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함정
심협도 거센 물살에 휩쓸려 뒤로 나가떨어졌다. 더없이 짙은 수령(水靈)의 힘이 성난 파도가 지닌 거대한 힘과 함께 그의 몸속으로 밀려들었다.
오장육부가 마치 이 거대한 힘에 갈려나갈 것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에 심협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전력을 무명공법을 운공하며 이 거대한 힘을 풀어보려 했다.
한데, 그가 무명공법을 운공하자마자 짙은 수령(水靈)의 힘이 마치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듯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에 그의 온몸에서 푸른 빛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면서 무명공법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운공되었다.
심협은 마치 자신의 몸속에 갑자기 깊이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나타나 그 거대한 힘을 빨아들여 순식간에 말끔히 녹여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하여, 어렴풋이 무언가를 잡은 것 같으면서도 또렷하게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옥정병에서 하얀 빛이 환하게 나더니 쏜살같이 내리꽂혀 류청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심협은 안타까운 듯 탄식하고는 몸에서 푸른 빛을 몇 차례 번쩍이더니 거센 물줄기 속에서 날아 나와 섭채주 곁에 내려섰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섭채주가 그를 맞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옥정병이 이 버드나무 가지를 빨아들일 수 있는 것 같으니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된다.”
심협은 마음이 따스해져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버드나무 가지를 천책에서 꺼내 섭채주에게 건넸다.
섭채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버드나무 가지를 건네받아 손에 꼭 쥐었다.
그때, 옆에서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허공이 일렁이더니, 눈으로도 보일 정도의 파동이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가 맹렬한 회오리를 이루어 반경 몇 리를 휩쓸었다.
심협은 낯빛이 굳어 황급히 섭채주를 끌고 피했다.
회오리 한가운데에서는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귀도와 흑곰 요괴가 튀어나왔다.
어찌 된 일인지 귀도는 몸집이 배는 더 커졌고, 온몸의 피부에는 핏빛 문양들이 떠올라 어렴풋이 광기를 띤 사자 그림을 이루고 있어 매우 기괴해보였다. 그의 기운도 훨씬 난폭해지고 급격하게 불어나 놀랍게도 진선 중기에 이르렀다.
반면 흑곰 요괴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몸에 두 개의 제법 깊은 상처가 생겨나 피를 울컥울컥 쏟아냈다.
“광수결(狂獸訣)! 너는 사타령(獅駝嶺)의 요족이로구나!”
흑곰 요괴는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놀라서 외쳤다.
“사타령?”
심협의 눈썹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섭채주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귀도는 흑곰 요괴와 계속 맞붙어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그를 상대하지 않고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딜 가려고!”
흑곰 요괴는 크게 외치면서 손에 든 장창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연달아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창끝에서 번갯불이 연이어 번쩍였다.
검은 태양 같은 검은색 번개 덩어리들이 튀어나와 폭우처럼 귀도를 향해 내리꽂혔고, 번개 덩어리에서는 번갯불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와 희미하게 서로 이어져 진동 속에 허공을 뜨겁게 달궜다.
귀도는 두려워하지 않고 느긋하게 손을 뒤집어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거대한 푸른 도끼가 그의 손에 나타나 허공을 베었다.
높이가 백 장은 족히 되는 도끼 그림자가 허공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도끼 그림자는 반은 푸르고 반은 붉었는데, 그 속에는 사나운 핏빛 사자의 허상도 어렴풋이 드러나 있어 몹시도 요사스럽고 괴이해 보였다.
거대한 도끼 그림자는 짙푸른 무지개처럼 엄청난 속도로 온 하늘에 가득한 번개 덩어리들을 베었다.
치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더없이 기세등등해보이던 번개 덩어리들은 중간에서부터 잘려나갔고, 이에 통로가 하나 생겨났다. 근처의 번개 덩어리들은 도끼 그림자의 위력에 영향을 받아 펑펑 터져나갔다.
“사박(獅搏)! 네놈은 과연 사타령의 요족이었어!”
흑곰 요괴가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거대한 도끼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가 흑곰 요괴의 머리 위에 나타나더니 세찬 기세로 베어갔다.
흑곰 요괴는 도끼 그림자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두 발 위에 푸른빛을 번쩍여 푸른 연꽃 허상을 이룬 채 쏜살같이 옆으로 피했다.
핏빛 그림자와 같은 귀도는 눈 깜짝할 새 위청과 류청 곁에 내려섰다.
이를 본 흑곰 요괴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발 위의 푸른 연꽃 허상이 거세게 피어오르더니 그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다음 순간 심협과 섭채주 곁에 나타났다.
백소천과 귀장도 황급히 날아왔다. 작은 곰 요괴 또한 위청을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일행에 합류했다.
양측이 대립한 채 잠시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아버지.”
작은 곰 요괴가 흑곰 요괴 앞으로 다가와 공손한 표정으로 몸을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예서 보살의 보물을 지키며 도리에 따라 몸과 마음을 수양하라 일렀거늘, 어찌 이리 무모하단 말이냐!”
흑곰 요괴의 눈 깊은 곳에는 한 가닥 희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겉으로는 도리어 꾸짖었다.
“저 위청이란 놈이 저의 벗을 죽였는데, 소자가 어찌 그를 놓아줄 수 있겠습니까.”
작은 곰 요괴가 고집스레 말했다.
“너…… 되었다. 여기 일이 끝나면 혼쭐을 내줄 것이다.”
흑곰 요괴는 작은 곰 요괴를 노려보았지만, 그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섭채주가 뭔가를 중얼중얼 읊조리며 손에 든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버들가지 허상 세 줄기가 날아가 하나는 심협의 몸속에, 또 다른 하나는 백소천의 몸속에, 마지막 하나는 흑곰 요괴의 몸속에 녹아들었다.
