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보타산의 배반자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령이 바람을 안고 몇 배나 커지더니, 그 안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와 작은 곰 요괴를 덮쳤다.
가히 만 개의 금등(金燈)을 밝힐 만한 화염이 천 갈래 붉은 무지개처럼 치솟았다.
그 위세가 실로 무시무시해 심협은 놀라는 한편 매우 기뻤다. 이 자금령의 위력이 상당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자금령!”
작은 곰 요괴는 경악한 듯 외쳤으나, 피하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창을 연달아 내찔렀다.
창끝에서 푸른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더니 곧 푸른 파도로 변해 퍼져 나가면서 엄청난 한기가 번지면서 온 하늘을 가득 뒤덮은 붉은 불길의 충격을 막아냈다. 이는 뜻밖에도 용녀 아기가 시전했던 진창해였다.
다만 작은 곰 요괴가 시전한 진창해는 그 위력이 용녀 아기가 사용할 때보다 현저히 떨어져, 자금령의 불꽃을 전부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에 몇몇 붉은 화염은 푸른 빛을 뚫고 들어가 작은 곰 요괴의 몸에 꽂혔다.
곰 요괴의 갑옷에 구멍들이 뻥뻥 뚫리면서 살갗도 타들어가 탄내가 진동했다.
“파란불경(波瀾不驚)!”
곰 요괴는 기겁했으나, 물러나지 않고 크게 외치더니 기이한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몸 표면에 갑자기 투명한 빛고리가 나타나더니 번쩍하며 폭발했다. 무수한 푸른 부적 문양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푸른 보호 덮개를 이루며 온몸을 감쌌고, 그 위로 수없이 많은 성난 파도 같은 푸른 그림자가 반짝이는 것이 실로 현묘해 보였다.
붉은 화염이 계속해서 날아가 이 보호 덮개를 두들겼지만, 즉시 튕겨나갔다.
“오라버니, 안 돼요!”
그제야 심협이 나타난 것을 안 섭채주가 다급히 외쳤다. 동시에 그녀는 손에 든 비단 띠를 연거푸 휘둘러 뜻밖에도 붉은 화염들을 쓸어버렸다.
심협은 당황했지만, 곧장 결인하여 자금령을 가리켰다.
온 하늘에 가득했던 붉은 화염이 몇 호흡 만에 자금령 안으로 날아 돌아갔다.
“오라버니, 저분은 적이 아니에요. 이미 버드나무 가지를 제게 주시기로 약조하셨습니다.”
섭채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말했다.
“그렇다면 좀 전에는 무엇 때문에 싸운 것이냐?”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대인께서는 호법 선배님의 후손이십니다. 예전에 잘못을 저질러 이곳으로 파견되셨는데, 오랜 세월 홀로 이곳을 지키시다보니 외로움을 금할 길이 없으셨고, 한바탕 겨뤄보는 대가로 버드나무 가지를 넘겨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섭채주의 설명에 심협은 아차 싶었다.
그때, 작은 곰 요괴가 씩씩대며 날아와 심협을 위아래로 두어 번 훑어보더니 대뜸 말했다.
“너 이놈! 제법이구나! 자신 있다면 자금령을 쓰지 말고 한바탕 붙어보자!”
가늘게 뜬 작은 곰 요괴의 눈에 들끓는 전의가 용솟음쳤다.
“심모가 선배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선배님과의 대련이라면 저 역시 좋으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좀 전에 바깥의 금제가 풀린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위기를 넘기는 것이 우선이니 지금은 버드나무 가지를 먼저 넘겨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심협이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대인…….”
섭채주도 낯빛이 굳은 채 작은 곰 요괴를 바라보았다.
이 곰 요괴도 상황을 인지했는지 표정을 풀고는 제단 위로 향하더니 금빛 영패를 하나 꺼내 던졌다.
영패가 한 줄기 금빛으로 변해 금색 빛 장막 속으로 녹아들자 빛 덮개가 몇 차례 미친 듯이 번쩍이더니 소리 없이 사라졌다.
‘수위들에게는 금제를 푸는 법이 있는 거였나?’
심협은 자신이 왜 그 고생을 했나 싶어 잠시 짜증이 치밀었다.
“가져가거라.”
작은 곰 요괴가 버드나무 가지를 건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섭채주는 크게 기뻐하며 제단 앞으로 날아가 버드나무 가지를 향해 세 번 절한 후에야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때였다.
“멈춰라!”
천둥 같은 외침이 들려오더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빛 한 줄기가 멀리서 번개처럼 날아와 곧장 제단으로 달려들었다.
