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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11화 (511/1,214)
  • 511화. 증거

    심협이 처소로 돌아오자 섭채주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따라왔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라버니, 시련에서 우승을 차지하셨는데 무엇을 더 고민하고 계셔요?”

    섭채주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 그 두꺼비 요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놈의 경지는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데 시련 중에 나타난 것이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말이야.”

    “맞아요. 좀 이상하긴 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두꺼비 요괴는 화련비경 안에 갇혀 있는 요물이에요. 금제에 잠깐 문제가 생겨 탈출한 거겠죠.”

    섭채주가 말했다.

    “우연이었다면 괜찮지만, 누군가 계획한 것이라면…… 의미가 달라지지.”

    심협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이따 사부님을 찾아뵙고 이 일을 조사해달라고 할게요.”

    섭채주가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주저하며 말을 꺼내자 심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보타산 내부, 어느 대전.

    청련선자와 황동 도인, 위청 그리고 다른 장로 몇몇이 모여 있었다. 청련선자의 표정은 냉담했고,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기다리는 듯 아무 말이 없어 분위기가 무거웠다.

    잠시 후, 대전 밖에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주옥과 잿빛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어찌 되었소?”

    청련선자가 즉시 물었다.

    두서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주옥과 잿빛 머리칼의 노인은 무슨 뜻인지 분명히 이해했다.

    “주 사질과 함께 살펴봤는데, 두꺼비 요괴를 가두어 놓았던 봉인 금제의 진안(*陣眼: 법진의 핵심)이 느슨해져 도망쳐 나온 것 같습니다.”

    잿빛 머리칼의 노인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장문께서는 마음 놓으십시오. 무환(霧幻) 장로님과 제가 진안을 다시 제대로 보강해두었고, 두꺼비 요괴도 위 사숙께 중상을 입었으니 다시는 몰래 도망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옥도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황동 도인과 다른 장로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바짝 긴장해 있던 낯빛도 조금 누그러졌다.

    “무환 장로, 화련비경 안의 금제들은 모두 그대가 설치한 것이오. 또한, 사용한 포진 기구들도 모두 최상급이었소. 한데 두꺼비 요괴의 금제 진안이 왜 갑자기 느슨해졌단 말이오? 게다가 때마침 시련 중에 말이지.”

    청련선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장문의 뜻은, 이 일이 수상쩍다는 말씀이십니까?”

    황동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을 때, 주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두꺼비 요괴가 탈출한 것은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이 화련비경을 점검하는 틈을 타 금제에 손을 써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옥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 일은 그가 비경의 상태를 살폈던 평범한 제자의 손을 빌려 저지른 것으로, 그 제자는 심지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시련이 시작된 뒤로 주옥은 핑계거리를 찾아 그 사람을 보타산에서 내보냈고, 지금 그는 아주 먼 곳에 있을 테니 어떻게 해도 자신의 죄를 찾아내지는 못할 터였다.

    “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 금제의 진안에 음독(陰毒)에 부식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건대, 두꺼비 요괴가 단독(丹毒)으로 진안을 부식시켜 금제가 느슨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잿빛 머리칼의 노인이 말했다.

    “주옥, 자네 생각은?”

    청련선자가 주옥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자의 진법 수준은 무환 장로님보다 훨씬 뒤떨어져 금제의 이상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주옥은 청련선자가 담담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왠지 모르게 위축되고 당황되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한가?”

    청련선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 속에 담긴 따져 묻는 듯한 어투에 대전 안 사람들의 안색 또한 차갑게 굳었다.

    “장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꺼비 요괴가 탈출한 것이 주옥과 관련 있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황동은 노기 어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편, 주옥은 상황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자 깜짝 놀라 머리털이 다 쭈뼛 섰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바닥에 털썩 무릎까지 꿇으며 비분강개한 어조로 말했다.

    “장문 어른! 저는 보타산 제자로서 그동안 종문에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아무리 장문 어른이라 해도 저를 무고하게 모함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한지, 그를 의심했던 몇몇 장로는 미안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청련선자는 달랐다.

    “애써 연기할 필요 없네. 내가 아무렴 증거 하나 없이 제자를 모함하겠나! 자네 말대로 지금까지의 공로를 생각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아직 선처를 베풀어줄 수도 있음이야.”

    청련선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제자 이제껏 종문에 불리한 그 어떤 일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장문께서는 어떤 증거를 지니고 계시든 얼마든지 내놓으시지요. 이 일이 제자의 소행임이 밝혀진다면, 제자 기꺼이 죽음으로 사죄할 것입니다!”

    주옥이 고개를 쳐들며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불안함에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황 장률, 그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청련선자가 황동을 돌아보았다.

    “주옥은 저의 제자입니다. 제가 장담컨대, 절대 이런 악행을 저지를 아이가 아닙니다.”

    황동이 벌떡 일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 장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청련선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한손을 뒤집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구리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현천경은 무엇 때문에 꺼내십니까?”

    황동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현천경은 본문(本門)의 귀중한 보배이지만, 본문의 연기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기인의 손에서 난 것이지요. 이 보물은 만물을 투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춘 풍경을 그 속에 담아낼 수도 있습니다.”

    청련선자가 말했다.

