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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18화 (518/1,214)
  • 518화. 본명고(本命蠱)

    깡마른 노인의 뒤쪽 10여 장 바깥의 하얀 안개에서는 심협이 허공에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진해주가 떠 있고, 앞에는 작고 하얀 깃발이 두 개 있었다. 바로 운수진의 진기였다.

    흡혈귀와 귀장은 각각 그의 뒤에 좌우로 서서 삼재(*三才: 우주와 인간의 기본 구성요소. 하늘과 땅과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도 각자 진기를 두 개씩 든 채 동시에 몸속의 힘을 내보내 운수진을 통하여 심협의 몸에 주입했다. 둘의 경지는 제법 깊고 튼튼했다. 특히 귀장은 이미 출규 후기에 도달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협의 몸에서는 강력한 법력이 솟아오르기 시작해 놀랍게도 출규 후기 경지에 이르렀다.

    그 상태로 그는 왼손을 결인해 물을 조종하면서 오른손은 뒤집어 오화선을 꺼내 세차게 부채질했다.

    낭랑한 울음소리 속에 집채만 한 붉은 봉황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기다란 화염 꼬리로 하얀 안개를 찢으며 날아가더니, 번쩍하고 허공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순간, 마르고 초췌한 노인의 등 뒤 안개 속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느닷없이 붉은 화봉이 나타나 사납게 돌진했다.

    “헉!”

    노인은 그제야 화봉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안색이 크게 변하여 양손을 재빨리 휘둘렀다.

    그의 앞에 있던 솥뚜껑 법보가 여러 줄기 잔상을 드리우더니, 화봉이 몸 가까이 다가들기 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았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영압을 뿜어내는 불바다가 펼쳐졌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거대한 화염이 성난 파도처럼 솟구쳐 나와 솥뚜껑 법보와 충돌했다.

    비쩍 마른 노인은 법보와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고, 솥뚜껑 모양 법보 위의 황토색 빛이 심하게 떨리면서 순식간에 여러 줄기의 균열이 생겨났다.

    비쩍 마른 노인은 대경실색했지만, 그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뒤편의 안개 속에서 노란 곤영 64줄기가 빠르게 날아왔다. 곤영 하나하나마다 가공할 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64줄기의 거대한 힘이 한곳에 모여들더니 거세게 내리쳤다.

    노인은 표정이 급변하여 결인하더니 다시 솥뚜껑 법보를 움직여 곤영에 맞섰다.

    꽝!

    곤영이 솥뚜껑을 내리치자 천둥 같은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솥뚜껑 법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비쩍 마른 노인도 곤영에 가격당해 가슴뼈가 몇 개나 으스러져버렸다.

    “크아악!”

    노인은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붉은 피를 한 모금 내뿜었다.

    이 충격으로 노인의 두 다리를 억누르던 법력이 잠시 흩어지면서 두 줄기 붉은 화염이 그의 다리에서 새어나와 빠르게 위로 번져갔다.

    노인은 놀라고 화가 났지만, 곧 상대방이 자신의 두 다리에 있는 기이한 불길로 자신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있다는 것과 계속 제자리에 머물렀다가는 표적이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상처를 회복하는 단약 한 알을 꺼내 먹고는 법력을 모조리 운행하여 두 줄기 홍련업화를 진압했다. 그리고는 감히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앞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때, 앞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비검 하나가 소리 없이 불쑥 튀어나와 번개처럼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 노인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반응은 여전히 기민해 몸을 영사(靈蛇)처럼 비틀어 붉은 비검이 비껴가게 했다.

    그 순간, 무수한 홍련 화사(火蛇)들이 화염에서 튀어나와 노인의 체내 곳곳으로 벌떼같이 파고들었다.

    노인은 혼비백산하여 온몸에서 검은 빛을 미친 듯이 번쩍였다. 그러자 작고 검은 깃발과 노란 옥책 한 권이 날아와 재빠르게 두 줄기 빛의 장막으로 변해 노인의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이미 한 발 늦었는지 적잖은 홍련 화사가 그의 체내로 녹아든 뒤였다.

    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얼굴에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붉은 빛이 떠올랐고, 두 눈에 홍련의 불길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폭발해버렸다.