금빛 속에 있는 것은 위청이었는데, 두 눈에 핏발이 가득 돋은 채로 제단 위의 버드나무 가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위청의 앞쪽 허공이 일렁이더니 노란 곤영들이 나타나 그에게 날아들었다. 허공도 곤영을 따라 회전하면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심협의 모습은 노란 회오리 뒤에 아른거리며 나타났는데, 낯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거대한 힘이 곤영 속에서 성난 파도처럼 솟구쳐 나오자 질주하던 위청이 잠시 멈춰서더니 격노한 듯 포효했다.
그 틈을 타 섭채주는 버드나무 가지를 챙겨 넣었다.
섭채주가 버드나무 가지를 얻은 것을 본 위청의 두 눈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손에서는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푸른 보검이 생겨났다.
이 검은 특이하게도 날이 서 있지 않았고, 위에 연꽃 모양 도안이 있었으며, 검막이도 연화대 형상이었다.
“그걸 내놔라! 연심검의(蓮心劍意)!”
위청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자, 수많은 푸른 빛이 보검에서 피어올랐다. 빛줄기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검기로, 한 차례 빙그르르 돌더니 백여 장 길이로 응결되어 연꽃 모양의 거대한 푸른 검을 이루었다. 그리고는 번쩍 날아가 64줄기 곤영을 베었다.
쉭!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64줄기 곤영은 종잇장처럼 반으로 토막 나버렸다.
“아니!”
발천난봉은 이토록 가볍게 격파된 적이 없었기에 심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발천난봉 역시 절세의 신통력인지라 거대한 청련검 역시 크기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심협을 향해 날아왔다.
“오라버니, 조심하세요! 저것은 보타산의 유명한 법보인 청련검(靑蓮劍)이에요!”
심협은 섭채주의 외침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장한 얼굴로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앞에 푸른 빛이 스쳐 지나더니 팔현경이 나타나 푸른 빛기둥을 뿜어내더니 거대한 청련검을 막아냈다.
열여덟 줄기의 영문(靈紋)이 거울 면 위에 나타났고, 푸른 빛기둥 안의 빛이 연이어 번쩍였다. 그리고는 거울 같은 빛 장막들이 순식간에 겹겹이 포개져 청련검 앞을 가로막았다. 출규 중기에 들어선 심협은 팔현경의 위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 장막을 내리친 거대한 청련검이 푸른 빛기둥을 베어버리고는 열여덟 개의 푸른 금제 위에 내리 꽂혔다.
화르륵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푸른 빛의 장막이 겹겹이 잘려나가면서 열여덟 개의 빛 장막이 눈 깜짝할 사이 절반 이상 부서졌다. 이에 거대한 청련검의 속도 또한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심협이 황급히 소매를 떨치자 거대한 자줏빛 구슬이 떠올라 푸른 빛 장막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현황일기곤 역시 자줏빛 구슬 뒤를 따라 노란 빛을 크게 내뿜으며 거세게 내리쳤다.
땅!
맑은 굉음과 함께 허공이 진동했고, 남은 푸른 빛 장막이 거세게 떨리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한데 놀랍게도 팔현경 역시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균열이 나타났다.
자줏빛 구슬은 표면의 자줏빛이 어두워졌고, 몸체에는 몇 촌 깊이로 베인 흔적이 생겨났다.
현황일기곤도 빙그르르 회전하며 날아 돌아왔는데, 빛이 잔뜩 어두워져 심한 손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청련검도 가로막혀 미친 듯이 번쩍이더니 뒤로 튕겨 날아갔다.
세 가지 법보가 손상되는 낭패를 당하자 잔뜩 화가 난 심협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 되돌려주마!”
그는 자금령을 다시 꺼내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딸랑!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와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위청을 향해 뻗어 갔다.
막 심협을 도우러 나서려던 섭채주는 온 하늘 가득 작열하는 불길을 보고는 멈춰섰다.
“자금령!”
이 무렵 냉정을 되찾은 위청은 눈이 휘둥그레져 청련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들이 뿜어져 나와 울음소리를 내면서 검우(劍雨)처럼 붉은 화염을 베고 막아냈다. 그러나 화염은 성난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아쳐 검기를 가볍게 집어삼키고 불태웠다.
그럼에도 위청은 아주 잠시 화염이 막힌 틈을 타 양발에 푸른 빛을 거세게 내뿜으며 푸른 연꽃 허상을 만들어내더니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의 몸은 순간 흐릿하게 변하더니, 다음 순간 수백 장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심협은 이를 발견했지만, 자금령을 움직여 추격하지는 않았다. 여러 차례 큰 신통을 발휘하느라 체내 법력이 절반 이상 소모된 상태였던 것이다.
