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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79화 (579/1,214)
  • 579화. 만독(萬毒)

    “진주는 여기 있으니 최대한 빨리 설백단을 만들어 주십시오.”

    심협은 옥합을 꺼내서 왕 장로에게 건넸다.

    왕 장로는 옥합을 받아서 열어봤다. 안에는 눈물 요괴의 진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놀라운 한기가 폭발하면서 왕 장로의 팔에 얼음이 맺혔고, 탁자와 의자에도 하얀 서리가 내렸다.

    그는 안색이 변하더니 손에서 갑자기 붉은 빛을 발하여 옥함을 덮었다. 그제야 한기가 폭발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이 진주들은 한기가 풍족한 게 조금도 손상된 것이 없구려. 품질도 매우 높으니 이것으로 연단하면 설백단의 약성도 매우 높을 것이오. 마음 놓으시오. 내 바로 심묘의 대사께 보낼 테니, 7, 8일 후면 설백단이 완성될 것이오.”

    왕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4백 개 정도의 진주가 더 있는데, 며칠 뒤에 도착할 겁니다. 그것도 모두 설백단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심협은 한쪽 벽을 힐끗 쳐다보고는 일어나 왕 장로에게 공수하고는 나갔다. 일약재가 그의 눈물 요괴 진주를 탐내는 걸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편, 왕 장로는 4백 개의 진주가 더 있다는 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심협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했다.

    심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왕 장로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소청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보기에 어떤가? 저자를 잡아다가 눈물 요괴를 어디서 얻었는지 캐낼 수 있겠나?”

    그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저자는 예사롭지 않아. 경지는 출규 후기지만 실력은 매우 강해. 특히 살기는 당신이나 나보다도 더 짙으니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뒤이어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다. 백의를 입은 젊은 부인이었다.

    이 여인은 눈썹이 귀밑까지 내려왔고, 봉황눈과 오똑한 코가 아름다웠다. 하지만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워 싸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머리에는 기다란 토끼 귀가 달려 있었고, 몸에서는 기운가 느껴졌다. 요물인 것이다.

    “저자의 살기가 그렇게 짙단 말인가! 자네가 수련한 천살결(天煞訣)은 매우 현묘해서 살기로 한계를 돌파하지 않았던가. 과거 자네는 대승기로 돌파하기 위해 수십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바다로 나가서 요수를 사냥했지. 살기의 강력함만 따지자면 우리 일약재의 장로 중 세 손가락에 들 텐데, 겨우 출규기 수사의 살기가 자네보다 위라니!”

    왕복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과거 내가 사냥했던 요수는 하나같이 출규기나 응혼기에 불과했네. 죽여봐야 그리 많은 살기가 쌓이지 않아서 한참을 쌓고서야 한계를 돌파했지. 저 심씨 애송이의 살기는 두텁고 대범하여 그보다 경지가 훨씬 높은 존재를 많이 죽여본 것 같더군. 게다가 그는 내 존재를 즉시 눈치채고 있었어. 떠나기 전에 내가 숨어 있던 곳을 보더군. 괜한 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한 게지.”

    백의의 젊은 부인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자네의 수라은신술(修羅隱身術)은 재주님께서 직접 전수하셨으니 대승 후기의 수사도 알아채지 못하지 않는가! 한데 어찌 저런 애송이가……?”

    왕복은 이번에야말로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야 모르지. 어떤 감지술이 있는지 아니면 보물이 있는지. 어쨌든 저자는 건드리기 어려우니, 단방(丹坊)에 연락해서 저자의 단약으로 수작 부리지 말라고 전하게. 저런 자와는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게 좋아!”

    백의의 젊은 부인은 손사래 치며 이렇게 말했고, 왕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약재에서 나온 심협은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설백단 일이 마침내 해결됐으니 이제 구범청련 차례였다.

    “원 도우, 그대가 구범청련은 여기 나성군도에 있다 하지 않았소?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그는 신식으로 말을 걸자 원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저도 여기에서 난다고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전부 찾아봐야겠죠.”

