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절체절명
검은 음파가 뿜어져 나오면서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거대한 붉은 발을 부쉈던 이 음파 신통력이 화련 위를 매섭게 두들겼다.
한데 그때, 염마신의 옆쪽 허공이 일렁이더니 심협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오른손에서 눈부신 푸른 빛을 발하며 염마신의 한쪽 다리를 내리쳤다. 바로 전창해였다.
“헛!”
염마신이 화들짝 놀라는 순간, 그의 몸에 푸른 빛이 감돌면서 엄청난 한기가 폭발했다. 전창해의 제2중으로, 공격 범위는 넓지 않아서 그저 반경 수십 장에 퍼지는 데 그쳤으나 그 위력은 놀라웠다.
염마신의 거대한 몸뚱이가 순간 두껍고 푸른 얼음결정에 뒤덮였고, 날아가던 몸 또한 순식간에 멈춰 섰다. 다만 머리는 아직 뒤덮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 마물과 심협의 공방은 너무도 빨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고, 그제야 한쪽에서는 검은 음파와 붉은 화련이 한데 맞부딪쳤다.
화르륵!“
검은 음파는 화련에 닿자 가볍게 불타 사라져버렸고,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련은 멈추지 않고 염마신 앞에 나타났다. 지순지염은 염마신의 얼굴에 닿자마자 피부를 순식간에 까맣게 태웠다.
한데 막 화련이 염마신의 머리를 잿더미로 만들려던 그때였다. 염마신의 머리에 갑자기 붉은 빛이 번쩍 스치더니 핏빛 뼛조각 하나가 그의 미간에 나타났다.
짙은 혈광이 핏빛 뼛조각에서 뿜어져 나와 단숨에 붉은 화련을 막아내고는 뒤로 1장쯤 밀어내기까지 했다.
화련 위의 지순지염이 용솟음쳤지만, 뜻밖에도 이 하찮아 보이는 혈광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혈광에서는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마기가 새어나왔는데, 신식을 펼칠 수 없는 금제 속에서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치우의 기운이다!”
오계국의 첨과에게서 이 기운을 느꼈던 바 있는 심협이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 * *
삼계 어딘가, 끝없는 어둠의 땅.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라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시뻘건 두 눈에서 번득이는 한없이 차가운 빛만은 선명했다.
거대한 핏빛 눈이 갑자기 시선을 살짝 들어올렸다.
“해내다니! 소수아(小秀兒),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소수아라니, 이자는 마수수와 어떤 관계란 말인가?
“정말로 해냈구나! 하하하!”
거대한 그림자의 호쾌한 웃음에 어둠의 땅 전체가 우르릉 진동했다.
이어서 그가 팔을 들어 올려 허공 어딘가를 가리키자 어두컴컴하던 공간에 붉은 빛이 천천히 나타났다. 그 안에는 아주 흐릿한 화면 하나가 떠올랐는데, 푸른 바다인 것 같았다.
* * *
핏빛 뼛조각이 나타나자 염마신의 두 눈은 곧 아득한 핏빛으로 가득 차서 이제 영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동시에 염마신 전신의 자흑색 마문이 강한 빛을 뿜어내면서 검은 빛의 물결이 솟구쳐 나왔다.
이 마물의 몸을 뒤덮었던 두꺼운 얼음결정들에는 곧 무수한 균열이 떠오르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검은 폭풍은 계속해서 거세게 폭발하여 순식간에 반경 수십 장을 휩쓸었다.
지척에 있던 심협 또한 휩쓸려버렸다. 거대한 힘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자 그의 몸을 보호하던 영광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낯빛이 변해 황급히 을목선둔을 시전하여 다시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염마신은 심협이 사라지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핏빛 두 눈으로 오직 붉은 화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에서 핏빛을 희미하게 반짝였다.
다음 순간, 염마신 미간의 뼛조각에서 핏빛이 다시 환하게 번득이더니 무수한 핏빛 수정 실들이 뿜어져 나와 붉은 화련을 두들겼다.
철썩!
