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신비한 궁전
‘저 진선 금제들 중 어느 것에 흑곰 요괴가 갇혀 있는지 알 수 없고, 알더라도 내게는 도울 능력이 없지만, 이 출규기 금제들을 뚫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심협은 속으로 가늠해본 뒤, 연못 속 금빛 구형 금제를 향해 현황일기곤을 휘둘렀다.
실체를 지닌 듯한 곤영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와 금빛 금제를 내리치자 쾅 하는 소리에 이어 반구형 금제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한편, 그 금제 안에서는 한 젊은 남자가 금빛 장막에 온갖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바로 백소천이었다.
한데 빛 장막이 갑자기 격렬하게 떨리자 그는 공격을 멈추었다.
“어찌 된 일이지? 방금 누가 밖에서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는데……?”
백소천이 눈빛을 반짝였다.
안타깝게도 금빛 금제를 꿰뚫어볼 수가 없었으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벌리고 금부채 하나를 꺼냈다. 바로 화룡점정선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부채를 쥐자 표면에 금빛이 도는 노을빛이 세차게 용솟음치면서 화룡점정선이 한순간 몇 배로 미친 듯이 불어났다. 표면에는 무수한 금빛 부적 문양들이 떠올랐고, 광채가 흐르면서 세 겹의 금빛 광염(光焰)을 이루었다.
“불광연(佛光燃)!”
백소천의 팔뚝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그 상태로 거대한 부채를 붙잡아 양손으로 휘두르며 온 힘을 다해 일격을 가했다.
부채 안에서 무수한 금색 노을빛이 쏟아져 나와 집채만 한 빛 덩어리가 되었다. 그 깊숙한 곳에는 만(卍)자 부적 문양이 나타났고, 주위에는 밝은 화염이 놀라운 기세로 불타올랐다.
금색 빛 덩어리는 나타나자마자 유성처럼 날아가 금색 빛 장막을 때렸다.
콰르릉!
커다란 굉음과 함께 금색 빛 장막이 거세게 떨렸다. 그러나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때, 빛 덩어리 속의 만 자 부적 문양이 튀어나오더니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금색 빛 장막에 꽂혔다.
사람 머리만 한 이 문양이 명중하자, 금색 빛 장막이 미친 듯이 떨리더니 순식간에 균열들이 생겨났다. 그 위력은 놀랍게도 금색 빛 덩어리보다 몇 배나 강력했다.
불광연은 화생사의 비술 중 하나로, 그 밝은 황색 화염은 훼멸명왕(毁滅明王)의 분노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금제 밖에서는 심협이 갈라진 금제를 보며 기쁜 얼굴로 현황일기곤을 휘둘러 발천난봉을 시전했다.
64줄기 곤영이 떠올라 거세게 내리치자, 이미 한계에 다다른 금색 빛 장막은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마침내 부서지고 말았다.
콰르르!
바스러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금색 빛 장막이 흩어지면서 백소천의 모습이 드러났다.
“심형, 자네였군. 정말 고맙네.”
백소천은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심협에게 돌리며 공수했다.
“별것 아니었소. 무사하니 다행이오.”
심협이 손사래를 쳤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금제들에 갇혀 있는 것…… 아니, 심협 자네! 출규 중기를 돌파했군?”
백소천은 주의 다른 빛 장막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심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놀라서 말했다.
“선행 덕이오. 그보다, 먼저 힘을 합쳐 채주를 구해냅시다.”
심협은 간단하게 답하고는 하얀색 구형 빛 장막으로 달려갔다.
백소천은 심협의 경지가 발전한 것에 놀라긴 했지만, 지금이 그 일을 이야기 할 때는 아니었기에 급히 따라왔다.
심협과 백소천의 힘에 빛 장막 속 섭채주의 공격이 더해지자 금제는 손쉽게 무너졌다.
“오라버니, 백 도우…….”
섭채주가 놀랍고도 기쁜 표정으로 금제 안에서 날아 나왔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심협은 섭채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긴장이 풀리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정말 조음동 안인가?”
