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버드나무 가지의 주인
심협은 눈을 번뜩이며 결인하여 다시 풍령을 가리켰다.
누르스름한 폭풍이 방울에서 뿜어져 나와 거대한 불기둥 안으로 녹아들었다.
불기둥 회전 속도는 순식간에 3할이나 빨라졌고, 불기둥 안쪽에는 열 개의 거대한 황색 풍인(風刃)이 떠올랐다. 주위의 화염도 모여들어 풍인과 한데 뒤엉키면서 열 개의 누르스름한 풍인은 눈 깜짝할 사이 더없이 날카로워 보이는 거대한 화인(火刃)으로 변했다.
불기둥의 회전력을 빌려 이 거대한 화인들은 톱니바퀴처럼 핏빛 대번을 매섭게 옭죄었다. 그러자 대번을 감싼 핏빛은 쉽게 잘려나갔고, 시뻘건 화인은 그대로 베고 들어갔다.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리면서 핏빛 대번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지만, 쉽게 잘릴 것 같지는 않았다.
“흥! 네 이놈, 자금령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안타깝게도 네놈은 너무도 약하구나! 감히 본존의 기혈번(嗜血幡)을 파괴할 생각일랑 말거라.”
풍식이 차갑게 비웃었다.
이에 심협은 피식 웃더니 한 손을 결인하고 화인들을 흩어버렸다.
그는 원래 불기둥의 위세에 바람과 불이 서로 어우러지는 힘을 빌려 혈번을 파괴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경지가 너무 부족해 지금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풍령과 화령의 위력을 결합해 발휘하는 데 조금 익숙해졌으니, 이번 시도가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임무는 그저 귀하를 붙잡아두는 것뿐이오. 호법 선배님께서 당신 동료를 처리하고 나면 다음은 당신 차례요.”
심협의 담담한 말에 풍식의 낯빛이 굳어지더니, 영목(靈目) 신통을 시전하여 불기둥을 뚫고 두 눈에서 푸른빛을 강하게 내뿜었다.
한편, 흑곰 요괴와 귀도는 아래 바닷속에서 맞붙는 중이었다. 흑곰 요괴의 몸 주변에는 칠흑 같은 번개가 눈부시게 반짝였고, 몸은 번개로 변했다가 실체를 지녔다가 하며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창은 더욱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면서 수천수만의 창 그림자가 되었다가, 백 장에 이르는 거대한 창으로 변하기도 하면서 점점 더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흑곰 요괴의 공세에 귀도는 이미 열세에 처하여 거듭 뒤로 물러났다. 그의 금빛 갑옷은 여러 군데가 깨졌고, 들고 있던 금빛 방패도 반 토막이 났다. 더는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 * *
‘빌어먹을! 위청과 류청 두 쓸모없는 놈들은 뭘 하고 있는 게지? 그놈들은 옥정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자금령이 저 애송이 손에 떨어지게 둘 수 있느냐고! 심지어 보타산 놈들까지 왔는데, 그 등신들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게야?’
풍식은 초조한 기색으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심협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자금령을 움직여 거대한 불기둥의 운행을 유지하면서 법력 소모를 아꼈다.
그러나 자금령은 원기를 지나치게 소모하여, 그가 최대한 아껴도 법력은 여전히 빠르게 소모되었다. 이제 남은 법력은 3할이 채 되지 않게 된 터라 그는 회복류 단약 두 알을 꺼내 먹었다.
“하하! 잊을 뻔했군. 지금 너의 경지로는 자금령의 법력소모조차 견뎌내지 못할 테지. 이미 법력이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이 애송아, 네가 감히 우리 요족의 대계를 막으려 하느냐! 내가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신혼을 요화(妖火) 안에 가두어 백 년 동안 괴롭힐 것이다! 크하하하!”
풍식은 심협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심협은 상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최대한 안정적으로 법력을 운행시키면서 단약을 정제했다. 동시에 그는 신식을 통해 귀장에게 전음을 전했다. 섭채주를 깨워 자신의 법력을 회복시켜줄 것을 부탁하라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풍식을 묶어둔 것도 섭채주가 법력을 제때에 보충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섭 도우! 주인님의 상황이 위급합니다. 어서 법술로 주인님의 법력을 회복시켜주십시오.”
