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60화 (560/1,214)
  • 560화. 무법(無法)의 땅

    “그럼…… 나도 데리고 나갈 수 있어?”

    소녀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고, 목소리도 한층 밝아졌다.

    “그건 네가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오느냐에 달렸지.”

    “내가 의식이 혼란스러웠을 때 당신을 공격했지? 그런 날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내 경맥을 정리해 이성을 찾게 해줬는데 어떻게 협조를 안 하겠어?”

    “이름이 뭐야?”

    “이름은…… 없어. 그런데 소희(小希)는 날 백령(白靈)이라고 불렀어.”

    소녀는 갑자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소희?”

    “소희는 양계진 글공부 서생의 딸이야. 나는 원래 그녀의 애완동물이었어. 그런데 영귤 하나를 잘못 먹고 영지가 생겼고, 어쩌다 수련을 시작하게 됐지. 백령은 그때 그녀가 지어준 이름이야.”

    “그젯밤 양계진에 쳐들어간 담비 요괴가 너야?”

    심협이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젯밤?”

    백령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사이 백령은 말없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 뒤 그녀는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소희가 노원외의 아들과 강제로 혼인한다고 해서 쳐들어갔던 일을 말하는 거야? 그거 오래전인데……. 그때 나는 수련에 성취를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습을 바꾸지도 못했어.”

    심협은 그때의 술자리를 떠올려봤으나, 손님들은 모두 즐거워하는 것이 강제로 혼인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됐는데…… 소희가 가마에 오르기 전에 울었던 건 그냥 ‘울며 시집가기’라는 그 마을 풍습이었대. 강제가 아니었더라고. 오히려 나를 보고 더 놀라서…….”

    백령은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얼마나 수련했지?”

    “그동안 의식이 흐릿해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대략 몇 백 년은 됐을 거야.”

    백령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

    “몇 백 년이라……. 그동안 여기를 떠난 적은?”

    “없어. 이곳의 천지영기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무법(無法)의 땅이 돼버리고 나서는 자유롭게 양계진의 패루를 드나들 수가 없었으니까.”

    백령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하자 심협의 궁금증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전에 어떻게 마을을 나갔는지는 본인도 모르지만,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백령을 따라온 것이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곳은 원래 오지산이 있었던 곳일 거야. 손오공이 벗어나면서 산이 무너지고 오행이 뒤엉켜 시간과 공간에 착오가 생기면서 복지동천(福地洞天)처럼 수많은 시간이 정체된 작은 세계가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거지. 그래서 그저께 밤에 나는 마을에서 네가 신부를 납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거고.”

    백령은 심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심협은 손을 저어서 백령의 몸에 있는 황금승을 거두었다.

    “고마워, 선배.”

    백령은 펄쩍 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였다. 온몸에 막힌 곳이 없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심협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선배는 이름이 뭐야?”

    “심협.”

    “심 선배는 왜 여기에 온 거야?”

    백령이 궁금한 듯 물었다.

    “나는 오지산을 찾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양계산이라고 하던데…….”

    “선배는 양계산에 가고 싶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심협이 내심 기대하며 되묻자 백령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렴풋이 기억은 나. 그때 영귤(靈橘)도 양계산에서 찾았거든. 나중에 산속에서 돌로 만든 벽화도 봤는데, 어떻게 한 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천지영기를 흡수했어.

    “벽화를 본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

    심협은 더욱 기대감이 커져 재촉했다.

    “워낙 오래 전이고 한 번밖에 가보지 않아서 제대로 기억할지 모르겠네.”

    백령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네 기억을 믿어봐. 그곳을 찾아주기만 하면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가줄게.”

    “진짜?”

    “물론이지.”

    백령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심협은 약속했다.

    “알겠어! 내가 데려다줄게.”

    백령이 가슴을 치며 답하더니 사방을 둘러봤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내가 그때 들어갔던 산이 여기랑 비슷해. 주변에 산이 보이지 않지만, 붉은 고목만 찾으면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어.”

    한참 두리번거리던 백령의 얼굴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붉은 고목?”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때 분명 붉은 고목 나무 아래 구멍으로 들어간 건 기억나. 지하 통로를 한참을 걸어나니까 양계산이 보였어.”

    “그럼 우선 찾아보자.”

    심협은 백령의 팔을 잡고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두 사람은 천 장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데 그때,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초원의 백 리 너머에 초원 전체를 옅은 오색 빛이 덮고 있었다. 초원에 있을 때는 그 빛의 존재를 전혀 몰랐는데, 하늘에서 보니 선명하게 보였다.

    심협은 그 오색 빛에서 붉은 고목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때? 뭐가 보여?”

    심협이 물어도 백령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말이 없다가 불쑥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게 눈에 익어.”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붉은 고목이 아니라 땅에 우뚝 솟은 검은색 괴석(怪石)이 있었다. 심협은 백령을 데리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이 내려가면서 허공에 있던 빛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심협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몸을 멈추기도 전에 전방 허공에 10장 높이의 석벽이 나타났다.

    꽝!

    두 사람은 석벽에 부딪혀 땅에 떨어졌다.

    “뭐야? 왜 갑자기 벽이 나타난 거지?”

    백령이 놀라서 투덜거렸으나, 심협은 말없이 서 있다가 다시 한번 백령을 데리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번에도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발아래, 초원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이 나타난 것이다.

    사막 곳곳에는 가파른 암벽이 있었는데 높이는 10장에서 100장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마찬가지로 한 겹의 오색 빛이 덮여 있었다.

