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거대한 짐승
“일단 잠시 물러나 상황을 정확히 살펴본 뒤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심협은 잠깐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하고는 백소천과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 왼쪽 전방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그 순간 심협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다름 아닌 섭채주의 비명이었던 것이다.
심협의 머리 위에 있던 순양검배가 빛을 크게 내뿜으며 그의 몸을 감싸고는 순식간에 붉은 검홍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백소천도 이 모습을 보고는 몸에서 금빛을 내뿜으며 즉시 쫓아갔다.
붉은 검홍은 검은 요기를 손쉽게 찢어발기고는 눈 깜짝할 사이 수십 장을 날아갔다.
심협은 온 힘을 다해 유명귀안을 운공해 주위를 살폈고, 그의 두 눈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명귀안은 이런 요기를 꿰뚫어보는 데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냥 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멀리 볼 수 있었다.
몇 군데 전투가 벌어진 곳을 지나친 그는 이내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날아올랐다. 섭채주로 보이는 하얀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섭채주의 아랫배에는 사발만 한 구멍이 뚫려 피가 콸콸 쏟아져나와 치마를 붉게 물들였다.
앞쪽의 검은 요기 속에서는 자줏빛이 번쩍이더니, 커다란 그물이 벼락을 휘감은 채 날아와 눈 깜짝할 사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그물로 변해 그녀를 덮쳐왔다.
그 커다란 그물 뒤에는 자줏빛 옷을 입은 요족 사내가 서 있었다. 머리에는 외뿔이 돋아 있었는데, 세모꼴 눈에는 흉악한 빛이 가득했다. 조금 전에 나타난 대승기 요족이었다.
그 요족은 손에 새까만 베틀 같은 법보를 들고 있었다. 그 법보는 흔들릴 때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날아든 터라 섭채주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허나 그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은빛 비단 띠가 몸을 감싸고 춤추듯 휘날리며 여러 줄기의 은빛을 만들어내 그 검은 그림자들을 막아냈다. 뒤이어 그녀가 다른 손을 뒤집어 휘두르자 하얀 곤봉 하나가 날아가 자줏빛 커다란 그물에 맞섰다.
곤봉 끄트머리에는 검고 하얀 두 가지 색의 기이한 구슬이 박혀 있었는데, 어떤 신통력인지 흑백의 빛을 거세게 내뿜어 거대한 흑백태극도(黑白太極圖)를 이룬 채 번쩍이며 자줏빛 거대한 그물과 부딪쳤다.
눈부신 빛이 태양처럼 폭발해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줏빛 번개 그물은 놀랍게도 태극 도안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태극 도안은 몇 호흡 버티지 못하고 이내 부서졌고, 하얀 곤봉도 튕겨 날아가 검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일월광화봉(日月光華棒)! 보타산에서 이런 선봉(仙棒)을 네게 주었을 줄이야. 허나 네 실력은 약해빠져서 그 위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구나. 죽어라!”
자줏빛 옷의 거한이 차갑게 웃고는 다섯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러쥐었다.
자줏빛 그물에서 우렛소리가 크게 일어나더니 굵직한 자줏빛 번개 수십 줄기가 쏘아져 나와 섭채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섭채주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몸 주위의 은빛 비단 띠를 애써 움직였지만, 비단 띠는 상대의 검은 베틀에 꽁꽁 감긴 상태라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자줏빛 벼락은 갑자기 몇 배나 불어나서 반경 수십 장을 뒤덮어 섭채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었고, 곧 자줏빛 천둥번개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쉬잇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뒤편의 검은 요운(妖雲) 속에서 울렸고, 동시에 집채만 한 자줏빛 구슬이 번쩍하고 섭채주의 머리 위까지 날아와 자줏빛 천둥번개의 공격을 막아냈다.
우르릉!
커다란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자줏빛 태양이 폭발하여 근처의 검은 요운을 찢어발겼고, 허공까지 요동쳤다.
하지만 자줏빛 구슬은 그저 몇 번 심하게 흔들렸을 뿐, 상처 하나 남지 않고 멀쩡했다.
“뭐, 뭐야!”
자줏빛 옷의 거한은 깜짝 놀라 거의 백치처럼 멍하니 외쳤다.
