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22화 (522/1,214)
  • 522화. 용녀 아기

    “설마…… 환술인가?”

    심협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현음미동(玄陰迷瞳)을 운공하여 주위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신식을 펼칠 수 없었지만, 골짜기가 그리 넓지 않아서 한 눈에 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분홍빛 연꽃 안에서 보광이 은은하게 비치는 것이 범상한 물건이 아닌 듯했다.

    “설마…… 보물이 연꽃 속에 있는 건가?”

    심협은 기쁜 표정으로 결인하고 분홍빛 연꽃을 가리켰다. 그러자 개울에서 푸른색 물의 손바닥이 뻗어 나와 연꽃을 움켜쥐려 했다.

    그때였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느닷없이 차가운 고함과 함께 연꽃 근처의 바위가 쩍 갈라지면서 파인(波刃) 형상의 푸른 빛이 쏘아져 나와 물 손바닥을 가볍게 두동강 냈다.

    푸른 광인(光刃)은 멈추지 않고 번쩍이는 빛이 되어 심협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 속도는 실로 놀라웠다.

    심협은 흠칫 놀랐다. 방금 골짜기를 살폈을 때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 상대의 실력은 보통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소매를 휙 휘둘렀다.

    붉은 검광이 그의 소매 사이로 날아가 푸른 파인과 맞부딪쳤다.

    꽈르릉!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처럼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푸른 파인이 폭발했고, 순양검배도 검신의 빛이 절반쯤 희미해진 채로 빙글빙글 돌며 튕겨나갔다.

    심협은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들고 순양검배를 불러들였다.

    순양검배는 몇 차례나 꿈속의 온양을 거쳐 위력이 이미 용각추 못지않았건만, 단 한 번의 충돌로 이만큼 손상을 입다니!

    그는 검배를 손에 쥐고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순양검배의 영성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검신(劍身)에는 푸른 반점이 나타나 있었고, 그 안에 담긴 강력한 봉인의 힘이 순양검배의 위력을 적잖이 봉인한 것이었다.

    “봉인 신통력이었군.”

    상황을 파악한 심협은 조금 안도하며 순양검배를 천책 공간에 거둬들였다.

    천책 공간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서 검신에 담긴 봉인의 힘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어서 심협이 천책의 힘을 움직여 검신 속에 담긴 푸른 봉인을 감싼 후 단번에 봉인을 벗겨내자, 순양검배가 일시에 영성을 되찾았다.

    심협이 손으로 끌어당기자 순양검배가 천책 공간에서 날아 나와 그를 감싸고 빙빙 돌며 날았다. 검신의 붉은 빛은 이미 원래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아니!”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에 이어 휙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돌 틈새로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인간의 머리에 용의 몸뚱이였고, 머리에는 반투명한 산호 같은 뿔이 두 개 돋아 있는 것이 용족인 듯했다. 무척 아름다웠지만, 표정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어 호감을 갖기는 힘들었다.

    ‘아니, 용녀 아기!’

    그때, 천책 공간 속에 있던 원구가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용녀 아기? 저 여인의 내력을 아시오?’

    심협은 전음으로 원구에게 물었다.

    원구는 대승기 산수답게 보고들은 것이 많아 언제든 묻고 답하기 편하도록 심협은 그의 고충 한 마리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덕분에 원구도 천책 공간 밖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미 원구의 신혼에 계약 표식을 심어놓았으니 배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타산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용녀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 여인은 보타산에 사는 물뱀으로, 관음대사의 교화를 받고 영지가 트인 뒤 늘 관음대사의 설법을 들으며 반룡의 몸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허나 이 용녀 아기는 천지분간을 못하는 자라, 득도한 뒤에 교만하고 우쭐거리기 시작해서 관음대사의 입실제자(*入室弟子: 스승과 함께 살면서 가족처럼 모든 것을 배우는 제자)로 행세하며 인간 세상에 나가 적잖이 말썽을 피우다가 제압당했다는군요. 한데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원구가 빠르게 말했다.

    “보타산 제자가 아니로구나. 너는 누구냐! 감히 우리 조음동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관음대사님의 보물을 훔쳐가려 하다니!”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조금 놀란 듯 심협을 훑어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몸에서 푸른빛을 미친 듯이 내뿜으면서 출규기 정점의 위압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이 즉시 공격할 기세였다.