    그 말에 주옥은 동공이 바짝 졸아들었다. 설마 그 제자가 금제에 손을 대는 모습이 현천경에 기록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냐, 그럴 리 없어. 현천경은 시련이 시작되고 나서야 작동되었으니 그전의 일이 기록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청련선자는 주옥을 다시 쳐다보고는 결인하여 현천경을 가리켰다. 거울 면에서 푸른 빛줄기들이 피어나더니 곧 화면 하나가 떠올랐는데, 화련비경이 아니라 비경 밖 광장의 풍경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모두가 깜짝 놀랐으나, 주옥만은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천경은 지극히 귀한 보물로, 거울을 양면으로 나누어 한쪽 면은 비경 안의 상황을, 다른 한 면은 바깥의 상황을 기록하지요.”

    청련선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현천경이 방향을 바꾸며 다른 쪽에도 화면이 하나 떠올랐는데, 화련비경 안의 상황이었다.

    “이 현천경에 이런 기능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허나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어 무엇을 하시려고요? 여기 어디에 증거가 있단 말입니까?”

    황동이 퉁명스레 말했다.

    청련선자는 대답 대신 손가락 끝에 푸른 빛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러자 현천경의 화면이 빠르게 바뀌더니 잠시 후 멈췄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새에 확대되면서 커다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주옥과 위청이었는데, 그 모습이 또렷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면 속에서는 주옥의 미간이 살짝 움찔하더니 소매 안에 꽉 움켜쥐었던 손바닥이 풀어지면서 손바닥 한가운데에 청동 진반의 모서리가 살짝 드러났다. 그 위로는 한 가닥 금빛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옆에 있던 위청은 뭔가를 느꼈는지 현천경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편, 주옥은 이 장면을 보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청련선자가 손가락을 돌리자 현천경이 반대로 돌아가 두꺼비 요괴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요괴의 주위에는 푸른 금제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금제의 한쪽 귀퉁이가 갑자기 심하게 번쩍이더니 곧 어두워지고 빈틈이 드러났다.

    두꺼비 요괴는 이 광경을 보고 추한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내더니 두 발로 땅을 세게 구르며 푸른 그림자로 변해 안에서 날아 나왔다.

    주옥은 현천경 속에 떠오른 이 장면을 보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현천경이 비경 안과 밖의 상황까지 모두 기록한 지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황동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주옥의 머리통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그러나 한 줄기 붉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날아와 주옥의 머리 위를 막았다.

    펑!

    황동의 손바닥은 붉은 그림자에 막혀 튕겨나갔고, 기운이 사방으로 넘쳐흘렀다.

    붉은 그림자는 한 번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멈췄다. 기다란 주홍색 능라비단으로, 영광(靈光)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진귀한 보물임이 분명했다.

    주옥은 여전히 이미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황동의 손바닥이 그대로 머리를 내리쳤더라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머리가 터져나가 즉사했을 터였다.

    “황 장률께서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주옥은 삿된 것에 홀려 잘못을 저질렀으나, 다행히 큰 화를 초래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을죄는 아니지요. 그 일신의 수련 경지를 폐하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련선자가 손을 들며 그렇게 말을 맺는 순간, 주홍 능라비단의 끝부분이 마치 뱀처럼 튀어나와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주옥의 단전을 파고들었다.

    “끄억!”

    주옥은 단전이 파괴되자 온몸의 법력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고,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이 풀려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황동은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말없이 눈을 꼭 감았다.

    “데려가시오.”

    청련선자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장문, 주옥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직 심문도 하지 않았잖습니까?”

    장로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심문할 것도 없소. 내 이미 밝혀낸 바에 따르면, 무명이 일찍이 심협과 원한이 있어 주옥에게 그를 처리해 달라 종용하였소. 그리고 주옥은 남녀 간의 정분으로 질투심에 눈이 먼 나머지 시련의 기회를 빌려 심협을 해치려 한 것이오.”

    청련선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옥은 청련선자가 자신의 속내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헛된 생각마저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절망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속에는 끝없는 회한이 일었다.

    질문을 던졌던 장로도 주옥이 조금도 부정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 주옥을 데리고 나갔다.

    “장문, 제가 제자를 잘못 가르쳤습니다. 본문의 계율을 다스릴 권한을 지닐 면목이 없으니 이 장률령(掌律令)을 거두어가시지요.”

    황동이 밝게 빛나는 영패 하나를 꺼내 옆에 있는 찻상 위에 놓았다.

    영패는 몸체가 거울처럼 매끄러웠고, 위에는 ‘율(律)’자가 적혀 있었다.

    다른 장로들음 침통한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타산 계율장로의 권세는 막강하여 그 지위가 장문에 버금갔다. 여러 해 동안 보타산 내에서는 은근히 파벌이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청련선자를 따랐고 다른 한 무리는 황동을 존경해왔다. 한데 이제 황동이 계율의 대권을 포기하였으니 보타산의 세력에 한바탕 대변동이 일어날 터였다.

    영패를 내려놓은 황동은 청련선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들 물러가보시오.”

    청련선자가 한숨을 내쉬고 담담하게 말하자 대전 안의 장로들과 위청은 일어나서 예를 갖춘 뒤 모두 물러갔다.

    청련선자가 손짓하자 계율령이 그녀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매끄러운 영패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입가에, 뜻밖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드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대전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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