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뇌겁 (1)
순식간에 사흘이 지났다.
동굴 밖 검은 옷의 남자는 미동도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장벽’ 밖에 서 있었다.
백령은 속박당하지 않았지만, 숨도 크게 못 쉬었고 어떻게 해서든 도망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돌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 따위는 한 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백령은 심협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심협이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그가 나오지 않으면 저 잔인무도한 자가 화풀이로 자기를 죽여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그자를 너무 높게 평가했나? 이미 안에서 죽은 모양인데?”
검은 옷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고는 백령을 돌아봤다. 계속 기다릴지 말지 망설이는 듯했다.
백령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가 쭈뼛 섰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검은 옷의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백령에게로 다가왔다. 백령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놀라서인지 도망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몸은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보더니 내려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백령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얼굴 앞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지만, 너무 큰 두려움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때였다. 고목 저편의 구멍에서 갑자기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강력한 영력 파동이 안에서 세차게 솟아 나왔다. 그러자 그 영역이 한바탕 흔들리더니 이어서 수많은 금빛이 다시 떠올랐다.
검은 옷의 남자는 백령의 이마 일 척 앞에서 손을 멈췄다. 그러더니 그 손으로 백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죽지 않았음에 감사해라. 안 그랬으면…… 네가 존재할 이유가 사라졌을 테니 말이다.”
남자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더니 손을 거두고는 몸을 돌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심협을 기다렸다.
죽다 살아난 백령은 혼비백산했고, 울먹이며 마음속으로 심협이 꼭 살아 있기를 빌었다.
* * *
동굴 안. 심협은 양손을 모은 채, 벽화 속 손오공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환영들은 이미 전부 사라진 후였다.
심협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에서 솟아오르는 법력 파동의 여운이 아직 다 가시지도 않은 것을 느끼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손에 가볍게 힘을 주니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팔 근육을 타고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고, 온몸에서 폭발할 듯한 힘이 느껴졌다.
“황정경이 칠십이변으로 변하면서 술법의 변화만 생긴 건 아닌가보군. 육신이 훨씬 강해졌어. 지금이라면 삼성멸마 신통의 위력도 더 강해졌을 것 같군.”
심협은 몸의 변화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때, 마주 보고 있던 석벽의 손오공 벽화에서 갑자기 빛이 흐르더니 두 눈에서 푸른 빛이 날아왔다. 빛의 환영은 두 개의 매우 복잡한 금제 주문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심협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는데, 푸른 빛의 주문이 갑자기 번득이더니 사라졌다.
이어 벽화에 새겨져 있던 눈이 갑자기 움직이더니 그 위를 덮고 있던 돌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두 개의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건……?”
갑자기 느껴지는 강렬한 영력 파동에 심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였다. 두 개의 붉은색 구슬이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심협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속도도 매우 빨라서 잔상이 남을 정도였고, 심협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대로 그의 두 눈을 뚫고 들어갔다.
“크아악!”
심협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두 눈동자에서 강렬한 통증과 불타오르는 느낌이 몰려와 도저히 이를 악물어도 비명이 새어나왔다.
시선이 흐려져 심협은 무의식중에 손등으로 눈을 비비려 했다. 그러나 손이 얼굴에 닿는 순간, 두 눈의 통증은 한층 커졌고, 심지어 손등도 화상을 입은 듯 후끈거렸다. 눈동자가 정말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심협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내며 서둘러 수증기를 모아 두 눈에 물을 뿌렸다.
치익!
수증기가 뭉글뭉글 솟았지만, 이 정도로는 눈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다.
심협은 두 눈이 불에 타서 뚫릴까 서둘러 대개박술을 시전했고, 그러자 두 눈의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손으로 더듬어보니 이미 불꽃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럼에도 두 눈의 통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심협은 전력으로 대개박술을 운공하여 치료를 이어갔다.
한데, 법력이 두 눈에 흘러들어가는 순간, 눈동자에서 강렬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눈동자에는 금색, 홍색의 두 빛이 응집되어 있었고, 점점 두 개의 거대한 영력 소용돌이로 변해갔다.
영력의 소용돌이는 만들어지는 순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주변의 천지영기가 혼란스러워지더니 빨려 들어왔다.
심협의 두 눈은 매우 무거운 느낌이 들었고, 강력한 중압감에 머리까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두 눈의 뜨거운 느낌은 점차 사라지면서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 퍼져 나갔다.
두 눈으로 빨려 들어온 천지영기도 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경맥을 타고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온몸에 힘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경지를 돌파할 순간이 다가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눈꺼풀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아서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드러난 두 눈동자는 매우 신비로웠다. 두 눈동자 주변에는 금빛 무늬가 생겨났고, 본래 하얗던 부분은 마치 피에 물든 것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심협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별다른 점은 없었다. 그저 눈앞이 암홍색으로 덮여 있어서 사물이 흐리게 보였다.
그는 눈을 몇 번 힘껏 깜빡였고, 대개박술로 눈가를 치료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의 핏빛이 모두 사라졌지만, 눈동자 주변에 떠오른 금색 무늬는 남아 있었다.
그때, 심협은 갑자기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금빛으로 빛났고 시선은 그대로 머리 위의 두꺼운 암벽을 뚫고 지나가 산 위의 허공에 몰려드는 구름이 보였다.
“뇌겁!”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태을 경지에 들어서는 것에 관해서는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진선의 경지에 들어갈 때처럼 뇌겁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격차는 엄청났다.