귀장은 심협의 분부를 받자마자 섭채주를 깨우려 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섭채주는 눈을 감은 채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버드나무 가지에서는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이미 제련을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섭 도우, 나는 보타산의 회복류 신통력을 익힌 적이 없다. 이 버드나무 가지는 나중에 제련해도 늦지 않으니 먼저 위에 있는 저 녀석의 법력부터 회복시키거라.”
작은 곰 요괴는 심협과 뜻이 잘 맞지는 않았지만, 현재 상황을 깨닫고는 재촉했다.
하지만 섭채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섭 도우?”
백소천은 뭔가 잘못 되었음을 알아차리고 다가왔다. 그는 요상유영단 덕에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하여 안색도 많이 돌아온 상태였다.
한데 그가 의아함을 느끼고는 섭채주의 어깨를 막 두드리려 한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버드나무 가지에서 녹색 빛이 확 불어나더니 사방으로 폭발했다. 백소천의 손은 섭채주의 몸에 닿기도 전에 녹색 빛에 튕겨나갔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지만 거대한 힘이 세차게 밀려와 백소천은 나가떨어지면서 왈칵 피를 토했다.
귀장과 작은 곰 요괴 또한 녹색 빛에 밀려 한참이나 물러났다.
“어찌 된 것입니까?”
귀장은 손을 휘둘러 검은 기운을 뿜어내더니 뒤로 나가떨어진 백소천을 휘감으면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제련하다가 어떤 오묘한 경지에 들어선 듯하다. 버드나무 가지도 그녀를 주인으로 여겨 접근하는 그 어떤 것도 밀어내버리는 게지.”
작은 곰 요괴가 섭채주를 조심스레 살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저 진선기 요족과 목숨 걸고 싸우는 중이거늘 보물의 신묘함이나 깨달을 겨를이 어디 있답니까? 그녀를 깨우십시오!”
귀장이 싸늘하게 외치며 손가락을 구부려 섭채주를 가리켰다. 그러자 검은 기운 한 줄기가 손에서 날아가 3장 길이의 거대한 검은 화살로 변하여 섭채주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 주위에는 매서운 검은 폭풍이 감돌았다.
그러나 화살이 섭채주와 3척가량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가자마자 버드나무 가지에서 녹색 빛이 다시 환하게 뿜어져 나오더니, 짧은 폭발음과 함께 검은 화살을 부숴버렸다.
귀장은 낯빛이 어두워져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의 귀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시뻘건 두 눈을 가진 검은 해골로 변하여 섭채주를 향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검은색 음파가 해골의 입에서 쏘아져 나와 폭풍을 이끌고 섭채주를 향해 매섭게 돌진했다. 근처의 허공에서 미미하게 떨리는 소리가 났다.
“섭채주, 일어나라! 지열화(地烈火)!”
작은 곰 요괴도 즉시 나서서 창에 거대한 붉은 빛을 일으키며 땅바닥에 매섭게 내리꽂았다. 창의 몸체 반쯤이 순간 땅속으로 사라졌고, 거의 동시에 섭채주 앞쪽 땅이 돌연 갈라지면서 폭이 1장에 길이는 10여 장쯤 되는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쿠르릉!
커다란 소리가 울리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집채만 한 진홍색 화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한 듯 거대한 균열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진홍색 화염은 작열하듯 뜨거웠고, 짙은 땅속의 살기도 담겨 있어 평범한 영염(靈焰)보다 위력이 열 배는 더 강력했다.
거대한 불길은 세차게 치솟으면서 8장 길이의 거대한 화염 칼날이 되어 섭채주를 향해 사납게 날아들었다.
버드나무 가지 위의 녹색 빛은 위협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열 배는 밝아지더니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섭채주를 중심에 두고 주위에 1장 크기의 녹색 빛 덩어리를 이루며 그녀를 감쌌다.
