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59화 (559/1,214)

559화. 흰담비

심협은 천리 밖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는 몸을 멈추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고, 이내 멍해졌다. 발아래의 마을은 등불로 밝았고, 가운데 저택에서는 울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양계진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보자 여전히 저 멀리로 양계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진시천리지술을 시전했다. 양팔이 금은 빛으로 반짝였다.

그의 몸이 다시 떠올랐을 때, 발아래에 마을은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숲속 상공이었고, 여전히 양계산은 멀었다.

다시 산을 향해 날아가 보니 방향은 전과 달라졌지만, 거리는 그대로였다.

심협은 하늘을 날며 발아래를 자세히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아래로 불빛이 보였다. 양계진이었다.

‘방촌산보다도 악랄하군. 둔술로는 저곳에 갈 수 없는 모양이지? 이러다가 오지산을 찾기는커녕 이곳에 갇혀버리겠어.’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고는 조금씩 내려갔다. 마을에서 좀 떨어지진 곳이었는데, 땅에 발이 닿는 순간, 일전의 그 기이한 파동이 다시 한번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이미 패루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날아서 갈 수 없다면 둔지술은 어떨까?’

심협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둔지부를 꺼내 두 손가락에 끼고는 법력을 운공했다.

부적이 빛나면서 토황색이 심협의 몸을 감쌌고, 몸이 줄어들면서 순식간에 땅속으로 백여 장을 파고들었다.

그는 산이 있는 곳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땅속을 빠르게 달렸다.

수십 리 정도를 내달려 계산대로라면 산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거라 여길 때쯤 땅을 뚫고 나왔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떨어졌다. 심협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게 무슨……?’

심협은 눈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태양이 높이 걸려 있었고, 날도 밝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벌써 날이 밝은 거지?’

의아해하던 심협은 또 하나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주변 천지영기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서둘러 신식을 운공하여 주변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심협은 하늘로 날아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평원 산지와 중간에 있는 호수뿐이었다. 양계산도, 양계진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음, 어젯밤에 봤던 모든 것은 황량몽이었나?’

심협은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한동안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심협은 소매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옷에는 어제 묻은 술기운이 확실히 남아 있었고, 저물법기에서는 5백여 년 된 인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협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수색했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그는 기억을 더듬어 다시 어젯밤의 그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전히 울창하고 수풀이 우겨져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단지 어떤 상황에서 다시 나타나는 건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심협은 굵은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가부좌 틀었고, 어젯밤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다른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양계진은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됐다, 우선 지켜보는 수밖에…….’

심협은 한숨을 쉬고는 두 눈을 감고 수련을 시작했다.

* * *

한밤중. 심협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주변에는 벌레 우는 소리조차 없었다.

신식으로 주변을 탐색한 심협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나타났다. 무언가를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천지영기가 또다시 혼란스러워져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협은 곧바로 날아올라 아래쪽 숲속을 샅샅이 훑었고, 이내 미간을 구겼다.

숲속은 캄캄하여 근방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한 광경이었다.

심협은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을 번득이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땅에 내려선 그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얼룩지고 오래된 돌로 만든 패루를 바라봤다. 허름한 모습은 세월의 침식을 받은 흔적이었다.

패루에 적혀 있는 글씨는 희미해져서 ‘양계’ 두 글자만 겨우 보였다.

심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수많은 의혹을 품고 그는 패루 안으로 들어섰고, 바로 뒤를 돌아봤다. 패루는 역시나 벌써 10장 밖에 있었다.

그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며 양쪽에 있는 두 가게를 바라봤다. 담장은 부서지고 새까만 담장만 남아 있었으며, 나무 기둥은 전부 썩은 후였다.

심협은 어젯밤의 기억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이내 노원외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나마 기품 있던 저택도 완전히 허물어졌고, 정원에는 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양계진이 수백 년이 지나간 모습으로 변한 것인가!’

심협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나 그를 뒤덮었다.

심협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재빨리 피했고, 몸을 돌려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집채만 한 흰담비였다. 이 담비의 온몸은 눈처럼 하얬지만, 두 눈은 매서운 핏빛으로 반짝였다.

심협은 어젯밤 잡부가 말한 요괴가 생각났다.

‘이 천지개벽한 변화를 일으킨 주범이 바로 이 요괴인가?’

그는 육진편을 꺼냈다. 비단 같은 털의 담비 요괴는 그가 무기를 꺼내는 걸 보자 눈빛이 더욱 험악해지더니 거대한 손톱을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흰담비 요괴가 차갑게 반짝이는 거대한 손톱을 휘두르자 다섯 개의 날카로운 칼날이 심협에게로 떨어졌다.

심협의 손에서 육진편이 춤을 추며 강력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손톱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흰담비 요괴의 거대한 몸은 뒤로 날아갔고, 신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흰담비 요괴의 경지는 예상보다 너무도 약해 심협은 얼떨떨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요괴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처를 입은 흰담비 요괴는 온몸을 번득이더니 그대로 땅속으로 들어갔다.

“도망가려고?”

심협은 차갑게 웃고는 둔지부를 바스러뜨려 땅속으로 쫓아 들어갔다.