또한 일단 진선 경지에 들어선 뒤로는 수련 경지마다 중요시하는 게 달랐다.
태을 경지는 주로 신체와 정신을 수련하여 깨끗하고 유리 같은 몸을 추구한다. 그래서 뇌겁에서도 뇌전들은 신체와 정신에 깊게 파고들어 뼈와 장기를 공격한다.
인간의 몸은 오장육부가 나무뿌리 같고, 뼈는 가지, 혈맥은 잎맥과 잎사귀 같다. 신체와 정신을 수련하는 것은 금지옥엽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몸의 뼈를 금처럼 담금질하고, 혈육(血肉)은 옥처럼 담금질하여야 비로소 유리처럼 깨끗해진다는 의미다.
이 관문을 견뎌내고 태을 경지에 오르면 수행자의 신체와 정신은 어지간한 법보보다 강해지고, 수련이 깊어지면 육진편 같은 법보로도 대항할 수 없게 된다.
조금의 불순물도 없이 육체가 완벽하게 순수해지면 더 나아가 천존의 경지까지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태을 경지의 수사가 천존으로 돌파하려면 ‘순수’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설령 수련하는 자가 귀도(鬼道)를 걷더라도 신체와 정신이 순음(純陰), 순살(純煞)의 일정 정도가 되면 마찬가지로 한계를 돌파하고 귀도 천존이 될 가능성이 있다.
천존 경지로 돌파하려고 할 때, 자신의 심마(心魔)가 변하여 만들어진 천마(天魔)의 침투를 받게 되기에 이 관문은 수선의 길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험난한 관문이다.
이는 수련하는 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천마의 근원은 바로 수행자의 심경에 남은 결핍이다. 이를 견뎌내지 못하면 천마의 침투로 인해 천년 수련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대신 완전히 이겨내면 자신의 가장 큰 결핍을 극복하고 심경을 완벽하게 회복해 천존 경지에 진입하여 수명의 질곡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시는 삼재(三災)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다.
전설의 대천존(大天尊) 경지는 천도의 순환과 관련이 있다. 수천수만의 인과(因果)와 관계를 지나 더욱 험난한 과정과 시련을 거치고 공덕을 쌓아 세상에 새로운 수련의 길을 열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홍몽(鴻蒙)이 처음 이룬 이래로 이 경지에 도달한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심협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오지산의 무너진 산봉우리 정상에 이르러 가부좌를 틀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몰려왔는데, 마치 무언가가 인간계로 내려오기 위해 통로를 연 것처럼 가운데가 비어 있는 둥근 고리 모양이었다.
심협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진선기의 뇌겁 때처럼 허공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천도 연화도 이전처럼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늘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기운은 더욱 고풍스럽고 웅장하게 느껴졌다.
우르릉!
억눌린 듯한 천둥소리가 하늘 깊은 곳에서 들려오자 공간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구름의 통로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더니 이윽고 강력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빛은 내려올수록 점점 더 밝아졌다.
불과 몇 호흡 뒤, 심협의 눈에 통로 전체를 붉게 채운 적홍색의 커다란 불덩이가 굵은 금빛 번개를 두른 채 머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백 장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뜨거운 기운이 덮쳐왔다. 심협은 두 눈이 굳은 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육진편이 나타났다.
“가라!”
심협은 가볍게 외치고는 황정경공법을 운공했다. 금룡의 환영이 팔을 타고 꿈틀거리며 날아가 육진편을 감쌌다. 그러자 육진편에서는 용의 포효가 들려왔고, 순식간에 수십 배나 커져 붉은 불꽃과 금빛 번개를 향해 날아갔다.
퍼펑!
천지가 흔들리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육진편은 강철의 못처럼 거대한 불덩이에 꽂혔다. 육진편을 둘러싸고 있던 용의 환영은 포효와 함께 일고여덟 개의 환영으로 나뉘어 불덩이를 파고들었다.
더욱 강렬한 폭발음이 이어졌고, 붉은 불꽃과 금빛 번개가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유성이 되어 비처럼 쏟아졌다.
불덩이가 온 하늘을 가득 메우며 떨어져도 주변에서 흐르던 금빛 번개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서 쉬지 않고 심협을 두들겼다. 그러나 위력은 부족한 편이라 그다지 위협은 되지 않았다.
심협은 긴장을 풀지 않았고, 눈빛은 더욱 신중해졌다. 첫 뇌겁의 위세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이 뇌겁 뒤로 하늘은 조금씩 평온해졌지만, 뒤이어 다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을 두른 설백(雪白)의 번개가 빠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우르릉!
천둥소리는 점점 빨라졌고, 하얀 구름에 번개가 모여들면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높이가 백 장에 이르는 설백의 뇌운(雷雲) 기둥 네 개였다.
심협은 집중하여 자세히 관찰했다. 설백의 뇌운 기둥마다 무수히 많은 뇌운의 무늬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고, 꼭대기에는 악귀 같은 얼굴에 등에는 날개가 두 개 달린 흉신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네 개의 조각상은 서로 닮았지만 복장과 들고 있는 무기가 다 달랐다. 둘은 손에 사슬을 감고 있었고, 하나는 돌망치와 강철 끌을, 남은 하나는 어깨에 커다란 청동 북을 메고 있었다.
네 조각상이 모습을 모두 갖추자 네 개의 뇌운 기둥은 곧장 밑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