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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62화 (562/1,214)
  • 562화. 대강(大綱)

    동굴의 입구는 매우 좁았고, 양쪽의 석벽도 튀어나와 있어서 수시로 긁혔다. 하지만 열 걸음 정도 들어가니 동굴은 갑자기 넓어졌다.

    심협은 천천히 허리를 폈고, 신혼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계속 들어갔다.

    대략 열 걸음 정도 더 들어가니 저 앞에서 갑자기 빛이 비쳤다. 심협은 서둘러 통로의 출구로 향했다.

    눈앞에 거대한 산 중턱의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천장에 박힌 주먹만 한 하얀 구슬이 빛을 뿜어내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심협은 산 중턱 동굴 맞은편의 석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커다란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 위로 각종 꽃과 새, 물고기, 벌레, 짐승들이 교차하며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허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특별한 영수(靈獸)는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살펴봐도 특이한 점은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한 팔로 매달려 있는 원숭이를 향했을 때,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그리 크지도 않은 금발의 원숭이 같은 그 조각은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두 눈에서 영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심협의 눈이 원숭이의 눈동자로 향하자, 돌로 조각된 원숭이의 눈동자가 갑자기 홱 돌아오더니 그를 바라봤다.

    심협과 돌원숭이의 눈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원숭이의 두 눈이 갑자기 번득였고, 동시에 두 눈동자에서 각각 금색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처럼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와 사방을 비췄다.

    심협은 의아했지만, 특별히 위협적인 움직임은 없었기에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금빛이 점점 퍼지면서 돌원숭이의 회색 몸이 색깔을 입힌 것처럼 조금씩 금색으로 물들었고, 점차 생동감을 더해갔다.

    그때였다.

    끼익!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쪽 팔로 나무에 매달려 있던 금발 원숭이가 몸을 흔들고는 그대로 석벽을 뚫고 나와 심협에게로 달려들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심협은 당황하지 않고 법력을 운공하여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과 닿는 순간, 원숭이는 금빛으로 변하여 그의 체내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단전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이어서 그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단전 안의 법력이 스스로 움직였고, 모든 임맥(任脈)을 휘돌아 혈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열기가 느껴졌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이에 침착함을 되찾은 심협은 서둘러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법력을 단전으로 인도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방금 전까지 완혈(剜穴)에 흐르던 법력이 반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의 통제에 저항했다.

    “큭!”

    심협은 가슴을 찌르는 극심한 통증에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했다.

    “어떻게 된 거지?”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다가 망설이던 끝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직접 법력을 조절하지 않고, 마치 구경꾼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법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잠시 들여다본 심협은 이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떴다.

    “이 흐름은…… 황정경공법의 순서잖아!”

    심협은 당황했지만, 곧장 다시 두 손을 결인하여 속으로 일흔두 구절의 황정경 구결을 읊었다.

    그러자 몸에 흐르던 법력도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여서 그의 몸 구석구석을 흐르기 시작했다.

    법력은 이내 일주천을 마쳤고, 다시 단전으로 돌아갔다.

    “끝인가?”

    심협은 자기 몸을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전에 두 번이나 저런 벽화를 본 적이 있는데, 매번 엄청난 기연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런 일도 없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다시 황정경공법을 운공하고는 두 눈으로 동굴의 석벽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석벽을 향했을 때, 방금 전까지 한쪽 팔로 매달려 있다가 지금은 사라진 원숭이 조각상 옆에 있는 늑대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이어서 늑대의 온몸으로 금빛이 퍼지더니 석벽에서 튀어나와 심협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심협도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고, 늑대가 자기 몸으로 들어오도록 내버려뒀다. 그러자 다시 법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석벽의 다른 동물로 향했다.

    잠시 후, 짐승들은 모두 금빛으로 변했고, 하나둘 석벽에서 튀어나와 심협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단전 안의 법력은 전신의 경맥을 흐르고 있었고, 온몸의 경맥이 전부 금빛으로 번득여 지금 심협의 몸은 마치 옥석(玉石)처럼 빛났다. 따지자면 그의 몸은 태양 아래 녹음을 빚어내는 잎사귀 같았고, 모든 경맥은 나뭇잎의 맥락 같아서 고서에서 말한 득도한 선인인 금지옥엽(金枝玉葉) 형상 같았다.

    하지만 심협은 자신의 상황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점점 더 많은 벽화의 동물들이 그의 체내로 들어왔고, 그의 식해는 충격을 받아 신식이 자기도 모르게 방출됐다.

    이때, 그의 눈에서 눈부신 하얀 빛이 반짝였고, 심협은 공령(空靈)의 경지에 들어갔다.

    그의 주변, 동굴의 석벽, 천장의 거미줄과 벽화와 만물이 일제히 빛을 잃었고, 점점 사라지면서 천지는 텅 비어버려 마치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심협 홀로 새하얀 천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선가 ‘끼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발 원숭이가 갑자기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더니 마치 나무를 잡은 것처럼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심협은 금발 원숭이를 보고는 내심 놀랐다. 원숭이의 몸은 마치 법력의 흐름처럼 금발이 차례대로 이어지면서 경맥이 되었고, 요혈이 하나둘 밝아지고 있었다.

    이어서 한 마리 청록색 공작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와서 그의 앞에 내려왔다. 기다란 공작의 꼬리가 마치 빗자루처럼 땅에 쓸렸다.

