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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12화 (512/1,214)
  • 512화. 격돌

    이튿날 보타산 광장에는 선행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이제 이 자리에서 선행의 소유권을 선언하고 대회는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높은 단상 위에 차려진 제사상 위에는 하얀 옥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비둘기 알만 한 선과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선과는 얼핏 살구 같았으나, 안에서 반짝이는 금빛이 새어나와 더없이 비범해 보였다.

    옥갑은 전체가 하얀 종 모양의 빛 덮개로 덮여 있어 시선을 끌었다.

    심협은 일찌감치 와서 설레는 눈으로 단상 위에 놓인 선행을 바라보았다.

    체내의 혼란스러웠던 본명원기는 이미 깨끗하게 정제되었으니 선행을 손에 넣기만 하면 수명 문제는 곧장 해결될 터였다.

    “심형, 축하하네.”

    백소천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는 심협의 몸상태를 알았기에 심협이 선행을 얻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고맙소.”

    이어서 건강을 회복한 정균과 임천천, 참월 등도 잇달아 심협에게 비경에서 목숨을 구해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축하를 건넸다.

    멀지 않은 외진 곳에는 두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는데, 바로 이숙과 류청이었다. 두 여인은 멀찍이서 인파 속의 심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 오라버니가 정말로 우승을 거머쥘 줄은 몰랐어요.”

    이숙이 미소를 머금자 눈썹이 반달처럼 곱게 구부러졌다.

    “심협이 재주가 좀 있긴 하더군요.”

    류청도 웃으면서 답했다.

    한데 갑자기 이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류청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섭 사매의 안목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숙은 조금 한탄스러운 듯 말했다.

    “오, 줄곧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리셨던 우리 공주 전하께서 설마 저 심협이라는 이에게 마음이 동하신 겁니까? 도우께서는 대당의 공주이시니 그를 불러 부마로 삼는 것도 괜찮지요. 호호호!”

    류청이 놀리듯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심 오라버니께 그저 존경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니 류 도우는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같은 황족이 혼인을 어찌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숙이 고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각 문파의 사람들이 모였고, 보타산의 청련선자와 황동 도인 등도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선행대회도 끝을 보였다.

    “이번 선행대회는 이것으로 끝이 났소. 참가하러 와준 여러 도우께 깊이 감사를 드리오. 대회장에서 약간의 변고가 있었으나 결국은 무사히 지나갔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는 선행의 소유권을 선포하려 하오.”

    청련선자가 소리 높여 말했다.

    단상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소곤거렸고, 심협을 힐끔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대당관부의 심 현질은 올라오게.”

    청련선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심협은 인파를 헤치고 나와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심 현질은 뛰어난 실력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으니, 대회 규정에 따라 선행은 자네의 것이네. 적절히 잘 써주게나.”

    청련선자는 심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심협은 청련선자가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보아하니 그녀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장문.”

    심협은 공수하며 감사를 표했다.

    “채주야.”

    청련선자가 곁에 있던 섭채주를 부르자, 그녀는 하얀 옥부를 꺼내들고 제사상으로 향했다.

    그때, 멀리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선행대회를 이렇게 끝낸다고? 그거 정말 흥 깨지는 일이군. 우리도 좀 참가하게 해주시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고, 실제로 온 광장도 우르릉 흔들렸다.

    “웬 놈이냐!”

    청련선자는 안색이 돌변하여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광장 위 허공이 일렁이더니 일고여덟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우두머리는 검은 갑옷을 입은 거한이었는데, 키가 무려 2장에 달하여 거령신과 같았고, 머리에는 새카만 용의 뿔 두 개가 돋아난 요족이었다.

    뒤에 선 이들 역시 인간 형상을 하였으나 요족의 특징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중 검은 갑옷의 거한 좌우에 선 매부리코 남자와 등이 굽은 노인은 특히 그 기운이 강렬했다.

    뜻밖의 상황에 심협은 안색이 살짝 변했다.

    검은 갑옷의 사내는 기운이 헤아릴 수 없이 깊어서 그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진선기의 존재인 듯했다. 매부리코 사내와 등이 굽은 노인도 분명 진선기 경지일 터였고, 나머지는 모두 대승기였다.

    “흑교왕(黑蛟王)! 우리 보타산에는 무엇하러 왔소?”

    청련선자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외쳐 물었다.

