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61화 (561/1,214)
  • 561화. 영귤(靈橘)

    심협은 그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정말로 괴석에 나이테가 있었다. 단지 색이 너무 짙어서 가려져 있었기에 돌처럼 보였다.

    나무는 중간에 부러져 옆으로 떨어진 채였고, 아래에 검은 구멍이 드러났다.

    “바로 저 구멍이야.”

    백령은 흥분한 눈빛으로 동굴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심협은 서둘러 그녀를 붙잡고는 허공에 물방울을 만들어 앞으로 던졌다.

    곧장 날아간 물방울이 떨기나무 근처를 지났을 때 허공에서 갑자기 강력한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괴석 주변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이어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금빛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허공을 산산조각 내듯이 교차하면서 지나갔다.

    백령은 그 광경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심협이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리라.

    한편, 심협은 이 광경에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 작은 담비였던 그녀는 어떻게 들어갔던 걸까?

    “나는 정말 몰랐어.”

    심협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백령이 말했다.

    “네가 들어갔다 온 후로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지.”

    “그럼 우리…… 저기에 어떻게 들어가?”

    “우리가 아니라 나 혼자야. 네 육체는 너무 약해서 위험해.”

    백령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목 주변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금빛의 여운을 보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럼, 여기서 선배가 나오길 기다릴게.”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고 천천히 떨기나무로 다가가 손을 휘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심협은 신경이 곤두섰다. 보이지 않는 속박의 힘이 갑자기 사방에서 덮쳐왔고, 온 천지가 살기로 가득 찼다.

    시선을 집중해 보니 갑자기 가느다란 금빛이 반짝였다. 처음에는 금빛 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자세히 보니 매미 날개처럼 얇은 칼날들이었다.

    심협은 번개처럼 주변을 훑어보다가 금색의 칼날이 각기 다른 궤적으로 날아오는 것을 눈치채고는 경악했다. 바람조차 새지 않을 정도의 빼곡한 칼의 그물이었다.

    하지만 금빛 칼의 그물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에도 심협은 덤덤했다.

    칼끝에 막 베이기 직전, 심협이 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몸 앞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서책이 허공에 나타났다. 서책에서는 수많은 금빛이 뿜어져 나와서 사방을 뒤덮은 칼날을 전부 흡수해버렸다.

    백령은 이 광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배에게 저런 보물이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는 건 문제도 아니겠어. 그녀도 벽화를 보고 싶어 하니까.’

    그녀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앞에서 휙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흡수되어 비어버린 허공에 다시 수많은 금빛이 반짝였다. 그 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진 상태였다.

    금빛 칼날이 허공을 뒤덮자 심협 앞에서 서책이 다시 금빛을 뿜어내 전부 흡수했다.

    심협은 그 틈에 고목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천지의 금빛 칼날은 무궁무진한 것처럼 또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그 수는 배가 되었다.

    심협은 고작 몇 걸음 달렸을 뿐인데 주위에는 금빛 칼날이 빽빽했고, 이제 더는 서책의 빛만으로는 모두 흡수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심협은 한 손으로 천책을 밀어내며 다른 손으로는 진해빈철곤을 꺼냈다. 곧장 발천난봉을 시전하자 곤봉의 환영이 겹겹이 쌓여갔다.

    금빛 천책이 다시 한번 대량의 칼날을 흡수했고, 나머지는 진해빈철곤에 부서졌다.

    그러나 심협은 더 이상 속도를 높일 수 없었고, 천지 가득한 금빛 칼날은 점점 늘어나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그의 몸에는 갈수록 작은 상처들이 늘어갔다.

    거리는 불과 몇 장에 불과했지만, 심협에게는 첩첩산중이었다. 게다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보이지 않은 속박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일고여덟 개의 황금승에 온몸이 묶인 느낌이었다. 비록 법력을 흡수하지는 않았으나, 마치 만 장 높이의 거대한 산에 몸이 눌린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심협의 몸에는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났고, 옷은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다.