    심협의 시선이 향하자 공작의 몸에서도 경맥의 흐름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가 놀라기도 전에 허공에서 잠자리가 물살을 가르는 것처럼 파문이 일어나더니 살찐 붉은 잉어가 헤엄쳤는데, 역시나 경맥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세상 만물이 모두 수련하는 건 아니지만, 각각의 영기 흐름을 가지고 있구나. 이것이야말로 천도가 모든 만물에 강림하여 만물과 어울리는 진상이 아닌가!

    심협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그 순간, 황정경의 공법이 다시 두 배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각종 짐승과 물고기, 곤충들도 더 빠른 속도로 눈앞의 새하얀 공간에 나타났다.

    그 뒤로는 들풀, 나무, 덩굴, 화초 등이 하나둘 나타났고, 원래 텅 비어서 적막하던 공간이 각종 사물로 채워지면서 점차 비좁아졌다.

    이와 반대로 석벽에 조각되어 있던 각종 사물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쿵!

    동굴에서 굉음이 울렸다.

    심협은 두 눈을 번쩍 떴고, 두 눈에서는 한동안 금빛이 실체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그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방금 그가 봤던 모든 사물이 비쳤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상만물(觀想萬物)을 완성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심협은 탁한 숨결을 천천히 내뱉었다. 두 눈에 생겨난 이상도 천천히 사라졌다. 허나 수련을 끝냈을 때 드는 상쾌함과 달리 몸이 무거웠고, 피곤했다. 마치 위에 온갖 음식을 한꺼번에 욱여넣어 전부 소화하지 못하여 견디기 힘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이마를 짚은 채 조용히 눈앞의 석벽을 바라봤다.

    맞은편의 석벽 전체는 희뿌연 연기로 덮여 있었고, 방금 봤던 만물생식(萬物生息)의 벽화는 이미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연기가 점점 사라지자 석벽에는 새로운 벽화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갑옷을 입은 10장 크기의 원숭이가 조각되어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몸 앞에 모은 그는 갑옷 외에도 가사(袈裟)를 걸친 상태였다. 두 다리 위에는 진해빈철곤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곤봉이 놓여 있었다.

    ‘제천…… 아니, 투전승불 손오공!’

    벽화 속의 투전승불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전설의 오만불손한 제천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보살의 모습이었다.

    심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석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때, 그의 귀에서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릉!

    이어서 엄숙한 목소리가 그의 식해에 울렸다.

    “만물지도, 궁극지변, 만물지법, 대행재연, 동출이명, 위지위현, 현지우현, 중묘지문(萬物之道, 窮極之變, 萬物之法, 大行在衍, 同出異名, 謂之爲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심협의 마음속에서는 마치 종이 울리는 듯했다. 족쇄가 풀린 듯 은연중에 현묘한 황홀감이 들었다.

    삽시간에 온몸의 경맥이 일제히 빛났고, 두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그가 봤던 모든 사물의 환영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면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속에서는 황정경공법이 다시 스스로 운공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지금 내 귓가에 울리는 말은 다른 게 아니라 황정경의 사라진 대강(大綱)이구나.”

    심협은 이전에 황정경을 수련할 때 놀라운 자질로 막힘없이 잘 익힌 바 있지만, 오늘처럼 머릿속에 불어넣는 듯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요점을 간략하게 명시한 대강편의 안내에 심협은 문득 황정경공법에 대한 전혀 다른 깨달음이 들었다.

    그는 심념과 함께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고, 황정경공법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천지영기가 끊임없이 모여들어 체내로 흘러들어왔다.

    영기가 주입되자 심협은 조금 놀랐다. 본래 느껴졌던 태을의 난관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이하게도 자신의 경지는 변함이 없어 여전히 진선 후기였다.

    “설마……?”

    잠시 생각해본 뒤에야 경지를 돌파할 때의 방해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가 황정경 대강을 얻었을 때 그 난관이 무언가에 뽑힌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는 태을 경지의 문턱이 더욱 높아졌음을 의미했다.

    이 일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잠깐 들었던 다른 생각을 거둔 그는 전심전력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다시 칠십이 구절의 구결을 읊조리자 전신의 모공이 일제히 열렸고, 천지영기가 응집되어 가느다란 실처럼 변하여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신식의 힘이 빠르게 증폭했고, 두 눈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초와 짐승들의 모습이 나타나 그의 주변을 감쌌다.

    심협은 반짝이는 눈으로 만물의 모습을 응시했다. 모공에서 천지영기가 응집된 실이 천천히 뽑혀 나오더니 허공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니는 만물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다음 순간, 심협의 몸에서 번득이던 빛이 줄어들었고, 온몸에서 뼈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빠르게 줄어들더니 빛 속에서 작고 깜찍한 검은 제비로 변했다.

    제비는 두 날개를 펼쳐서 날아올랐고, 몸에서 나온 가느다란 실이 한 그루의 해바라기와 이어지더니 그대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것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제비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 황금빛 해바라기로 변했다.

    천지영기가 쉬지 않고 만물을 몸속으로 끌어왔고 심협의 몸은 또 빛나면서 각종의 짐승과 식물들로 변했다.

    대도(大道)는 변한다. 변화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끝도 없이 변하여 돌고 돌아서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팔구변화(八九變化)는 무궁하다.

    이 순간, 심협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수련한 방촌산의 전승 공법 황정경은 다름이 아니라 사라진 대강편 팔구현공(八九玄功), 보제 선조가 친전 제자에게만 전수했다는 칠십이면 공법이었던 것이다!

    심협의 몸이 번득일 때마다 그의 몸에는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났고, 주변에서 떠다니던 만물의 모습도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이와 동시에 심협은 자신의 기운이 지금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고 방금까지 희미하던 난관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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