백소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사문에 전해지는 말로는 조음동 안에 관음대사(觀音大士)님께서 개척하신 비경이 있다는데, 여기가 아닐까요?”
섭채주도 사방을 둘러보고는 답했다.
“그렇군요. 한데 조금 전에 밖에서 자죽림 속 양의미진환진의 위력이 갑자기 폭증하더니,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서 우리를 갈라놓았지요. 그리고는 조음동 대문 위의 금제가 갑자기 폭발하면서 우리 모든 사람을 휘감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십니까?”
백소천이 다시 물었을 때, 마찬가지로 이 일이 몹시 궁금했던 심협도 섭채주를 돌아보았다. 앞서 본 대로라면 이 일은 분명 섭채주와 관계가 있을 터였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밖에서 그 노인이 달려들기에 호법 선배님께서 주신 깃발을 작동시켜서 양의미진환진을 통제해 맞서려고 했지요. 그런데 서두르다보니 실수를 한 것인지 양의미진환진의 위력이 갑자기 폭증했어요. 이후 어쩌다보니 조음동 입구에 이르렀는데, 하얀 깃발이 조음동의 금제와 공명하면서 비경 입구의 금제가 폭발해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빨아들인 거예요.”
섭채주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리 된 것이군요. 그 요족들이 조음동에 들어왔으니 상황이 대단히 안 좋습니다.”
백소천이 남은 다섯 금제의 빛 장막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섭채주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크게 자책했다.
“알고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느냐.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심협이 섭채주를 다독였다.
“맞습니다. 이건 섭 도우 잘못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데…… 이제 어찌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이 아직 안 나왔을 때 먼저 힘을 합쳐 호법 선배님을 풀어드릴까?”
백소천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건 힘들 것 같소. 진선 금제들은 너무 현묘해 호법 선배님이 어디에 계신지 꿰뚫어볼 수 없소. 만일 사람을 잘못 풀어주었다가는 우리는 죽어서도 묻힐 곳조차 없을 거요. 내 생각에는 저들이 갇혀 있는 틈에 우리가 먼저 관음대사께서 숨겨둔 보물을 찾으러 가는 것이 나을 듯하오. 그래야 보물이 저 도적놈들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우리도 목숨을 지킬 수 있지 않겠소? 보물이야 위험에서 벗어난 뒤에 보타산에 넘겨드리면 될 테고…….”
“심형의 말이 옳아.”
백소천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우리가 떠난 뒤에 만일 요족 중 누군가 먼저 나와서 다른 요물들을 풀어주고 호법 선배님을 협공하면 어찌합니까? 아! 그 요족들은 모두 다섯이었고 호법 선배님까지 더하면 금제가 여섯 개 남았어야 하는데…… 어찌 다섯 개뿐일까요? 전송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걸까요?”
섭체주가 불쑥 끼어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의아한 듯 물었다.
“금제 수량에는 틀림이 없다. 내 기습으로 그 비쩍 마른 노인을 죽였거든. 그리고 호법 선배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어르신은 워낙 출중하시니 저들이 힘을 합쳐 포위공격을 한다 해도 스스로를 보호하실 수 있을 게야.”
심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섭채주와 백소천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승기 수사와 출규기 수사는 가히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앞서 시련에서 그 여러 명이서 대승기 두꺼비 요괴에 맞서서 목숨 부지하기도 벅찼는데, 심협이 홀로 대승기 수사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섭채주는 깜짝 놀라면서도 마치 자기 일처럼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편, 백소천은 만감이 교차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일단 여기를 떠납시다.”
심협은 말을 돌리고는 광장 맞은편의 하얀 궁전으로 날아갔다.
백소천과 섭채주도 말없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세 사람은 곧 하얀 궁전 앞에 내려섰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 하얀 궁전의 장관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는데, 표면에는 금빛 부적 문양들이 촘촘이 새겨져 있었다. 그중에는 불가의 진언이 어렴풋하게 보여서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그곳의 불력(佛力)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궁전의 구조는 무척 기괴했다. 대문은 없고, 정면에는 깊은 곳으로 통하는 기다란 통로가 하나 있었고, 통로 안쪽 멀지 않은 곳부터 어두워서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누이, 보타에서 이곳에 대해 들은 것이 있어?”