녹색 빛 덩어리에서는 나무뿌리 같은 녹색 빛줄기도 뿜어져 나와 땅으로 들어갔다.
진홍색 화염 칼날이 녹색 빛 덩어리 위를 거세게 내리쳤지만, 빛 덩어리는 한 차례 파르르 떨렸을 뿐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거대한 힘이 튕겨 돌아오면서 거대한 화염 칼날이 폭발해 무수한 불티로 변해 흩어졌다.
그러나 빛 덩어리 속의 섭채주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했다.
작은 곰 요괴와 귀장 모두 이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섭채주를 깨우기 위해 다양한 공격을 퍼부었다.
한편, 백소천도 속으로 공법을 운공하여 부상을 진정시키고는 곧바로 달려들어 귀장과 작은 곰 요괴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편, 심협도 이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안색이 변하였다.
“무슨 일이지?”
그는 전부터 섭채주가 선정에 들어 선천연보결을 깨닫는 것을 보았지만, 이런 상황은 도저히 예상치 못했다. 이에 섭채주에게 선천연보결을 전수해주어 되레 자신을 지금의 궁지로 몰아넣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는 곧 숨을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뒤 마음을 가다듬었다. 불필요한 손실을 피하고 법력을 회복시켜주는 여러 보물들을 꺼내 원기를 보충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법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거대한 불기둥은 천천히 줄어들었으며, 회전속도 역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풍식은 이 광경에 비릿하게 웃더니 입을 벌려 정혈을 뿜어내고는 양손을 빠르게 결인했다.
펑!
풍식의 정혈은 안개가 되어 기혈번 속으로 녹아들었고, 번에서 강렬한 핏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귀수(鬼首)가 나타났다.
귀수는 껄껄대며 기괴하게 웃더니, 입을 쩍 벌리고 굵기가 물동이만 한 핏빛 빛기둥을 내뿜었다. 빛기둥은 무시무시한 음살의 기운을 발하며 불기둥을 거세게 두들겼다.
쿵!
굉음과 함께 불기둥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곧바로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크기는 순식간에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풍식은 기쁜 표정으로 양손을 재빨리 결인해 기혈번의 힘을 다시금 불러일으켜 불기둥을 단번에 무너뜨리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지면의 녹색 빛 덩어리 안에 있던 섭채주의 미간에서 녹색 빛이 떠올랐다. 그 속에 버들잎 모양 표식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녹색 빛은 곧바로 흩어졌고, 버들잎 표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섭채주가 몸을 움찔 떨더니 눈을 번쩍 뜨자, 몸 주위의 녹색 빛 덩어리도 꺼지듯 사라졌다.
“섭 도우, 드디어 깨어났군요! 어서 심형의 법력을 회복시켜 주시오. 급합니다!”
백소천이 크게 기뻐하며 황급히 말했다.
섭채주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안색이 변해서는 곧바로 손에 든 버드나무 가지를 휘둘렀다.
버드나무 가지에서 녹색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더니 그 위의 연둣빛 버들가지가 바람을 타고 펼쳐지면서 순식간에 열 배는 길어졌다. 그리고는 휙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불기둥 속에 있던 풍식의 주위 허공에 갑자기 녹색 빛이 한 줄기 스쳐 지나더니 여러 개의 비취색 버드나무 가지들이 불쑥 솟아나왔다. 이 버드나무 가지들은 뱀처럼 부드럽고 유연해 단번에 풍식을 몇 바퀴나 휘감았다.
풍식은 낯빛이 크게 변해 있는 힘껏 몸부림쳤으나 이 버드나무 가지들은 보기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질기고 단단해서, 그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깜짝 놀라 곁에 있던 기혈번의 힘을 다시 거세게 불러일으켰다.
번에서 핏빛 몇 줄기가 솟구치더니 왈칵 뿜어져 나와 핏빛 칼날이 되어 버드나무 가지를 매섭게 베었다.
쾅! 쾅!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몇 번의 충돌 후 핏빛 칼날은 모두 부서져버렸지만, 버드나무 가지 위에는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뭐, 뭐야!”
풍식은 놀라다 못해 넋이 나갈 지경이었고, 심협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