마치 채찍으로 두들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붉은 화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그 안쪽의 화력이 유실되어 크기도 빠르게 줄어들더니 몇 호흡 뒤에는 펑하고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저건 무엇이기에 지순화련(至純火蓮)을 저리 쉽게 파괴한단 말인가!”
오색영연 깊은 곳에 몸을 피해 있던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는 낯빛이 굳었다.
자금령의 조종자로서 그는 지순화련의 위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만약 지순화련이 염마신의 머리를 뒤덮었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한데 그런 지순화련이 저 핏빛 수정 실들에 저리 쉽게 파괴되어 버리다니.
심협의 입가에는 두 줄기 핏자국이 흘렀는데, 을목선둔으로 재빨리 피했음에도 제법 큰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요상 단약을 한 알 꺼내서 먹고는 자금령의 힘을 발휘하여 다시 공격을 이어가려고 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우르릉 하고 굉음이 들려오더니, 공간 곳곳에 만화경(萬華鏡)처럼 변화무쌍한 하얀 빛이 생겨나 빠르게 번쩍였다.
심협의 안색이 더욱 차게 굳었다. 그 하얀 빛들은 이곳 금제의 광채였던 것이다. 그 누가 있어 조음동의 금제를 흔들 수 있단 말인가!
콰르릉!
방금 전보다 더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하얀 빛은 격렬하게 진동하며 흩어질 조짐을 보였다.
굉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세 번째 커다란 굉음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앞의 두 차례보다 훨씬 컸고, 거대한 파열음까지 뒤섞여 있었다.
공간 속 하얀 빛은 놀랍게도 빠르게 무너지더니 수없이 많은 하얀 광점이 되어 흩날렸다.
심협은 싸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염마신을 바라보았다.
구속하던 힘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신식이 마침내 몸을 떠나 뻗어나갈 수 있게 됐으니, 심협도 염마신의 기운과 경지를 분명히 감지했다. 염마신은 진선 후기에 도달한 데다 태을의 경지에 한없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 마물은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금제가 파괴된 것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협은 이상하게 여기며 결인하고 자금령을 가리키다가, 갑자기 뒤로 물러나 오색영연의 범위를 재빨리 벗어났다.
몇 줄기 빛살이 멀리서 날아와 그의 곁에 내려섰다. 섭채주와 흑곰 요괴 등이었다.
“왜들 나오셨습니까?”
심협이 약간 책망하는 투로 물었다.
“섭가 계집애가 네 사정을 듣고는 당장 이리로 오려고 하더구나. 지금 나로서는 이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
흑곰 요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섭채주는 심협의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보고는 뭔가를 중얼중얼 읊조리며 손에 든 버드나무 가지를 휘둘렀다. 그러자 버드나무 가지 허상이 튀어나와 심협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심협의 몸에 녹색 빛이 한바탕 일렁이더니 부상이 절반이나 치유되고, 법력도 약간 회복되었다.
그때, 오색영연 깊은 곳에서 염마신이 홱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영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 쌍의 핏빛 눈에는 가느다란 파동이 일었다.
“버드…… 나무…… 가지…….”
염마신은 힘겹게 이 세 단어를 토해내더니, 한 줄기 잔상으로 변하여 곧장 날아들었다.
심협은 이를 보고는 안색이 돌변했고, 전신에서 강렬한 금빛을 피워올렸다. 그 순간, 거대한 천책 허상이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금빛이 쏘아져 나와 섭채주를 포함한 네 사람을 뒤덮고 거둬들이려 애썼다. 다만 천책 허상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거둬들이기가 쉽지 않아 네 사람은 움찔 떨리기만 할 뿐 쉽게 빨려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때, 오색영연이 세차게 솟구치며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염마신이 번개처럼 달려든 것이었는데, 그는 시뻘건 눈으로 섭채주의 손에 들린 버드나무 가지만을 죽일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솟은 뼛조각의 핏빛이 크게 번득이면서 무수한 핏빛 수정 실들이 뿜어져 나와 섭채주에게로 돌진했다.
“거둬들여라!”