    사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대회에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보타산 내 곳곳의 금제가 작동되었건만, 저 요족들은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그때, 높은 단상 위에 연이어 대여섯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위청과 보타산의 장로들로, 경지가 모두 대승기 이상이었다.

    “왜, 우리 흑룡담(黑龍潭)과 그대들의 보타산 모두 남해에 있으니 어쨌든 이웃이라 할 수 있지 않소? 하여 보타산에서 이렇게 성대한 대회를 연다기에 우리가 특별히 기운을 북돋우러 왔거늘, 청련 도우는 설마 환영해주지도 않으려는 거요? 이건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가 아니지. 안 그렇소? 크하핫!”

    흑교왕이라 불린 검은 갑옷의 거한이 크게 소리 내어 웃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어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광장 주위의 허공이 연이어 번쩍거리면서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세 겹의 빛 장막이 떠올랐다. 위에는 부적 문양이 흐르고 빛이 사방으로 뻗었다. 모두 뛰어난 금제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흑교왕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걸음조차 멈추지 않았다.

    파지직!

    기이한 소리와 함께 금제는 흑교왕의 몸에 닿자마자 낡은 종이조각처럼 부스러졌다.

    흑교왕은 광장에 내려섰고, 이어서 다른 요족들도 내려왔다.

    광장에 있던 각 문파의 제자들은 황급히 요족들을 피해 단상 옆으로 갔다.

    청련선자가 노기를 띤 채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때였다. 옆에 있던 황동 도인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더니 말했다.

    “요족 도우들께서 멀리서 손님으로 오셨으니 우리야 물론 환영이외다. 여봐라, 자리를 마련해드려라.”

    청련선자는 황동을 잠시 쳐다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는 필요 없소이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그대들과 논의할 일이 있기 때문이니 곧 떠날 것이오.”

    흑교왕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오, 흑교왕 도우께서는 어떤 용건이 있으시오? 편히 말해보시오.”

    황동이 가볍게 물었다.

    “오늘 그대들의 보타산에서 선행대회를 열었으니 내 당연히 선행을 위해 온 것 아니겠소?”

    흑교왕은 단상 위의 선행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스쳤다.

    “선행을 원한다? 그럼 아마 그대들을 실망시켜드리겠구려. 이번에는 선행나무의 생산량이 저조하여 열매가 세 알밖에 맺지 않았소. 그리고 이미 쓸 곳까지 계획되어 있어 남는 것이 없으니 그대들이 정말 본파(本派)의 선행을 원한다면 몇 백 년만 기다리시오.”

    황동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우리는 귀(龜) 도우에게 풍재(風災)의 대겁(大劫)을 막아주기 위해 이 선행이 필요하니 기다릴 수가 없소. 여기 하나 있지 않소이까? 내게 진선요단 한 알과 만년 된 용골산호(龍骨珊瑚) 세 개가 있으니 이 물건과 맞바꾸도록 하지. 황동 도우와 청련 도우도 이의 없을 거요.”

    흑교왕은 곁에 있는 곱사등이 노인을 한 번 쳐다본 뒤 소매를 휙 휘둘렀다.

    그의 몸 앞에 흐릿한 광채가 스쳐 지나면서 하늘색 요단 하나와 금빛 산호 세 개가 나타났다.

    요단 주위로는 푸른 기류가 맴돌았고, 그 안에는 무수한 광점(光點)들이 마치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세 개의 금빛 산호는 꼭 용의 뿔처럼 생겼는데, 놀라운 영력 파동을 내뿜었다.

    심협은 미간을 찡그리며 청련선자를 돌아보았다.

    흑교왕이 꺼내 놓은 물건들은 척 보기에도 보기 드문 보물이었고, 그 가치가 선행에 뒤지지 않으니 청련선자가 동의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심 오라버니, 걱정 말아요. 사부님께서는 이런 무례한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으실 테니까!’

    섭채주의 전음에 심협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 선행은 선행대회의 상품이라 거래를 할 수 없소. 그러니 안녕히들 가시오. 멀리 안 나가겠소!”

    청련선자는 싸늘하게 말하며 곧바로 축객령을 내려버렸다.

    “청련 도우는 내 체면 따위 보아주지 않겠다는 것이구려?”

