 십향반생환이 버틸 수 있겠소?”

    “어찌 못 버티겠는가? 겨우 화독(火毒) 가지고 뭘 그리 걱정하는 겐가?”

    백소천은 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다행이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대략 반 시진 정도 걸었을 때, 전방 숲의 오래된 나무 아래에 항아리 입구만 한 동굴이 보였고, 불 구렁이가 남긴 흔적도 여기까지였다.

    “이곳의 온도가 방금 지나왔던 곳보다 더 높은 건 동굴에서 전해지는 열기 때문인 것 같군. 아무래도 화독천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양이오.”

    “멀지 않은 게 아니라 벌써 도착한 것 같은데?”

    백소천은 이 부채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협이 돌아보니 수백 장 너머 허공에 붉은 안개들이 뭉쳐 있었다. 마치 색깔이 있는 구름 같았고, 높이는 10여 장에 불과했는데 대부분의 나무는 그보다 높게 자라지 못한 상태였다.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유황 타는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그때, 앞의 숲에서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퍽 듣기 좋은 소리였는데, 어느 민간의 속요 같았다. 두 사람은 노래의 내용은 잘 몰랐지만, 생기발랄한 그 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누가 있군.”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누군가 있다는 것은 이곳이 버려진 섬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채운도에 여아촌이 있는지 없는지 저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거의 도착해갈 때, 심협이 백소천을 붙잡고는 전음으로 말했다.

    “이리 독기가 짙은데도 저렇게 노래할 수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백소천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기운을 숨기고 법력 파동을 억제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숲속 끝에 도착한 두 사람이 나무 뒤에 숨어서 살펴보니 약 8장 너비의 작은 타원형 연못이 있었다. 그 안에는 화홍색 용암 같은 물이 격렬하게 흘러 커다랗고 하얀 물거품이 일어났다.

    “백…….”

    백소천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 입을 열었던 심협은 그 순간 목구멍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화들짝 놀라 백소천을 바라보니,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부채도 가만히 들고만 있는 것이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심협은 백소천이 멍하니 서 있는 모습에 의아해 얼른 옆으로 다가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화독천 건너편, 붉은 심초(芯草) 중간에 담황색 치마를 입은 젊은 여인이 푸른 대나무 광주리를 들고 몸을 숙인 채 무언가를 따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고, 두 사람 쪽을 향해 몸을 돌리자 부드러운 살결이 황색 치마 사이로 드러났다. 그 옆모습의 곧은 콧날과 가느다란 입술, 살짝 뾰족한 턱은 마치 조각처럼 완벽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마치 수많은 별이 박힌 것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와 가느다란 눈썹은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 바라보는 이의 혼을 빼놓았다.

    하지만 심협의 눈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으로 향했다. 그녀가 따고 있는 것은 야생화가 아니라 아름다운 색깔에 잎이 무성한, 작고 가느다란 가시가 돋친 적홍색 꽃이었다.

    심협은 저 꽃이 바로 독성이 매우 강한 낭독화령(狼毒火苓)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평범한 수사는 손을 대기는커녕 옥갑(玉匣)에 담긴 꽃가루를 조금만 흡입해도 창자가 타버릴 정도였다.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심협은 경계하며 전음으로 백소천을 깨우려 했으나, 그는 벌써 숲을 벗어나 화독천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형!”

    심협은 기겁해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 무렵, 여인도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옆모습만으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완전한 아름다움이 눈에 박혔다. 심협마저 그녀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설렜다. 다만 그의 마음은 이미 섭채주에게 온전히 향한 터라 이 설렘은 그저 본능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하여 그는 금세 정신을 차렸지만, 백소천의 얼굴에는 바보 같은 웃음이 가득했다.

    “백형, 뭘 멍하니 있는 것이오?”

    심협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가며 전음으로 물었다.

    “심형, 저기 보게. 그녀가 날 향해 웃고 있지 않나.”

    백소천은 목소리마저 흐리멍덩했다.

    할 말을 잃은 심협이 다시 여인에게로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는 백소천의 바보 같은 웃음에 화답하듯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저, 여기가 채운도가 맞소?”

    백소천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화독천의 독기 어린 수증기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네, 그래요. 두 분은 외부에서 오셨나요?”

    소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물었는데, 그 목소리는 앞서 노래할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차분하고 부드러워 더욱 마음을 흔든 것이다.

    “그렇소. 우리는 여아촌이란 곳을 찾고 있소만, 혹시 들어보셨소?”

    심협이 말릴 틈도 없이 백소천은 이미 목적지를 낱낱이 알렸다.

    “여아촌이요? 저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인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지만, 금방 말을 이었다.

    “저도 여기 살지는 않아요. 그냥 약을 만들 독초를 캐러 온 거죠. 그러니 섬에 어떤 마을이 있는지 저도 잘 모른답니다.”

    “그럼 소저, 이 섬에서 약을 캐는 동안 뭔가 특별한 현상이 있었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을 본 적이 있소?”

    심협은 백소천의 입을 막기 위해 먼저 나서서 물었다.

    “이 섬은 매우 넓지만 사문에서는 제게 약초를 캘 수 있는 지역을 지정해줘서 그런 곳은 못…… 아, 한 군데 있어요!”

    여인은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게 어딘지 알려줄 수 있소?”

    심협이 서둘러 물어봤다.

    여자는 몸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여기서 10여 리 떨어진 작은 산골짜기에서 우연히 무채색의 빛이 피어오르는 것을 봤는데, 다른 곳과는 달라 보였어요. 다만 그곳은 사문의 어른께서 저희에게 절대 들어가지 말라 엄명하신 곳이라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고맙소, 소저.”

    심협이 포권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별말씀을요.”

    여인도 빙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숙여 허리춤의 대나무 광주리를 내려다보며 수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 백소천이 불쑥 물었다.

    “소저, 저는 백소천이라 합니다. 소저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끄러운 듯 답했다.

    “소녀 임심모(林心玥)라 합니다.”

    “소저는 어느 문파이신가요?”

    임심모는 그 말에 순간 불쾌한 기색으로 경계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처음 봤지만 마치 어디선가 만난 듯하여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물어본 것뿐이오. 불쾌하셨다면 미안하오.”

    백소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물어보신 건 다 대답한 것 같군요. 계속 캐물으시는 건 실례입니다.”

    임심모는 슬쩍 콧방귀를 뀌고는 광주리를 들고 돌아갔다.

    “임 소저…….”

    백소천은 그런 그녀를 서둘러 쫓아가려 했으나, 심협이 옷깃을 잡아 세웠다.

    “백형, 미쳤소?”

    그 말에 백소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서서히 눈빛이 돌아왔다.

    “세상에 저렇게 그림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 또 있을까?”

    그는 여전히 아쉬운 듯이 그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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