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40화 (540/1,214)
  • 540화. 염마신의 정체

    “설마 그 일에 다른 내막이 있었습니까?”

    심협은 그런 흑곰 요괴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렇다. 목이는 인간족이기는 하나 현음혈맥(玄陰血脈)을 지니고 있었던 게야. 그의 아비도 그랬고……. 듣기로는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혈맥이라고 하더구나.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다면 그 혈맥이 다행스럽게도 여인의 원음지력(*元陰之力: 몸의 근본 되는 음기의 힘, 원양‘元陽’과 상호의존적인 관계)을 강화시키고 천고의 자질이 될 수 있다.

    허나 이 혈맥의 힘은 사내의 양기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사내가 이 혈맥을 지니고 태어나면 조화시킬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성년이 될 때까지 살기 어렵지.”

    “현음혈맥이라…….”

    심협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일부 고서에서 그 맥에 대한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흑곰 요괴의 설명대로였다.

    “목이의 아비는 본문의 외문 집사로 약간의 경지를 지닌 터라, 목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몸속에 있는 음맥의 반서를 제압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아비의 경지가 얕았고, 몇 년을 연이어 법술을 운공한 탓에 결국은 자신이 지닌 음맥의 반서를 불러일으키게 된 게야. 목이는 아비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예를 훔쳐 배운 게지.”

    흑곰 요괴가 말했다.

    “효를 다하기 위함이었겠군요. 허나 그는 왜 그 일을 종문에 알리고 광명정대하게 보타산에 들어가 기예를 익히지 않았을까요? 목이의 부친은 보타산의 집사이니 어쨌거나 귀종에서 보고만 있을 리 없지 않았겠습니까?”

    심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목(牧)가의 일은 이야기하자면 종문의 불찰이기도 하다. 목이의 아비는 오랜 세월 보타산을 위해 부지런히 애써왔지만, 외문 집사를 관리하는 감찰 장로는 이기적이고 간사한 자였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목씨 집안의 일을 덮어 놓았어. 그래서 목씨 부자가 여러 차례 알렸음에도 결국 소용이 없었던 게야. 때문에 목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기예를 훔쳐 익힌 게지.”

    흑곰 요괴의 안색은 어두웠다.

    “어떤 문파든지 제자들 사이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뒤섞여 있는 법이지요. 한데 그 뒤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심협이 계속해서 물었다.

    “청월장문도 그런 사실을 알고 절로 측은지심이 생겨 두 사람을 종문으로 데리고 돌아와 가벼운 벌을 내리려고 했어. 한데 그때 한 무리의 요마들이 갑자기 나타나 청월장문과 여러 장로들을 습격했어. 그 요마들은 실력이 막강했고, 인간족 수사들의 법력을 억제하는 힘이 있어 수행하던 장로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오직 청월장문과 황동진인만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지. 그때 쇄금린이 나타나 요족 무리를 붙잡아둔 덕에 청월장문과 황동진인은 탈출할 수 있었어. 허나 쇄금린은 그 요마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흑곰 요괴가 말을 이었다.

    “그럼 목이는요?”

    “목이의 경지는 미약해서 처음 청월장문 등과 맞붙어 사울 때 상처를 입고 혼절한 상태였으니, 아마 요마들의 손에 죽었겠지.”

    흑곰 요괴의 말에 심협은 눈빛을 반짝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월장문은 종문으로 돌아온 뒤 줄곧 울적해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몇 달 뒤 갑자기 내린 삼재대겁을 버텨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어. 그리고 청련선자가 장문의 자리를 이어받았지. 쇄금린이 전임 장문의 죽음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청련 장문은 문하의 제자들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엄히 금했고 말이야.”

    흑곰 요괴가 말했다.

    “그리 된 일이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법 선배님.”

    심협은 설명을 다 듣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가 그 일은 알아서 무얼 하려는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영동구천 비술의 지속시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계책이 있다면 서둘러야 할 게야.”

    흑곰 요괴는 지친 얼굴로 가부좌를 튼 채 숨을 약간 몰아쉬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호법 선배님께서는 마음 놓고 푹 쉬십시오.”

    심협은 이런 흑곰 요괴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재빨리 말했다.

    “누이, 이따가 버드나무 가지를 잠시 빌려다오.”