    “용녀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지요. 방금은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대당관부 문하의 제자로, 의심스러운 자가 아닙니다. 이번에 조음동에 들어온 것도 사연이 있었습니다. 제 설명을 좀 들어…….”

    심협은 낯빛이 변하여 재빨리 섭채주가 준 영패를 꺼내 설명하려 했다.

    용녀 아기 또한 영패를 보고는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심협의 신분을 듣고는 갑자기 눈썹을 거꾸로 치켜세우고 손을 뒤집어 뾰족한 가시가 가득 달린 푸른색 채찍을 꺼내더니 힘껏 휘둘렀다.

    채찍은 한순간 바람을 안고 몇 배로 길어지더니 마치 거대한 용처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심협을 향해 휘몰아쳤고, 속도 또한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이르더니 맹렬한 광풍이 되어 달려들었다.

    심협은 법력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얼굴 살갗이 긁혀서 찢어질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는 얼굴빛이 살짝 변하여 재빨리 뒤로 물러나면서 소매를 휘둘렀다.

    자줏빛 커다란 구슬이 떠올라 순식간에 백배나 커지며 몸 앞을 막아섰다.

    땅!

    구슬에서는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와 푸른 채찍의 일격을 막아냈으나, 심하게 떨렸다.

    “용녀님, 노여움을 가라앉히시지요. 저는 정말 악당이 아닙니다. 보타산 장교제자(*掌敎弟子: 장문 문하의 제자)의 명을 받들어 이곳의 보물을 구하러 왔습니다. 지금 밖에는 실력이 막강한 요마 여럿이 조음동에 침입했습니다. 이 보물들이 있어야만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심협은 큰 소리고 해명했다.

    “흥! 네놈이 감히 보타산 제자의 영패를 빼앗고 관음대사님의 귀중한 보물을 노리는구나! 내 오늘 너를 살려두지 않겠다!”

    용녀 아기는 아예 심협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사나운 눈빛으로 다시 채찍을 휘둘렀고, 채찍 위에는 몽롱한 푸른 빛이 감돌았다.

    수백 줄기의 거대한 채찍 그림자가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온 하늘을 가린 채 물결처럼 휘몰아쳐 사방에서 덮쳐왔고, 그 위세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에 푸른 빛을 번쩍이더니, 채찍 그림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날렸다. 줄줄이 채찍 그림자들이 몸에 닿았지만, 바람처럼 스쳐갔다. 모두 환영이었던 것이다.

    “용녀님, 제가 무례를 범한 적도 없사온데 어찌 이리도 모질게 구십니까?”

    심협은 몇 장 떨어진 곳에 내려서서 공수했으나,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용녀 아기는 노여워하며 콧방귀를 뀌고는 왼손 손바닥을 가슴 앞에 세우고 푸른 채찍을 풍차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전창해(靛滄海)!”

    그녀가 짧게 외친 순간, 기다란 채찍 위로 눈부신 푸른 빛이 피어오르며 무수한 파도처럼 주위를 향해 휘몰아쳤다.

    이 빛 속에는 놀랍도록 차가운 힘이 담겨 있어서 지나는 곳마다 만물이 순식간에 얼어버리면서 두껍고 단단한 얼음으로 뒤덮였다.

    심협은 이를 악물었다. 이어 그의 두 발에서 달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고, 다음 순간 그는 잔상으로 변해 통로 쪽으로 번개처럼 날아갔다.

    그러나 푸른 파도가 더욱 빨라서 그는 절반 정도 물러나자마자 따라잡히고 말았고, 순식간에 단단히 얼어붙어 푸른 얼음조각상이 되었다.

    골짜기 전체가 눈 깜짝할 사이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눈과 얼음의 세계로 변해버렸다.

    용녀 아기는 우쭐한 표정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푸른 채찍은 마치 구렁이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매섭게 심협을 후려쳤다.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반드시 심협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기세였다.