땅속. 흰담비의 몸은 급격히 작아져서 손바닥만 했고, 몸을 둘러싼 나선형의 하얀 빛이 쉬지 않고 땅을 파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협은 전력을 다해 흰담비 요괴를 쫓았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심협은 서두르지 않았다. 흰담비 요괴는 이미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으니 잠깐은 도망칠 수 있어도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

예상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흰담비 요괴의 속도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도망가지 못한다!”

심협은 차갑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황금승이 민첩한 뱀처럼 날아가 올가미처럼 둥글게 말리며 흰담비 요괴를 포박하려 했다.

그 순간, 흰담비 요괴의 두 눈에서 핏빛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갑자기 속도가 한참 빨라져 그대로 황금승의 올가미를 빠져나갔다.

황금승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흰담비의 꼬리를 묶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흰담비 요괴는 법력의 절반을 황금승에 흡수당했다.

심협은 황금승을 잡아당겨 흰담비 요괴를 포획하려 했다.

그때였다.

흰담비 요괴의 빨간 눈에 갑자기 금빛이 반짝이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폭발했는지 갑자기 다시 빠르게 달려 황금승의 속박에서 거의 벗어났다. 동시에 허공에서는 기묘한 파동이 일어났다.

심협의 눈앞에서 흰담비 요괴는 하얀 빛의 장막으로 달려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던 심협은 힘껏 내달려 빛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빛의 장막을 지나는 순간, 심협은 마치 거대한 힘에 온몸을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신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멍해져 하마터면 의식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 제때 정신을 차리고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중심을 잡고 선 심협이 뒤를 돌아보니 허공의 빛의 장막은 몇 번 깜빡거리더니 점차 눈앞에서 사라졌다.

손을 들어서 만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는 조금 전까지의 숲이 사라지고 대신 광활한 초원이 있었다. 무성한 초원에 차가운 달빛이 드리웠고,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심협은 흰담비가 숨었을 법한, 멀지 않은 풀숲으로 다가갔다.

허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반쯤 넋이 나가버렸다. 풀숲에는 하얀 치마를 입은, 앙증맞은 소녀가 있었던 것이다. 피부는 눈처럼 하얘 달빛마저 반사되었다. 하얀 머리카락은 몸만큼이나 길어서 폭포처럼 퍼져 그녀의 몸을 절반이나 가렸다.

심협은 잠든 그녀를 황금승으로 포박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소매에서 꺼낸 단약을 소녀의 입에 넣고는 법력을 운공했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소녀는 붉은 눈동자가 확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아름다운 얼굴이 험악하게 변하더니, 하얀 빛과 강력한 법력의 파동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녀가 몸부림치기도 전에 황금승이 번득이며 법력을 흡수해버렸다.

소녀는 이성이 없는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법력을 뿜어내며 발악했다. 물론 몇 번을 시도해도 법력은 대부분 황금승에 흡수당했고, 소녀는 기운이 빠졌는지 눈동자의 혈홍색 빛이 점차 어두워지며 얼굴도 창백해져갔다. 표정도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흐릿해진 눈빛으로 심협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야?”

소녀는 처음 말을 배운 어린아이처럼 힘겹게 몇 글자를 말했다. 그리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시 잠이 들었다.

심협의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손을 소녀의 이마에 대고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소녀는 경맥이 완전히 뚫리지 않았고, 몸 곳곳의 경맥이 맞닿는 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완전히 엉망이었다.

“온몸의 법력이 이리 엉망이니 발작하는 것도 당연하지. 경맥을 정리해주면 이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심협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고는 소녀 옆에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손을 흔들어서 황금승을 거두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서 단전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강둑을 무너트릴 기세로 법력을 소녀의 몸에 주입했다.

동시에 그는 대개복술을 시전했고, 그의 법력이 칼이 되어 소녀의 임맥으로 들어가 단전부터 시작해 요혈을 따라 조금씩 돌진하면서 어지러운 경맥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소녀는 미간을 찌푸렸고, 눈꺼풀이 조금씩 떨려왔다. 그녀가 깨어날 듯하자 심협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미간을 찍었다. 그러자 한 점 빛이 미간으로 들어갔고, 소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심협은 손가락을 거두고 계속해서 경맥을 정리했다.

* * *

이튿날 아침. 가부좌 틀고 있는 심협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신음이 들렸다. 눈을 떠보니, 소녀가 이미 깨어나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소녀의 두 눈에 혈홍색 빛이 사라진 걸 확인한 심협이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지?”

“내가 묻고 싶은 거다. 넌 누구야!”

소녀는 심협의 목소리에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자 조금 안정되었으나, 여전히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반문했다.

심협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소녀가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날 고쳐준 거야?”

“몸의 경맥은 어쩌다 그런 거지?”

“이런 곳에서 수백 년 동안 수련하면 당신도 그렇게 될 걸?”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답했다.

“이곳의 혼란스러운 천지영기 때문인가?”

“당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거야?”

소녀는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눈에는 희망이 반짝였다.

“그래.”

심협은 숨기지 않았다.

“그럼…… 나도 데리고 나갈 수 있어?”

소녀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고, 목소리도 한층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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