    고개를 돌려 섭채주에게 말한 후, 그의 몸이 무너져 내리면서 무수한 금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 * *

    심협이 허공에 선 채 지그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그의 앞에 있던 자금령은 곧 백배나 커져 거대한 고리로 변했고, 그 위의 세 방울에서 붉은 화염과, 누르스름한 폭풍, 오색영연이 뿜어져 나와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염마신을 덮쳤다.

    뇌부천장의 화신인 뇌룡은 염마신을 휘감고 빠르게 날며 쉼 없이 거대한 번개 덩어리를 내뿜었다. 이 번개들은 빗발치듯 염마신을 두들겼다.

    그러나 염마신은 미간에 핏빛 뼛조각이 나타난 뒤로 경지가 크게 높아져, 손발을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자금령과 뇌부천장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심협이 뇌부천장에게 손을 들어 보이자 빗발치던 번개 공격이 뚝 그쳤다.

    이어서 자신도 결인하여 자금령을 가리켜 공격을 멈추고는 손을 뒤집어 물건 하나를 꺼냈다. 바로 버드나무 가지였다.

    “버드나무 가지…… 내놔!”

    버드나무 가지를 본 염마신은 핏빛 눈동자를 다시 번뜩이며 외치니, 거대한 몸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가 다음 순간 심협 앞으로 날아와 거대한 마장을 뻗었다.

    그러나 심협은 이미 몸에 녹색빛을 반짝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고, 다음 순간 염마신 뒤에 나타났다.

    염마신은 휙 돌아서더니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위 도우…… 아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귀하의 본명은 목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요.”

    심협이 담담하게 입을 연 순간, 염마신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뻘건 두 눈에는 놀라움이 묻어났다.

    “보아하니 나의 짐작이 틀림없나봅니다. 귀하가 이토록 이 버드나무 가지에 집착하는 까닭은, 옥정병과 짝을 맞춰 누군가를 되살리려는 것일 테고요. 내 다시 한번 추측해보겠습니다. 도우가 살리려는 존재는 쇄금린. 그렇지 않소?”

    심협이 말을 이었다.

    “너는 누구냐? 어찌 그 일을 아는 것이냐?”

    염마신의 표정에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고, 버드나무 가지를 빼앗으려 달려드는 것마저 잊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소. 귀하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심협은 옅은 미소를 내건 채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세 치 혀로 나를 동요시킬 작정이라면, 듣고 싶지 않다!”

    염마신은 차갑게 내뱉더니,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다시 분노가 이성을 억누르려는 조짐이 보였다.

    “다른 뜻은 없소. 그저 여러 우연으로 인해 내 마족들과 여러 차례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인간의 욕망을 건드려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곤 하지요. 내 서역에서 이미 그런 피해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귀하와 그이의 느낌이 흡사합니다.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르겠으나, 충고하건대 마족들에게 속아 그들의 바둑알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심협은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말에 염마신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 * *

    끝없는 어둠의 공간. 새빨간 빛 덩어리는 여전히 허공에 뜬 채 반짝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염마신과 심협의 모습이 보였고, 두 사람의 대화도 들려왔다.

    거대한 그림자의 커다란 핏빛 두 눈이 살짝 굳어지면서 그림자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한 줄기 핏빛이 거대한 눈에서 뿜어져 나와 손가락을 휙 긋고 지나갔고, 자흑색 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결인하자 자흑색 핏방울이 터져나가 자흑색 마문으로 변하더니 새빨간 빛 덩어리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 * *

    “네가 말한 서역은……?”

    염마신은 서역의 일에 대해 물으려는 듯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미간의 핏빛 뼛조각에 자흑색 마문이 나타나더니 두 눈에 어린 이성의 빛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텅 비어 버렸다.

    심협은 염마신의 이런 변화에 가슴이 철렁해서 곧바로 자금령을 불러들였다.

    그때, 염마신이 싸늘한 살기만 남은 두 눈으로 심협을 홱 돌아보았고, 거대한 몸뚱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협은 주저 없이 을목선둔진을 시전해 자리를 떴다.

    콰쾅!