그의 자줏빛 번개 그물은 무려 20도 금제가 걸린 법보였다. 그런데도 저 자줏빛 구슬을 털끝만큼도 상하게 하지 못하다니, 저것은 도대체 어떤 보물이란 말인가?
거한의 눈에 한 가닥 탐욕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손가락을 결인하자 자줏빛 번개 그물이 곧바로 떨어져 내려와 그 커다란 자줏빛 구슬을 뒤덮었다.
그때, 섭채주 옆의 검은 요운 속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거대한 용과 같은 붉은색 검홍이 날아와 자줏빛 옷의 거한을 베었다.
그러나 거한은 눈가를 꿈틀했을 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검홍의 위력이 작지는 않았지만, 뿜어내는 기운으로 보아 겨우 출규기 수사가 시전하는 신통력일 뿐이니 대승기 요족인 자신이 신경 쓸 것 있겠는가!
자색 옷의 거한이 손을 뒤집자 무시무시한 번갯불이 번득였고, 그 위세가 자줏빛 번개 그물과 새카만 베틀보다도 위인 자줏빛 뇌추(雷錘)가 나타났다. 거한은 뇌추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붉은 검홍을 향해 휘둘렀다. 여전히 다른 손으로는 자줏빛 번개 그물로 거대한 구슬을 속박하는 중이었다.
콰르릉!
굉음과 함께 수만 갈래의 자줏빛 번갯불이 뇌추에서 터져 나와 반경 수십 장을 온통 환하게 비추었다!
뒤이어 붉은 검홍이 마디마디 부서지면서 심협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낯빛은 창백했고, 입가에는 핏줄기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두 발에 달빛을 번쩍이며 자색 옷의 거한을 향해 돌진했다. 손에는 검노랑 그림자가 스쳐 지나면서 64줄기 곤영이 나타났다.
허공이 심하게 일렁이면서 아지랑이 같은 곤영들이 한데 이어져 마치 빠르게 회전하는 거대한 맷돌처럼 거한을 정면으로 덮쳤다.
자색 옷의 거한은 순간 어깨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마치 거대한 산에 짓눌린 것처럼 일순 몸이 무거워져 사지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낯빛이 시커멓게 변한 그는 이제야 경계하는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양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자줏빛 구슬을 덮었던 번개 그물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위로 치솟아 곤영들과 맞부딪쳤다.
쿠르릉! 쾅! 꽈르릉!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이전에 섭채주를 공격했을 때보다 더 굵고 커다란 자줏빛 번개가 곤영을 매섭게 내리쳤다.
그러나 64줄기의 곤영은 살짝 회전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무섭도록 거대한 힘이 쏟아져 나와서, 마치 맷돌로 콩을 가는 것처럼 모든 자줏빛 천둥번개를 산산조각으로 갈아버렸다. 천둥번개가 휘감긴 그물은 찢기고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군데군데 구멍이 생겨난 채로 튕겨나갔다.
반면 64줄기 곤영은 그저 잠깐 멈췄을 뿐, 이내 다시 떨어져 내렸다.
양손에 번갯불을 번득이면서 어떤 신통력을 펼치려던 자색 옷의 거한은 안색이 급변하더니, 즉시 손에 번갯불을 흩어버리고는 몸에서 자주색 번개를 내뿜었다. 그의 몸은 빠르게 팽창했고, 손과 발에서는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이 자라났으며, 피부 위로 자주색 비늘이 돋아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키가 30여 장에 이르고 머리에 굵은 외뿔이 달린, 흉악하고 거대한 짐승으로 변했고, 몸에는 자주색 비늘갑옷이 덮여 있었다.
“쿠오오오!”
자줏빛 비늘의 거대한 짐승은 한 차례 포효했다. 이마의 굵은 외뿔에서는 갑자기 자주색 번갯불이 불어나 엄습해오는 64줄기 곤영을 찔렀다.
무시무시한 자주색 번갯불이 폭발하면서 반경 수십 장을 눈부시게 비추어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우렛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거대한 짐승의 외뿔에서 굵기가 맷돌만 한 벼락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벼락의 끄트머리는 날카로운 뿔 모양이라 지나쳐가는 곳마다 허공에 마치 찢어진 것 같은 검은 자국이 생겨났다.
이 엄청난 위력의 자줏빛 벼락은 순식간에 십여 장을 뛰어넘어 곤영들과 맞부딪쳤다.