    바로 그때, 단단한 얼음 속에 갇힌 심협의 몸에 적색, 금색, 자색, 황색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순양검배와 용각단추, 거대한 자줏빛 구슬 그리고 현황일기곤이 동시에 떠올라 각자의 위력을 떨쳤다. 이어 그의 몸에 맺힌 단단한 얼음에 수많은 균열들이 생기더니 얼음조각들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현황일기곤의 노란 빛은 미친 듯이 불어나더니 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채찍을 다시 막아섰다.

    “용녀님, 또다시 공격하신다면 저도 더는 참지 않겠습니다!”

    심협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수가! 너의 법력이 전창해의 한기에 얼어붙지 않았단 말이냐!”

    용녀 아기는 심협의 경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전창해는 보타산에서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는 물 속성 법술로, 대성의 경지까지 수련하면 모든 것을 얼려버릴 수 있다. 더욱이 한기가 상대의 몸속에 침투해 법력을 얼릴 수 있다. 한데 제법 심오한 경지에 이른 그녀의 전창해로도 심협의 체내 법력을 얼리지 못한 것이다.

    사실 진창해의 한기는 이미 심협의 몸에 침입했지만, 그에게는 천책이 있었다. 그는 즉시 천책의 흡수력으로 절반이 넘는 한기를 흡수한 상태이니 남은 한기로는 그를 얼릴 수 없었다.

    “청련인(靑蓮引)!”

    용녀 아기는 심협의 경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기다란 채찍이 마치 긴 뱀처럼 빙글빙글 맴돌았고, 골짜기 안의 온도가 다시금 갑자기 떨어지더니,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지닌 푸른 얼음 연꽃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빗방울처럼 심협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의 눈이 싸늘하게 번득이는가 싶더니 몸에서 녹색 빛이 퍼져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심협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을목선둔!”

    용녀 아기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녀의 뒤쪽 허공에 녹색 그림자가 스쳐 지나더니 심협이 불쑥 나타나 손가락을 굽힌 채 팔을 쭉 뻗자, 용각단추가 한 줄기 금빛으로 변하여 용녀 아기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용녀 아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차가운 미소를 내비쳤다. 그녀의 등 뒤에 푸른 빛이 스쳐 지나더니 크기가 1장에 이르는 푸른 얼음 연꽃 한 송이가 마치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불쑥 나타나 심협을 덮쳤다.

    안개 같은 푸른 빛줄기가 얼음 연꽃에서 폭발했고, 다른 연꽃들보다 열 배는 강한 한기를 머금은 이 빛줄기는 곧장 심협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심협의 몸에 금빛이 번쩍이더니 별안간 강력한 흡수력이 생겨나 푸른 얼음 연꽃을 역으로 휘감았다.

    푸른 얼음 연꽃은 번쩍하고 사라져버렸고, 그 너머로 무방비한 용녀 아기가 드러났다.

    용각단추가 변한 금빛은 피식 소리를 내며 용녀 아기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큭!”

    용녀 아기는 붉은 피를 왈칵 토해내며 나가떨어졌고, 푸른색 기다란 채찍도 손을 떠났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노여운 표정으로 양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자색 빛줄기가 먼저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자줏빛 부적이었다.

    이 부적은 몸에 붙자마자 곧바로 한 줄기 금빛이 되어 용녀 아기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그녀의 몸에 순간 금빛이 감돌더니 커다란 정(定)가 떠올랐고, 뒤이어 이 글자는 번쩍이며 여러 줄기의 금색 빛줄기로 변해 그녀의 몸 주위를 쉬지 않고 맴돌았다. 이 부적은 정신부였다.

    용녀 아기의 몸은 강한 속박력에 감싸여 즉시 뻣뻣하게 굳었고, 눈에는 깜짝 놀란 기색이 드러났다.

    심협은 손을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구부려 튕겼다. 그러자 가느다란 회색 침 아홉 개가 손에서 날아가 용녀의 단전 근처에 있는 아홉 군데 주요 혈자리에 박혔다.

    이것은 원구의 저물 법기에 있던 쇄원침(鎖元針)으로, 바늘 하나하나가 적의 법력을 봉인할 수 있는 극품법기였다.

    용녀 아기의 경지는 높고도 깊어서 정신부 한 장만으로는 그녀를 가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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