    흑교왕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은근히 위협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흥! 그대들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선행과 바꾸어 가겠다는 말은 핑계고, 와서 소란을 피우려는 것 아니오!”

    청련선자가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청련 도우는 우리를 억울하게 모함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저 선행 한 알을 구하러 왔을 뿐이라오.”

    흑교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웃더니 한 손으로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검은 교룡의 허상이 떠올라 단상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심지어 교룡의 허상이 채 닿기도 전에 더없이 차가운 힘이 솟구쳐 나와 단상 위에 있던 사람들의 몸이 싸늘하게 식고 온몸의 피가 거의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정말 손을 대려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청련선자는 대노하여 양손을 결인하고 홱 끌어당겼다. 그러자 광장 근처의 산봉우리 두 개가 우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울렸고, 산봉우리에서 무수한 은빛 번개가 뿜어져 나와 검은 교룡의 허상 위에 내리꽂혔다.

    순간 교룡의 허상에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렸고, 교룡이 신음하더니 흩어지면서 차가운 힘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은빛 번개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흑교왕을 비롯한 요족들에게 내리꽂혔다. 동시에 광장 위 하늘에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일곱 개의 불꽃이 밝혀진 금빛 영등(靈燈)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무수한 금빛 불꽃들이 그 위로 휘몰아쳐 흑교왕 등을 향해 곧장 돌진하여 마치 한바탕 불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칠보영롱등!”

    단상 근처에 있던 사람들 중 안목 있는 이들이 놀라서 외쳤다.

    심협의 눈빛도 크게 흔들렸다. 보타산에 오기 전에 그도 이 문파에 대해 좀 알아보았는데, 칠보영롱등은 보타산의 진산법보(*鎭山法寶: 산을 지키는 법보)로 관세음보살이 직접 만들어 무궁한 위세를 지녔다고 했다.

    청련선자가 이 법보를 움직인 것을 보아하니 흑교왕의 비위를 맞추기엔 글러먹은 것 같았다.

    다만 심협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교왕 등이 너무 대담했던 것이다. 보타산 종문 안까지 달려와 소란을 피우다니, 그들의 실력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보타산이 수만 년이나 축적해온 저력 앞에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한편, 흑교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입을 벌리고 뜻밖에도 칠흑같이 검은 요번(妖幡)을 하나 뱉어냈다. 요번이 촤르륵 펼쳐지자 두터운 검은색 요운(妖雲)이 나타나 모든 요족을 감싸고 보호했다.

    요운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요괴의 혼백들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원래 거울처럼 맑고 깨끗했던 광장은 한순간에 을씨년스럽고 어두침침해졌으며, 섬뜩한 음기가 돌아 마치 염라가 다스리는 지부(地府)에 온 것만 같았다.

    은빛 번개와 금빛 불비가 요운에 꽂히자 수많은 벼락이 폭발하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려 퍼졌고, 검은 요운은 쉬지 않고 찢어져 증발하면서 금세 엷어졌다.

    청련선자가 결인하고 법술을 쓰자, 옆에 있던 황동 역시 방관하지 않고 법술을 써서 도왔다. 온 하늘 가득 떨어져 내리는 은빛 번개와 금빛 불비가 더욱 촘촘해지자, 검은 요운도 더 빨리 흩어지면서 곧 완전히 뚫릴 태세였다.

    청련선자는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힘을 끌어올렸다.

    한데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단상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주의가 아래쪽의 격렬한 충돌에 쏠린 사이, 위청에게서 갑자기 날카로운 빛 두 줄기가 쏘아져 나와 무방비 상태였던 청련선자의 등에 꽂힌 것이다!

    푹!

    청련선자의 몸에는 순간 두 개의 구멍이 생겨났고, 입으로는 붉은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으며, 손에 맺은 법결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황동에게도 두 줄기 빛이 덮쳐왔지만, 커다란 금속음과 함께 비틀거렸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찢어진 옷자락 안으로 황동의 몸을 감싼 엷은 금빛 갑옷이 번득였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도 법결이 흩어졌고,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은빛 번개와 금빛 불비가 멈추었다.

    한편, 단상의 다른 곳과 심지어 아래쪽에 있던 인파 속에서도 갑자기 처참한 비명이 연이어 울리면서 많은 사람이 기습에 중상을 입었다.

    찰나 간에 아비규환이 된 광장에서는 날카로운 비명과 노기를 띤 포효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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