꽈르릉!
벼락은 힘겹게 곤영들을 관통했고,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곤영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큭!‘
심협은 피를 왈칵 뿜어내며 뒤로 튕겨나갔다.
그러나 벼락도 폭발하면서 무수한 벼락들로 갈라져 널리 퍼져 나갔고, 짐승의 몸뚱이도 크게 흔들리면서 비틀비틀 물러났다.
한데 그때, 붉은 비검 한 자루가 온 하늘을 뒤덮은 번갯불 사이에서 나타났다. 순양검배는 나타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짐승을 매섭게 찔러 들었다.
자줏빛 비늘의 거대한 짐승은 감히 더는 심협을 우습게 볼 수가 없었기에 가까스로 몸을 옆으로 움직였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순양검배가 짐승의 비늘갑옷을 꿰뚫고 그의 앞다리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짐승의 앞다리에서는 울컥울컥 피가 흘러내렸다.
자줏빛 비늘의 거대한 짐승은 의외로 상처가 깊지 않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흥! 겨우 이것뿐이냐?”
비검이 찌른 곳은 급소가 아니었고, 검이 길지도 않아 뼈에도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처는 전투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한데 형편없이 튕겨나간 심협은 오히려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뒤이어 그는 양손을 불꽃 모양으로 빠르게 결인했다.
그 순간, 순양검배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거대한 홍련업화가 솟구쳐 나와 빙그르르 회전하며 두 마리의 홍련 화망(火蟒: 불구렁이)이 되었다. 그리고는 단번에 짐승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앞발을 타고 그의 머릿속으로 돌진했다.
심협은 발천난봉이 아무리 정묘하다 해도 지금 자신의 경지로는 저 거대한 대승기 요물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덫을 놓았다. 앞서 시도한 연이은 공격 모두가 마지막 순양검배의 일격을 위한 것이었고, 오직 홍련업화만이 진정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터였다.
홍련화망이 지나가자 짐승의 발은 빠른 속도로 마비되어 마치 자기 것이 아닌 양 감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짐승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몸에 돋은 비늘을 살짝 펼치더니, 온몸에 자줏빛 벼락이 감돌게 하여 이 두 줄기의 홍련업화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홍련업화는 천화(天火)였고, 심협은 꿈속에서 현천공화결을 익힌 터라 그 위력이 크게 증가한 상태였다. 이에 홍련업화는 벼락의 방해를 뚫고 나와 거대한 짐승의 머릿속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짐승의 머릿속에 있던 요혼(妖魂)은 쏜살같이 다가드는 홍련업화에 소스라치게 놀라 마치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몹시도 두려워했다.
“쿠오오오!”
거대한 짐승은 미친 듯 울부짖더니 뒤를 향해 날아가며 입을 쩍 벌리고 자주색 뇌인(雷刃)을 내뿜어 순양검배에 찔린 앞발을 베었다. 앞발은 순식간에 어깨까지 잘려나가면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신 그는 두 줄기 화염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대한 짐승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뒤로 날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심협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도 그 거대한 짐승의 뒤를 쫓지 않고 손을 흔들어 순양검배와 커다란 자줏빛 구슬을 불러들인 뒤, 섭채주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섭채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막 다가온 백소천이 섭채주의 상태를 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갑시다!”
심협이 짧게 외치며 고개를 치켜들자 붉은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집어삼키고 붉은 검홍으로 변하여 어디론가 날아갔다.
시커먼 요운은 빠르게 확산되어 이미 보타산 종문 태반을 파묻었고, 무려 만 마리에 가까운 범과 표범, 이리, 곰 등의 요족들이 구름 속에서 솟아나왔다.
개중에는 출규기와 응혼기의 강력한 요물들도 아주 많았는데, 소리를 듣고 달려온 보타산 제자들과 한데 뒤엉켜 싸웠다.
정갈했던 종문 곳곳에 고함소리가 가득했고, 거의 매순간 사람이나 요괴가 목숨을 잃었다.
“흑룡담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있네. 남해의 제법 큰 요족 세력인데, 인원은 절대 이 정도로 많지 않아. 보아하니 흑룡담과 다른 요족 세력이 손을 잡은 듯하군. 저들이 보타산을 멸망시키려는 것일까?”
백소천은 안색이 변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