심협은 다급히 체내의 법력을 옥침 안으로 우르르 집어넣어 천책 허상의 흡수 능력을 강화시키며 외쳤다.
그는 지금껏 꿈속의 경지를 빌려와 늘 직접 전투에 사용했지, 옥침 안에 이토록 방대한 법력을 주입하며 무의식적으로 선천연보결을 쓴 적은 없었다.
옥침 속의 신비한 금제가 단숨에 풀리고 가볍게 절반이나 녹아 없어지면서, 천책 허상이 빠르게 굳어져 거의 실체가 되었다.
심협이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눈이 휘둥그레져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섭채주를 비롯한 사람들을 뒤덮은 금빛이 갑자기 열 곱절은 강해졌고, 그들의 모습이 순간 흐릿해지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에 핏빛 수정 실들은 허공을 가르고야 말았다.
염마신은 대노하여 팔을 번개 같이 움직였다. 그러자 무수한 마문으로 가득한 커다란 두 개의 주먹이 나타나 심협을 거세게 내리쳤다. 앞서 지순화련이 불태워버린 오른손도 어느새 원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두 주먹에서 검은 빛이 크게 뿜어져 나오면서 심협의 몸 주위에서는 폭발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전보다 배로 강력한 거대한 힘이 곧장 쏟아져 내려왔다. 이에 심협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확 조여들면서 몸이 일시에 더없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마염신의 두 주먹에서는 더없이 짙은 마기의 파동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반경 수십 장의 천지영기를 모두 흩어버렸고, 이제 심협의 주위에는 나무의 영기가 한 가닥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을목선둔진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가 없었다. 을목선둔을 시전하려면 주위 허공에 담긴 을목영력(乙木靈力)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염마신은 지금 영지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전투 본능은 여전히 남아 있어 단숨에 을목선둔진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다.
한데 어째서인지 심협은 이런 상황에서도 마치 저항을 포기한 것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염마신의 두 주먹이 멍하니 서 있는 심협에게 막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심협의 몸에서 갑자기 하늘을 찌를 듯한 금빛이 터져 나오면서 순식간에 웅대한 금색 빛고리를 이루고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갔다.
염마신의 두 주먹이 금색 빛고리를 내려쳤다.
콰지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둥근 빛고리가 아래로 움푹 꺼졌다. 그러나 놀라운 힘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와 놀랍게도 염마신의 주먹을 막아냈다.
허나 이는 한순간뿐이었다. 다음 순간 염마신의 주먹에 맺힌 검은 빛이 미친 듯이 불어나더니 칠흑 같이 검고 깊은 자그마한 태양 두 개를 만들어냈다.
펑!
굉음과 함께 금색 빛고리가 사분오열하면서 금색 번갯불 여러 줄기가 튀어나왔다.
염마신의 주먹이 금빛 안으로 들어서면서 번갯불들과 맞부딪쳤다.
콰쾅! 쾅!
둥근 고리 같은 검은 음파들이 순간 휘몰아쳐 주위의 금빛들을 모두 소멸시켰지만,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심협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수백 장 밖에서 우렛소리가 울리더니 심협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금빛 천장(天將)이 서 있었다. 온몸에는 번개가 번득였고, 손에는 황금 뇌곤(雷棍)을 든 그는 바로 뇌부천장이었다.
다만 지금 뇌부천장의 표정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멍하고 뻣뻣하게 굳은 채 영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꿈속에서 소환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심협은 뇌부천장을 쳐다보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는 이번에 진선기 법력을 써서 옥침 안에 주입하다가 우연히 그 속에 있던 금제를 절반 이상 제련하게 됐고, 덕분에 천책 허상과의 연결이 훨씬 깊어졌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운에 맡길 필요 없이 마음대로 꿈속 경지를 소환할 수도, 천책 허상을 빌려 그 안의 천병과 천장들을 자유자재로 불러낼 수도 있게 됐다. 게다가 꿈속의 경지를 소환하는 것과는 달리, 천병과 천장을 소환하는 데는 법력만 조금 소모될 뿐이라 대가도 그리 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