    자흑색 빛줄기가 간발의 차이로 방금 전까지 심협이 서 있던 곳을 내리쳤다. 두 개의 빛줄기는 무거운 자흑색 추와 거대한 도끼로, 충격파가 요동치면서 공간마저 한바탕 뒤틀리더니 몇 갈래의 균열이 나타났다. 비경의 금제가 사라지고 나니 공간 자체도 약해진 것만 같았다.

    염마신이 비로소 파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마병(魔兵) 두 개가 나타나 있었다.

    염마신은 눈에서 혈광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다시 마족의 섬행술(閃行術)을 시전해 쫓아가려 했다.

    한데 그때, 그의 발치에 파동이 일더니 거대한 자금색 고리가 불쑥 나타나 염마신의 발목을 철컥 옭아맸다. 바로 자금령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화염과 폭풍, 영연이 자금령에서 뿜어져 나와 염마신의 몸을 집어삼켰다.

    염마신은 울부짖으며 연신 다리를 털어 자금령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자금령은 그의 몸에 딱 달라붙어 결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녹색 빛이 번쩍이더니 멀리서 심협이 나타나 양손을 빠르게 결인했다.

    그러자 염마신 주위의 화염과 폭풍, 영연이 곧장 이 마물을 감싸고 빙빙 돌며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불과 두세 호흡 만에 무려 반경 10여 장의 거대한 광진(光陣)이 생겨났다. 광진의 바깥쪽은 누르스름한 안개로 감싸인 채 회오리처럼 용솟음쳤는데, 그 안에는 더없이 굵직한 바람과 불, 연기의 기둥이 가득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심협은 쏜살같이 튀어나와 번쩍하고 거대한 광진 속으로 들어갔다.

    광진 속 화염과 폭풍, 영연의 힘이 일시에 끓어오르듯 일제히 회전하며 천지를 뒤엎을 기세로 염마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뇌부천장도 재빨리 다가오더니 번쩍하고 광진 속으로 들어갔다.

    굵직한 금빛 번개가 법진 안에서 번득이며 염마신의 몸 곳곳에 내리꽂혔다.

    우르릉! 쾅!

    연이어 굉음이 울렸고, 거대한 광진이 회전하면서 근처의 천지영기가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처럼 모여들었다. 이윽고 광진의 빛깔이 짙어지면서 그 안에 있던 염마신과 심협, 뇌부천장의 모습이 뒤덮였고, 광진 전체가 하나의 작은 세계로 변해가려는 조짐을 보였다.

    그때, 거대한 광진이 갑자기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눈부신 검붉은 빛이 뚫고 나와 근처의 허공을 비추었다.

    이어서 광진이 격렬하게 떨리더니 곧 붉은 빛과 노란 빛 덩어리들로 변해 폭발했고, 파동이 사방을 휩쓸며 흩어졌다.

    두 그림자가 그 노란 빛을 따라 거꾸로 날아 나왔다. 심협과 뇌부천장이었다.

    심협의 입가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고, 낯빛은 창백했으며, 옷이 군데군데 찢겨 나간 것이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자금령은 그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뇌부천장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아서 왼팔과 몸뚱이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손에 든 황금 뇌곤 역시 중간이 부러져 있었다.

    거대한 형체가 폭발하는 노란 빛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마치 혼돈 속에서 걸어 나온 아득한 옛날의 흉신과 같은 모습으로 걸음마다 쿵쿵 지축을 뒤흔들며 나타난 이 형체는 바로 염마신이었다.

    염마신의 몸은 또다시 적잖이 커져서 키가 거의 백 장에 달했고, 피부에는 거대한 자흑색 비늘이 돋아났으며, 뿜어내는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특히 놀라운 것은 미간의 핏빛 뼛조각이었다. 마치 핏빛 옥돌로 변한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이기 시작하며 끊임없이 눈부신 핏빛을 피워냈다.

    “빌어먹을! 저 마귀가 싸울수록 강해지다니!”

    심협의 안색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이 악마의 견고한 육신과 놀라운 힘은 둘째 치고, 가장 성가신 것은 이마에 박힌 핏빛 뼛조각이었다. 이 뼛조각은 핏빛 수정 실을 쏘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기이한 여러 다른 신통력을 발휘할 수도 있어서, 자금령도 그 앞에서는 그리 큰 쓸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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