심협은 통로 안 깊숙한 곳을 두어 번 들여다보고는 물었다.
“조음동에 대해서는 관음조사께서 여러 해 전에 보타산을 떠나실 때 보물들을 이곳에 봉인해두셨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자세한 이야기는 사부님께서도 말씀해주신 적이 없어요.”
심협은 그 말에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은밀히 팔현경과 자줏빛 구슬을 꺼내 들고는 앞장서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섭채주와 백소천도 보물을 꺼내 몸을 보호하며 그 뒤를 바짝 따랐다.
통로는 제법 길었고, 세 사람은 감히 서두를 수 없었기에 한참 뒤에야 끄트머리에 이르러 엷은 금빛을 뿜어내는 출구를 발견했다.
세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고는 일제히 출구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눈앞이 아득해지더니 대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대전은 너비가 무려 50여 장에 이르렀고, 매우 웅장하고 으리으리했으며, 한가운데에는 마치 진짜 사람처럼 생동감 넘치는 관세음보살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관음 조각상 뒤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통하는 세 갈래 통로가 있었다.
섭채주는 관음 조각상을 보고 즉시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고, 심협과 백소천도 감히 예를 소홀히 하지 못하고 얼른 절했다.
“이곳에는 세 개의 통로가 있는데, 여기 조음동은 관음대사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이니 보물들은 그 앞에 있을 것이오.”
심협은 몸을 일으키고 세 개의 통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희미하게 반짝였다.
“요괴들이 언제 금제를 뚫고 나올지 알 수 없으니 흩어져서 최대한 빨리 보물을 찾도록 하지요.”
섭채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심협과 백소천도 이견이 없었다.
“이것은 보타산의 영패인데 하나씩 가지고 계십시오. 아마 보물을 지키는 수위들이 있을 텐데, 그럼 그걸로 신분을 밝힐 수 있을 거예요.”
섭채주는 백옥 영패 두 개를 꺼내 심협과 백소천에게 건넸다.
“역시 섭 도우는 참으로 세심하오.”
백소천은 영패를 받으며 웃었다.
심협도 영패를 받아 잘 챙겼다.
세 사람은 곧 각자 통로를 하나씩 정했다. 백소천은 심협이 비쩍 마른 노인을 죽였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았는지 불타오르는 눈으로 제일 먼저 출발하여 오른쪽 통로로 몸을 날렸다.
심협은 가장 왼쪽 통로를 택했다. 한데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섭채주가 불러 세웠다.
“누이, 무슨 일이야?”
심협이 다정한 목소리로 의아한 듯 물었다.
“제게 보도중생부(普渡衆生符)가 한 장 있는데, 양류감로부(楊柳甘露符)처럼 기이하지는 않지만 법력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어요. 지니고 계십시오.”
섭채주가 위에 꽃송이 도안이 그려진 녹색 부적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심협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이전에 직접 양류감로부의 효력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이 보도중생부도 분명 뒤떨어지지 않을 테니 중요한 순간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
“이 부적들은 은신부와 둔지부다. 가지고 있으려무나.”
심협도 곧 부적 두 장을 꺼내 건넸다.
섭채주도 사양하지 않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는 가운데 통로로 날아 들어갔다.
심협은 심호흡을 하고는 팔현경을 꺼내 몸을 보호하며 날아갔다.
곧 통로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빛이 밝아지면서 고즈넉한 협곡이 나타났다.
콸콸콸 물 흐르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맑은 개울물이 골짜기 안에서부터 굽이굽이 지나갔다. 그 끝에는 푸르른 연잎들이 무성했는데, 그 사이로 크기가 맷돌만 한 분홍빛 연꽃 한 송이가 은은한 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광경은 마치 그림과도 같았다.
심협은 어리둥절했다. 이곳은 분명 궁전 내부인데 어찌 이런 깊은 골짜기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환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