    심협은 이미 예상했기에 속으로 잠시 투덜거리고는 부근의 영초를 파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나성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영초 상점은 당연히 청옥각이었지만, 일약의 엄청난 정보력에 꺼림칙해진 그는 당분간 나성성 최대 세력을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손님, 어떤 영초를 찾으십니까?”

    손님이 많지 않은 이 상점의 주인장은 얼굴에 누런 반점이 있는, 매우 선량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심협을 보자마자 바로 다가왔다.

    심협은 상점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그리 싸지 않은 몇 개의 영초를 억지로 골랐다. 꼭 필요해서 고른 것은 아니었으나, 덕분에 주인장의 눈빛은 더욱 호의적으로 변했다. 심지어 고개를 끄덕이며 바짝 다가오기까지 했다.

    “주인장, 혹시 구범청련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심협은 그제야 진짜 원하는 것을 말했다.

    “당연히 들어봤죠. 나성군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니까요. 백 년에 몇 송이나 펴서 각 세력의 경쟁을 부추기는 물건인데, 매번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옵니다.”

    주인장은 몸을 덜덜 떨며 무섭다는 듯 말했다.

    심협은 구범청련의 정보를 이렇게 쉽게 듣게 되자 조금 당황했다.

    “백 년에 몇 송이만 핀다고요? 그런 정보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구범청련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언제입니까? 어디서 나타났죠?”

    심협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지난번에 구범청련이 나타났을 때라면…… 소인이 나성성에 도착했을 때니까 아마 90년…… 96년 전입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몇 송이의 구범청련을 얻기 위해 홍석도(紅石島) 부근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었다는 것만 기억이 납니다.”

    노인은 눈치가 빨라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범청련에 대해 몇 가지 더 물은 후 상점을 나왔다.

    “흔한 상점 주인마저 알 정도로 구범청련이 나성군도에서 유명한 것인 줄은 몰랐군요. 찾는 게 어렵지는 않겠습니다.”

    원구가 흥분한 말투로 말했다. 심협이 구범청련을 찾아야 자신도 약선집 반 권을 볼 수 있으니 당연히 그도 심협 못지않게 혈안이 돼 있었다. 그는 본명고(本命蠱)로 몸을 제어하여 겨우 살아났지만, 경지는 더 이상 향상되지 않고 정체되어 있었다. 약선집은 고사(蠱師) 계통의 성전(聖典)이니 거기에서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거리에서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심협은 이내 규모가 조금 더 큰 상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서는 다시 다른 상점으로 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저녁 무렵, 심협은 성내 고위 수사들이 묵는 객잔으로 가서 방을 잡았다.

    방을 점검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그는 손을 휘둘렀고, 10여 개의 하얀 빛이 방 구석구석으로 날아가 하얀 금제를 만들어냈다.

    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협은 안도하며 가부좌를 틀었다. 허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구범청련에 관한 정보를 백방으로 알아봤다. 작은 상점들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청옥각, 백운거, 천화루도 찾아갔고, 적지 않은 선옥까지 썼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범청련의 내력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나성군도의 소문을 하나 듣게 되었다. 군도에는 사대상맹 외에 어느 신비한 문파가 있는데, 세력이 사대상맹보다 강해 구범청련은 이 신비한 문파에서 장악하고 있다가 백 년마다 몇 송이를 보내준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신비한 문파에 관한 정도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구범청련은 역시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군요. 사대상맹에게 물어봐야 할 모양입니다.”

    천책 공간 안, 원구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성군도에 오자는 것은 그의 제안이었다. 만약 구범청련을 찾지 못한다면 약선집을 볼 기회는 물론이고 체면까지 잃게 될 터였다.

    “이런 비밀은 중요하니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선옥을 준다고 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겠지.”

    백소천도 보랏빛 독무 연구를 멈추고는 원구를 찾아가 구범청련에 관해 의논했다.