    심지어 숨 쉬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한 번 숨을 들이쉬면 마치 가느다란 칼날이 파고들어와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에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진해빈철곤을 휘두르는 한편 대개박술로 상처를 회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심협은 온몸이 피로 가득하여 이제 혈인(血人)에 가까웠다.

    밖에서 지켜보던 백령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차마 더는 못 보겠는지 시선을 돌렸다.

    마치 한 갑자는 될 것만 같은 지난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심협은 마침내 두 동강이 난 고목 아래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빈철곤으로 땅에 쓰러진 고목을 파헤쳤고, 검은 구멍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심협은 신식으로 조금 살펴본 후, 주저하지 않고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구멍이 하얗게 반짝이더니 그의 모습이 사라졌고, 동시에 금빛 칼날과 속박의 힘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두 사라졌다.

    백령은 텅 비어버린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심협이 나오길 기다렸다.

    한데 그때였다. 그녀의 머리 위 상공에 갑자기 균열이 생기더니 그림자가 내려와 순식간에 땅을 뒤덮었다.

    고개를 홱 치켜든 백령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그대로 그녀를 덮쳤다. 백령은 강력한 힘이 몸을 뒤덮자 그대로 땅에 엎어져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검은 빛의 기둥에서 누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검은 새털옷을 걸치고 있었고 볼은 앙상하여 각이 진 데다, 가냘픈 입술과 매부리코가 차가워 보이는 사내였다. 허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심협에게서 느껴지는 것보다 더 강렬했다.

    “너와 함께 들어온 인간족 꼬마는 어디 갔지?”

    그는 한 발로 백령의 얼굴을 밟고는 나무 동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드, 들어갔어.”

    남자는 몸을 돌려서 그곳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다가갔다.

    ‘들어가라, 제발 들어가라!’

    백령이 간절히 빌었지만, 사내는 무심하게도 ‘장벽’에 발을 내딛기 직전에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손을 흔들어서 검은 소도를 내던졌다.

    휙!

    검은 비도(飛刀)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속도가 줄어들었다. 천지에서는 강렬한 파동이 용솟음쳤는데, 심협이 들어갔을 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수백 개의 금빛 광선이 서로 교차하며 날아와 검은 비도를 순식간에 산산조각 냈다.

    조각 난 비도가 우수수 떨어지자 검은 옷의 남자의 얼굴에 살기가 드리웠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백령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놈이 저걸 뚫고 들어갔다고?”

    “진짜야. 진짜 들어갔어…….”

    백령은 서둘러 심협이 들어갔던 상황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오호, 그자에게 그런 보물이 있는 줄은 몰랐군. 재밌게 됐어.”

    남자는 처음에 놀랐지만 곧 얼굴에 기쁨으로 가득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백령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자책했지만,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걱정 마라. 아직은 널 살려두마.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느니 수주대토를 노리는 게 낫겠군. 그자가 나오는 때가 너희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이다.”

    검은 옷의 남자는 히죽거렸고, 백령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게 나을 뻔했어!’

    한편, 심협은 그 무렵 눈부신 빛을 지나 산림 지대에 나타났다.

    일전에 오지산을 찾아 헤매던 곳과 매우 비슷하여 경치는 상당히 낯익었다. 다른 점이라면 본래 낮은 웅덩이가 있던 곳에 백여 장 높이의 산이 서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 산꼭대기는 이미 무너져서 움푹 파여 있었지만, 여전히 반쯤 잘린 손가락처럼 우뚝 선 산봉우리들이 있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다섯 개로, 산봉우리 밑에는 땅속 파묻힌 ‘손바닥’이 보였다. 그 위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했다.

    멀리서 보니 손바닥 중앙에 세 갈래의 선명한 계곡이 보였는데, 마치 손금처럼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분명 오지산이었다!

    이를 본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부상도 아랑곳 않고 곧장 빠르게 달렸다.

    그가 산기슭 아래에 도착하자 손금마다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길들이 교차하는 중심이 바로 손바닥의 정중앙이었다.