    “다시 봐. 아까 본 그 괴석을 다시 찾을 수 있겠어?”

    심협이 묻자 백령은 신중한 눈으로 다시 한참을 살피더니 불쑥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자갈이 가득했고, 자세히 보니 아까 봤던 괴석이 있었다.

    “가자.”

    심협은 다시 괴석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두 사람은 곧 괴석 위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빛이 사라져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데 발이 땅에 닿자마자 발밑이 텅 비어버리더니 갑자기 물보라가 튀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물에 빠졌고, 검은 괴석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심협이 가볍게 팔을 흔들자 물살이 갑자기 용솟음쳤고, 그와 백령의 몸이 천천히 물 위로 떠올라 물 위에 섰다.

    수면은 점차 잠잠해졌다.

    다시 보자 우뚝 솟은 괴석은 물 위에 가만히 있어서 손에 닿을 것만 같았다.

    “위에!”

    백령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고, 심협은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머리 위에는 밝은 하늘이 아니라 백 리나 길게 이어진 돌로 가득한 사막이 보였다. 방금 봤던 그곳이었다.

    거꾸로 우뚝 솟은 듯한 사막의 산은 마치 칼끝처럼 뾰족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고, 발아래 수면에서도 위의 산들이 비쳐서 마치 이빨로 가득한 개의 입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음양이 뒤바뀌고 오행이 어지럽구나. 아무래도 오지산이 무너진 다음에 억지로 천지대진(天地大陣)을 개조한 것 같군. 도대체 누가? 설마 제천대성이……?”

    심협은 기이한 광경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백령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심 선배, 여기 좀 와봐!”

    심협은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평온했던 발아래의 물이 갑자기 붉게 물들더니 뜨거운 기운이 물밑에서 전해져 왔다.

    이어서 물이 끓어올랐고, 김이 피어오르더니 홍련(洪璉) 같은 불꽃이 호수 아래에서 치솟았다.

    심협은 바로 백령을 끌고 뛰어올라서 하늘에 떠 있는 사막으로 향했다.

    그중 한 산봉우리에 가까워지자 오색 빛이 만연해졌고, 천지가 갑자기 뒤집히면서 심협은 백령과 함께 산봉우리로 떨어졌다.

    두 사람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의 풍경이 다시 변했다. 대지에서 갑자기 울창한 숲이 튀어나오더니 빠르게 사막을 덮었고, 순식간에 생기발랄한 초록빛으로 변했다.

    쿵!

    하늘에서 울리는 굉음에 심협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은 마치 불타는 것처럼 붉게 변했고, 불덩이가 마치 불타는 유성처럼 하늘에서 비스듬히 떨어졌다.

    불덩이가 몰려오면서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졌고, 심협이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손을 휘두르자 허공의 수증기가 손을 따라와 머리 위에 푸른 물의 장막을 형성했다.

    하늘에 가득하던 불덩이가 물의 장막에 떨어지자 물보라가 일렁였다. 불이 식으면서 대량의 수증기가 솟아올라 짙은 안개가 하늘을 가렸다.

    다행히 불의 힘은 강하지 않아서 물에 장막에 닿자 모두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하늘에서 울리던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붉게 물든 하늘도 조금씩 사라졌다.

    소리가 전부 사라진 뒤, 심협은 손을 흔들어 물의 장막을 거둔 다음 하늘을 바라봤다. 물과 불의 이상한 현상은 전부 사라졌고 다시 푸른 하늘로 돌아왔다.

    “저번에 들어올 때도 이랬어?”

    “아니. 그때는 영지가 열리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랬다가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백령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다시 찾아보자.”

    심협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번에는 높게 올라가지는 않아 아까 오색 빛이 덮고 있는 현상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니 역시 검은 괴석이 우뚝 솟은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의 괴석은 숲속 가장 중앙의 산꼭대기에 있었다.

    “심 선배, 이번에는 뭔가 좀 달라.”

    백령이 날아오며 말했다.

    “어디가?”

    “이번에는 돌 주변에 빛이 없어.”

    백령이 한쪽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오색 빛이 보여?”

    심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선배도 그게 보이는 거 같아서 말하지 않았어.”

    심협이 놀라는 걸 보자 백령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심협은 그제야 백령의 눈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나 한참 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두 눈동자에 얇은 금색 무늬가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색 빛을 볼 수 있었던 거구나. 타고난 영동(靈瞳)이었어.”

    심협은 낮게 감탄했다. 벽화를 통해 영기를 흡수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영동을 보자 모든 것이 이해됐다.

    “영동?”

    “특별한 동력(瞳力)인데,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거나 혹은 특별한 술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렇구나.”

    백령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가보자.”

    심협은 백령의 손을 잡고 산으로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간 심협은 바로 괴석으로 다가가지 않고 백령에게 물어서 오색 빛이 없는 곳으로 내려갔다.

    산꼭대기에는 높은 나무는 없었고 작은 떨기나무 숲만 있었다. 떨기나무들은 괴석 십여 장 밖에서만 자라 있었다.

    둘 사이에는 마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어서 떨기나무가 그쪽으로 자라는 걸 막고 있는 듯했다.

    ‘장벽’ 안에는 돌이 선명하게 보였고, 평탄한 땅에는 우뚝 솟은 괴석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붉은 고목은 보이지 않았다.

    “저거야.”

    백령이 갑자기 말했다.

    “뭐?”

    “저 돌이 그 고목이야. 부러져서 아래 나무 통로도 막혀 있어.”

    백령이 괴석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