백소천의 몸에는 환한 녹색 빛이 떠오르더니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었고, 법력도 회복되었다.
심협의 몸에는 녹색 빛이 스쳐 지나면서 소모되었던 법력이 채워졌다.
흑곰 요괴도 상처가 전부 아물었다. 다만 그는 진선의 경지였기에 버드나무 가지도 단번에 그의 요력을 완전히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보타산의 양류감로는 역시 신기하군요. 허나 이 법술을 시전하는 데에는 진원(眞元)이 크게 소모되니 섭 도우는 저를 위해 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오.”
백소천은 몸을 움직여보더니 크게 기뻐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양류감로가 아니라 이 버드나무 가지의 회복 신통력이라 그리 많은 법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섭채주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확실히 그녀의 법력 파동은 확실히 별로 약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고, 이런 회복 신통력이 있다면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누이는 곧바로 싸움에 참여하기보다는 우리를 회복시켜주는 데 집중하는 게 좋겠구나.”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자 섭채주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심 소우는 솜씨가 좋아. 자금령의 여러 신통력을 그토록 능숙하게 다루다니, 감탄했네.”
흑곰 요괴가 심협에게 공수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자금령을 손에 넣은 심협의 전투력은 자신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아, 흑곰 요괴는 은근히 그를 동년배로 대우했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이제 저들도 하나로 모였으니, 어찌 해야 할지 선배님께서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심협은 겸손하게 공수하고 답례한 뒤 물었다.
흑곰 요괴는 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편, 맞은편에서는 류청이 결인하여 옥정병을 가리키자 안에서 그림자가 하나 튀어나왔다. 바로 풍식이었다.
풍식은 이미 정신을 회복했지만, 요기는 적잖이 약해져서 안색이 창백했고, 신혼이 자금령의 황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풍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류청이 물었다.
“한순간의 불찰로 저놈의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괜찮네.”
풍식의 얼굴에 푸른 빛이 스쳐 지나더니 곧 원래 모습을 회복하고는 원한이 어린 눈빛으로 멀리 있는 심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는 이들의 인솔자였는데, 이번에 심협의 기습에 중상을 입어 류청이 제때 구하러 나서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일로 그는 체면이 크게 깎여 내상을 억지로 참아내며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귀도 선배님은요?”
류청이 귀도를 돌아보았다.
“괜찮네. 지금 관세음의 세 가지 보물 중 두 가지, 특히 그 버드나무 가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 같으니 상황이 불리하게 되었어.”
귀도의 몸에 있던 핏빛 사자 문양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생생하게 반짝이는 것이, 잠재력을 북돋우는 이 비술의 지속시간이 제법 긴 듯했다.
“그렇긴 하지만, 반드시 저 버드나무 가지를 빼앗아 와야 합니다.”
위청은 초조함과 흥분감이 뒤섞인 눈길로 섭채주가 들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 도우에게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풍식은 위청의 표정을 눈여겨보고는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그럭저럭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그건…….”
위청은 순간 뻣뻣하게 굳어져서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에 위청에 대한 풍식의 평가는 한층 더 낮아졌다. 허무맹랑한 목표를 위해 종문을 배반하고 흑룡담의 손을 빌려 그들에게 복수하려는 위청이 그는 몹시도 하찮아 보였다. 위청 자신은 전혀 모르겠지만 흑룡담에게 그는 그저 한 알의 바둑돌에 불과했다. 큰일을 마치는 날이 바로 위청의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참, 어찌 자네 둘만 돌아왔나? 원구는? 밖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는가?”
풍식이 문득 떠올라서 물었다.
“줄곧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조음동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류청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변고가 일어나지 않고서야……. 벌써 저들의 손에 죽은 것이겠지?”
귀도가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쓸모없는 놈이로군!”
풍식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일은 일단 신경 끄도록 하지요. 이제 세 가지 보물 모두 세상에 나왔으니 그는 쓸모없어졌습니다. 두 분 선배님 모두 큰 부상을 입으셨군요. 제게 천심단(天心丹)이 두 알 있사온데, 원기를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으니 어서 드시지요.”
류청은 옅은 자줏빛 단약 두 알을 꺼냈고, 그 위로 자색 기운이 감돌았는데, 퍽 비범해 보였다.
풍식과 귀도는 사양 않고 단약을 받아 고개를 쳐들고는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의 얼굴에 자색 빛이 솟아오르면서 원기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류 도우, 대단히 고맙네.”
귀도는 크게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고, 풍식도 감사를 건넸다.
“고마울 것 없습니다. 그토록 고맙다면 그저 두 분이 지닌 일신의 정혈과 혼백을 바치시면 됩니다. 하하하하!”
류청은 갑자기 공손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투로 깔깔대며 말했다.
귀도와 풍식은 류청의 눈에 서린 싸늘한 빛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즉시 뒤로 날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이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피부 위로 자줏빛 문양들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한편, 대책을 논의하던 심협 등도 맞은편의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다들 표정이 돌변했다.
“정신들 가다듬어라. 혹시 저놈들이 어떤 계략을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흑곰 요괴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심협을 비롯한 사람들은 엄숙하게 대답하고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입은 열 수 있었기에 풍식은 성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별것 아니랍니다. 그저 두 분의 몸을 빌려 마제(魔帝) 대인께서 전수하여주신 마태중생결(魔胎重生訣)을 시도해본 것뿐이지요.”
류청이 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웃는 얼굴은 풍식과 귀도의 눈에는 악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