    심협이 신식으로 주변을 살폈고, 특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천지영기가 극에 달해 바깥의 혼란스러움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그는 산 앞으로 다가가 길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다. 불상은 마른 몸에 자애로운 표정, 한 손에는 석장(錫杖), 한 손에는 발우를 받쳐 든 채 우직하게도 서 있었다.

    “설마…… 현장법사?”

    심협은 그 모습이 눈에 익어 재빨리 합장하여 예를 올린 후, 손바닥 중심을 향해 올라갔다.

    산길은 구불구불했지만 별다른 우여곡절은 없었기에 금세 산 중앙에 도착했다.

    산길은 이곳에서 끊겨 있었고, 앞에는 10장 크기의 네모난 석대(石臺)가 있었다. 석대 오른쪽에는 7척 높이의 붉은 귤나무가 있었고 그 위에는 향긋한 주홍색 열매가 네 개 맺혀 있었다.

    살짝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도 향기가 머릿속을 파고들어 영해가 맑아졌고, 온몸과 뼛속까지 영력이 파고든 듯 상쾌했다.

    자세히 보니 열매들은 작고 영롱한 것이 마치 주홍빛 등롱 같았다.

    “이게 백령이 먹었다는 영귤인가?”

    심협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는 손을 내밀어 가장 아래 열린 열매를 땄다.

    영귤은 의외로 무거웠고, 울퉁불퉁한 껍질에는 특별한 무늬가 가득하였으며, 짙은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심협은 머뭇거리다가 껍질도 벗기지 않고 그대로 크게 베어 물었다.

    귤껍질과 과육이 바로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달콤하면서도 떫은맛이 혀끝에 맴돌았고, 동시에 비할 바 없이 짙고 정순한 영기가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어서 서늘한 기운이 곧장 단전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영기가 단전의 법력과 합쳐지더니 갑자기 들끓었다.

    삽시간에 단전 안의 법력이 흘러나와 그의 육체 곳곳으로 흘렀고, 모든 경맥이 밝은 빛을 뿜어내면서 그의 피부가 붉게 빛났다.

    전신이 넘칠 듯한 기운으로 팽창했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심협은 남은 영귤을 내려놓고 곧장 가부좌 튼 채 법결을 결인하며 황정경 공법을 운기하여 묵묵히 토납을 했다.

    체내의 영력이 팽창해 온몸의 경맥이 터질 듯했으나, 영력의 운공은 다행히 양지를 걷는 것처럼 순탄했다.

    법력이 일주천을 하고 나자 수련 속도가 원래보다 훨씬 빨라졌다. 게다가 법력이 쉬지 않고 체내를 순환하자 온몸의 피가 법력의 충격에 극도로 흥분했다.

    잠시 후, 심협의 두 눈이 빛으로 번득였고, 신식은 비할 데 없이 뚜렷해졌다. 그는 자신의 근육이 영력을 흡수하는 것과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누더기가 된 옷 아래의 상처들은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고, 뼛속을 파고든 날카로운 기운도 끊임없이 흐르던 영력에 모두 씻겨나갔다.

    심협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온몸에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함이 느껴졌고, 심지어 태을 경지의 난관도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한참 뒤, 영귤의 모든 영력을 흡수하자 들끓는 흥분감도 점차 줄어들었다.

    “한 입을 먹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 효과를 보다니!”

    심협은 일어나 몸을 움직여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나무에 열려 있는 세 개의 영귤을 바라보더니 모두 따서 챙겼다. 이제 태을 경지를 돌파하는 것도 문제가 없을 듯하니 당장은 더 먹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더 먹어봐야 낭비가 될 가능성이 크니 남겨뒀다가 나중에 먹을 생각이었다.

    심협은 영귤 주변을 한 바퀴 돌았지만, 백령이 말한 벽화는 없었다. 그저 사람 키의 반쯤 되는 동굴이 보였는데, 어두워서 안은 보이지 않았다.

    “백령의 기억이 맞다면 이 안에 있겠지.”

    심협은 혼잣말을 하고는 허리를 굽혀 그 낮은 동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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