    퍽!

    섬뜩한 소리와 함께 노인의 두 눈은 얼음 녹듯 사라져 두 개의 검은 구멍이 되어버렸고, 순식간에 숨이 끊어져 털썩 쓰러졌다. 검은 깃발과 노란 옥책도 땅에 떨어졌다.

    하얀 안개 속에서 인영이 어른거리더니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심협이 노인의 시신 곁에 나타났다.

    현천화공결로 홍련업화를 조종한 끝에 그는 드디어 홍련업화의 위력 일부를 발휘할 수 있었고, 대승기 존재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이번 전투의 절반 이상은 주위의 금제 덕분이었지만, 어쨌든 홍련업화의 위력은 놀라웠다.

    심협은 기쁨을 억누르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는 <약선집>에서 고사(*蠱師: 고충을 부리는 사람)의 시신은 매우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어떤 고충들은 고사를 따라 죽지 않고 키워준 주인의 몸을 물어뜯으며 더욱 난폭하고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손을 휘둘러 푸른 빛 한 줄기를 발사하여 노인의 시신을 휘감았다.

    파드득!

    노인의 시신에서 각양각색의 벌레 떼가 솟구쳐 올라 심협에게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노인의 시신에서 검은 빛 한 줄기가 이 고충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심협이 내보낸 푸른 빛을 따라 튀어나왔다. 그것은 모기처럼 작고 가느다란 검은 벌레였다.

    심협은 미리 잔뜩 경계하고 있던 터라 곧장 결인했고, 그러자 머리 위에서 푸른 빛을 번쩍이며 팔현경이 나타났다. 이어 푸른 빛의 장막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고충들은 한순간 가로막혔으나, 검고 작은 벌레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면서 검은 기운으로 변하더니, 푸른 빛의 장막을 곧장 뚫고 계속해서 돌진했다. 이 벌레는 눈 깜짝할 사이 심협의 팔뚝에 이르렀다.

    검은 벌레가 입을 쩍 벌리니 놀랍게도 온갖 빛깔의 어두운 빛을 번쩍이는 이빨이 빼곡했는데, 각각이 맹독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벌레가 손바닥을 매섭게 깨물려는 순간, 심협은 깜짝 놀라 곧바로 천책의 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몸에 금빛 책 그림자가 스쳐 지났다. 이 작고 검은 벌레는 순식간에 금빛 공간으로 사라졌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 검은 벌레에게 물려 고독에 중독되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아주 성가셨을 터였다.

    “저 벌레는 무엇이기에 팔현경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거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식으로 천책 공간의 상황을 살폈다. 이곳의 금제는 신식이 뻗어나가지 못하게 하기는 해도, 몸에 지닌 저물법기를 감지하는 것은 가능했다.

    “여…… 여기는 어디지?”

    금빛 공간 속, 검은 벌레는 주위를 둘러보며 뜻밖에도 사람의 말을 했다. 그 목소리는 바로 비쩍 마른 노인의 것이었고, 벌레의 얼굴에는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이 벌레가 설마 저 노인의 본명고(本命蠱)인가?”

    심협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약선집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고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몸 밖에서 고충을 단련시키는 것으로, 고충을 건곤대와 비슷한 영수대(靈獸袋) 안에 거둬두었다가 필요할 때 풀어놓는다. 다른 방법은 몸속에서 고충을 단련시키고 자신의 정혈로 고충을 키우는 경우 강력한 고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체외 연고(煉蠱) 방법은 비교적 안전하여 고충이 자신에게 역으로 해를 끼칠까 염려할 위험이 줄지만, 대신 평범한 고충만 만들어낼 수 있어 위력은 크지 않았다. 반면 몸속에서 고충을 단련시키면 강력한 고충을 키워낼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위험하다.

    자칫하면 몸에 큰 손상을 입게 되고, 이렇게 단련해낸 고충은 영수대에 거둬들일 수 없어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정혈을 통해 수시로 온양해야 했다. 고충의 위력이 강력한 만큼 공격성도 지극히 강해 언제든 주인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고사들이 택하는 방법은 본명고를 만드는 것이었다. 본명고는 체내의 고충들과 목숨줄이 서로 이어져 있다. 본명고가 죽으면 다른 고충들도 모두 죽게 되기에, 본명고로 고충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효율적으로 고충들을 통제하기 위해 본명고 안에는 고사의 분열된 신혼이 담겨 있어 하나의 독립된 분신과 흡사했다.