    그의 경지는 출규 후기에 도달했으니 화생사에서 벌써 대승기로 돌파할 보조 수단을 준비해줬다. 하지만 빈틈없이 준비해야 했기에 구범청련 같은 보물에 그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갔다.

    “정 안 되면 사대상맹의 장로를 잡아다가 여기로 데리고 와서 심문을 해보시면 어떻습니까? 심 도우의 동술과 내 고술이면 충분할 겁니다.”

    원구의 눈에 흉악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백소천은 멍하니 그런 원구를 바라봤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역시 요마들과 보타산에 쳐들어온 마두답군.’

    “그건 안 됩니다. 나성성은 절대 얕볼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초행길이니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며칠 더 찾아보죠.”

    심협이 서둘러 말했다.

    사실 원구도 답답해서 해본 말이었지 정말로 사람을 잡아올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금 더 의논한 뒤에야 끝내고는 각자 할 일을 했다.

    심협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치고는 두 눈을 감고 정양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보상선사, 민씨 청년 등의 저물법기를 꺼냈다. 며칠간 서둘러 오느라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 시간이 났으니 한 번 살펴볼 생각이었다.

    이어서 견씨 등 다섯 명의 저물법기도 살펴봤다.

    다섯 명은 산수였기에 재력이 빈약해 값 나가는 건 없었다.

    고는 고개를 젓고는 보상선사와 민씨 청년의 저물법기를 들어서 신식을 주입하고 난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내력이 평범하지 않으니 저물법기에 담긴 물건도 풍성했다. 선옥은 수천 개에 달했고, 몇 개의 괜찮은 법보와 수많은 진귀한 재료가 있었다.

    그러던 중 심협의 눈이 갑자기 번득였다.

    “봉황미(鳳凰尾)!”

    보상선사의 저물법기에는 화홍색 영목이 있었다. 생김새가 봉황 꼬리처럼 생겨서 봉황미라 불리는 것으로, 자뇌화, 월성자(月星子)와 함께 곤토인뇌부의 세 가지 주재료 중 하나였다.

    이전에 보타산 조음동에서 자뇌화를 얻었는데 오늘 봉황미까지 얻었으니 월성자와 몇 가지 보조 재료만 구하면 곤토인뇌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곤토인뇌부는 위선부(僞仙符)로, 그 위력이 강력했다. 꿈속 옥호족에서 읽었던 기록에 따르면, 진선 수사의 일격과 맞먹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그에게는 비장의 중보(重寶)가 되어줄 것이다.

    심협은 기뻐하며 봉황미를 챙기고는 계속 살펴봤다.

    민씨 공자의 저물법기에서 주먹만 한 진주를 발견한 그는 흠칫 놀랐다. 이 진주는 옅은 보라색이었고, 재질은 옥과 비슷했는데, 영력 파동이 심상치 않았다.

    민씨 청년이 저물법기 가장 아래에 숨겨놓고 이를 몇 장의 부적으로 봉인까지 해놓은 것으로 보아 이 진주는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 분명해 보였다.

    “법보인가?”

    법력을 주입하자 진주에서 옅은 보랏빛이 흘러나왔다. 이외에 다른 건 없었다.

    그는 보랏빛을 살펴봤지만 아무런 특별한 효과도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진주 안쪽을 향했다.

    “이것은……?”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진주 안쪽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는 법력을 더 주입했고, 현음미동을 운공했다. 그러자 두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만독(萬毒)? 독 진주인가?”

    해저 동굴에서 보았던 보랏빛 독무가 떠오른 그는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면 해독용 법보?”

    심협은 중얼거리며 손을 뒤집어 진주를 천책 공간에 넣었다.

    그곳에는 보랏빛 독무가 떠다니고 있었지만, 공간의 금빛에 갇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만독 진주가 보랏빛 독무와 닿은 순간, 우웅 하며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진주의 보랏빛이 열 배는 강해졌고, 반경 반 장(약 1.5미터)에 빛무리가 생겨났다.

    이 빛무리에 닿은 독무는 마치 상극을 만난 것처럼 빠르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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