‘보타산의 좌련신법(坐蓮身法)은 과연 남다르군요.’
천책 공간 속에서 원구가 찬탄했다.
‘좌련신법? 위청이 방금 쓴 비둔술 말이오?’
심협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신통력은 보법과 을목둔술이 합쳐진 결과로, 속도로 논하자면 당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하지요.’
원구의 설명에 심협의 눈에는 한 줄기 이채가 스쳤다. 분명 방금 위청이 선보인 신법은 사월보보다도 빨랐다.
‘심 도우, 보타산의 오행비술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으니 도우께서도 얻고 싶으시겠지요. 위청은 보타산의 배반자이니 공적(公敵)이 되었습니다. 도우에게는 자금령이 있으니 저자를 죽일 수 있다면 좋은 일일 테지요. 그를 잡아다가 신혼을 제가 있는 이 공간으로 가둬두십시오. 제게 신혼을 고문하는 데 능한 고술이 하나 있으니, 분명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원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심협은 그 말에 눈빛이 번득였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고 손을 휘둘러 팔현경과 자줏빛 구슬을 거둬들이고는 보도중생부를 꺼내 한 손에 쥐고 바스러뜨렸다.
부적이 한 줄기 녹색 빛으로 변해 체내로 녹아들었고, 몸 주위에 녹색 빛고리가 떠오르면서 빠르게 반짝였다. 빛고리가 반짝일 때마다 주위의 천지영기가 끊임없이 몰려들어 그의 법력으로 변했다.
두세 호흡 사이에 녹색 빛고리는 아홉 번이나 반짝이고서야 사라졌다.
심협의 얼굴에 확색이 돌았다. 보도중생부의 효과는 실로 훌륭해 그의 체내 법력은 절반 이상 회복되었고, 육신의 피로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다시 자금령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연령의 마개까지 뽑아 금령 두 개를 동시에 작동시켰다.
온 하늘 가득한 붉은 화염이 다시 뿜어져 나왔고, 연령 안에서도 거대한 연무가 뿜어져 나왔다. 그 연기는 아궁이의 연기도 아니었고, 풀과 나무가 타는 연기도 아니었다. 각각 청색, 홍색, 백색, 흑색, 황색 다섯 빛깔의 신령한 영연(靈烟)이었다.
오색영연은 눈부시게 빛이 나, 멀리 있던 섭채주와 작은 곰 요괴는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도 눈이 따갑고 눈물이 쏟아져 재빨리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연기와 불꽃이 서로 어우러지자 붉은 화염의 위세는 일시에 폭발적으로 치솟아 성난 파도처럼 위청을 향해 휘몰아쳤다. 화염이 지나간 곳마다 그 아래 숲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불타면서 잿더미로 변했고, 땅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면서 파릇파릇했던 숲은 눈 깜짝할 새에 파괴되었다.
“저 망할 놈! 싸울 때 싸우더라도 남의 집은 건들지 말아야지!”
작은 곰 요괴는 자신의 거처가 망가지는 광경에 길길이 날뛰었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섭채주도 놀란 표정으로 재빨리 다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그녀는 버드나무 가지를 꺼내 법력을 운행하여 제련하려 했다. 그러나 사문에서 전수받은 제련술로는 그것과 아무런 연결고리도 생기지 않았다.
“애쓸 필요 없다. 이 버드나무 가지는 관음대사께서 몸 가까이 지니셨던 영보인지라, 그 어르신만의 제련술이 없으면 그 힘을 발휘시킬 수가 없을 게다.”
작은 곰 요괴가 다독이듯 말했으나, 섭채주는 오히려 그 말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자신과 심협, 백소천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궁전에 들어온 이유가 바로 관음대사가 남긴 보물을 먼저 얻어 위청 등을 막기 위함이 아닌가! 한데 작동시킬 수도 없으니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판이었다.
“선배님께서는 제련술을 아십니까?”
섭채주가 황급히 물었다.
“나는 그저 지키는 자일 뿐이거늘 어찌 알겠느냐? 아마 보타산에서는 오직 관월 조사님만이 제련술을 아실 게다. 청련 장교(掌敎)도 모를 게야.”
작은 곰 요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섭채주는 크게 실망했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한데 오라버니께서는 어찌 자금령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글쎄다. 나도 저놈이 어디서 제련법을 배운 것인지 궁금해 죽겠구나. 설마 저자가 관음대사님과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겐가?”
작은 곰 요괴는 깊은 눈으로 심협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