    이 작고 검은 벌레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주변 금빛 공간에서 강한 속박의 힘이 흘러나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그를 단단히 가둬놓았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더니 손을 들어 검은색 작은 깃발과 노란 옥책을 빨아들였다. 이 법기들을 잠깐 살펴본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 가지 모두 극품법기로, 품질이 오화선과 현황일기곤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둘 다 방어법기라는 점에서 더욱 귀했다.

    그는 두 물건을 거둬들이고는 또다시 푸른 빛을 한 줄기 뿜어내 비쩍 마른 노인의 시신과 그 주위에 있는 고충들도 천책 공간 속에 챙겨 넣으려 했다.

    한데 뜻밖에도 갑자기 강력한 저항력이 일어나 흡수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는 가벼운 탄성을 내지르며 더 많은 법력을 불어넣었지만, 그래도 성공하지 못했다.

    무려 7할에 가까운 법력을 천책에 주입한 후에야 노인의 시신과 고충들을 천책 공간에 거둬들일 수 있었다.

    흡수를 막는 저항력의 근원은 고충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심협은 곰곰 생각해보더니 곧 원인을 깨달았다. 그 고충들은 모두 살아 있는 생물이고, 숫자도 많다. 한데 그의 천책은 허상에 지나지 않아 생명이 없는 물체를 흡수하기는 쉬워도 살아 있는 생명을 흡수하는 데에는 애를 먹은 것이다.

    심협은 신식을 다시 풀어 천책 공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고충들은 천책의 힘에 속박당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간 속, 금빛이 모여들면서 이윽고 심협의 분신 허상을 이루었다.

    “그대가 이 노인의 본명고요?”

    심협은 검고 작은 벌레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검은 벌레는 작은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멀지 않은 곳의 바싹 마른 시신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는 즉시 눈을 감고 보통 벌레인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시오. 내 이미 그대가 혼잣말하는 것을 다 들었소.”

    심협이 차갑게 웃었다.

    검은 벌레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게 몸을 떨었으나, 계속 못 들은 척했다.

    “그냥 벌레인 모양이군. 벌레는 때려잡아야지. 아니, 태워버릴까?”

    심협은 낯빛을 싸늘하게 굳히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순양검배를 천책 공간으로 거둬들였다.

    홍련업화 한 덩이가 떠올라 사나운 기세로 이 검은 벌레를 향해 뻗어갔다.

    “아, 안 돼! 말하겠습니다. 제가 바로 원구가 단련시킨 본명고입니다.”

    검은 벌레는 감히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못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황급히 답했다. 그는 이미 홍련업화의 무서움을 알고있었다.

    검은 벌레는 젖 먹던 힘을 다해 홍련업화에서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천책 공간의 속박력은 매우 강해서 자그마한 벌레인 그로서는 그저 격하게 꿈틀거릴 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심협이 손을 들어 홍련업화를 멈춰 세우자 검은 벌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협이 다시금 손짓하자 비쩍 마른 노인의 시신에서 노란 반지와 푸른 영패, 검은색 작은 주머니가 날아 나왔다.

    이것은 노인의 시신에서 고충과 옷을 제외하고 남은 모든 것이었다.

    “진작 이리 협조적으로 나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

    심협은 노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귀하께서는 저를 어찌 처리하실 계획이신지요?”

    검은 벌레가 심협을 쳐다보았다.

    “그건 내 마음이오.”

    심협은 느긋하게 답했다.

    “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기면 왕이요, 지면 역적인 법! 귀하가 원구에게 이겼으니 죽이든 살리든 편할 대로 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허나 지금까지 살려두신 걸 보니 분명 제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거겠지요?”

    검은 벌레가 비굴한 듯하면서도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명하군. 내 귀하에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긴 하지. 귀하는 인간족 수사인데 어찌하여 요족들과 함께 보타산에서 소란을 피운 게요?”

    심협의 질문에 검은 벌레는 빤히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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