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시련의 끝
심협은 그제야 섭채주가 예전처럼 자신에게 전적으로 목숨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평범한 여인이 아님을 떠올렸다. 경지로만 보면 자신이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겨야 할 판 아닌가!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몸을 반쯤 비켜주었다.
섭채주는 앞으로 나오더니 양손을 빠르게 결인하며 가만히 법결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곧 그녀의 몸 바깥에 푸른 빛이 번득이면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맺히더니 지면을 따라 강물처럼 곧장 뻗어나갔다.
빛줄기는 독무(毒霧)까지 파고들어가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독기가 빛줄기를 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독기는 먹구름처럼 심협과 섭채주 두 사람을 덮을 듯 다가왔는데, 그 순간 섭채주의 입에서는 가벼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청련(淸蓮)이여 피어나라.”
그녀의 말이 끝나자 땅 위의 모든 푸른 빛줄기 위에서 맹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송이송이 푸른 연꽃 허상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겹겹의 엷은 빛들은 근처의 자흑색 독기를 순식간에 제거했고, 남은 독기는 5장 높이의 허공에 떠다녔다.
심협이 감탄하며 시선을 돌려보니 백소천 등은 이미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오직 참월만이 검은 연꽃 한 송이에 뒤덮여 무사히 버티고 있었다.
“꾸억!”
다시 한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두꺼비 요괴가 느닷없이 앞발로 가까이에 있던 황정을 내리쳤다.
심협은 곧장 사월보를 운공하여 쏜살같이 다가가서는 그녀가 두꺼비 앞발에 두들겨 맞기 직전에야 끌어당겨 섭채주의 뒤에 데려다두었다. 이어서 그는 또다시 빠르게 튀어나와 백소천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임천천이 위기에 처했다.
구하러 가기에는 늦었다는 사실에 심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순간, 노여움에 가득 찬 호통이 들려왔다.
“이놈, 그녀를 건드릴 생각 마라!”
멀지 않은 곳에서 온몸에 자줏빛 반점이 돋아난 정균이 벌떡 일어나 모든 힘을 끌어 모아 장검을 휘둘렀다.
문짝 같은 거대한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정균의 불같은 분노를 안고 두꺼비 요괴를 향해 날아들었다.
요괴는 커다란 머리를 돌리더니, 경멸하는 눈빛으로 기다란 혀를 불쑥 뻗어 거대한 검을 휘감고는 홱 잡아당기더니 곧장 집어삼켰다.
심협은 그 틈에 임천천을 구출해 돌아왔지만, 두꺼비 요괴도 이를 알아차리고는 몸을 돌려 입을 쩍 벌렸다. 이번에는 자흑색 기다란 혀가 순식간에 심협의 코앞까지 뻗어왔다.
심협은 재빨리 공중제비를 돌아 피한 뒤, 사월보를 시전해 스쳐 지나가며 내친 김에 정균도 구해냈다.
그 무렵, 참월도 흑련(黑蓮) 법보를 잠시 거두고 고림을 구해냈다.
“이 요물은 적어도 대승 중기의 실력이고, 독성이 너무 강해서 우리로서는 당해낼 수 없소!”
참월이 어두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시련이 끝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버텨봅시다!”
심협도 침통한 심정이었지만, 숨을 고르며 그렇게 말했다.
“저들은 미처 방어할 겨를도 없이 중독된 터라 그때까지 버티기 힘들 겁니다.”
참월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수의 주의를 끌어 시간을 벌어주는 수밖에요.”
심협의 말에 참월은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농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에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저건 대승 중기 요물이라니까요. 우리는 잠시도 버티지 못할 거요.”
“허나 이들은 우리 동료들입니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단 말이오?”
심협은 백소천과 섭채주를 훑어보고는 다시 정균을 등을 돌아보았다.
그때, 조금 전까지 좌선하며 운기조식하던 섭채주가 끼어들었다.
“두 분께서 잠시 엄호해주시면 제가 그들의 독을 제거해보겠습니다.”
심협과 참월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그녀 앞을 가로막고 선 채 두꺼비 요괴를 맞았다.
그사이 섭채주는 두 손을 결인하고 몸속 법력을 최대로 운행하며 작게 읊조린 뒤, 두 눈을 번쩍 뜨고 가볍게 외쳤다.
“정련조음(淨蓮潮音)!”
그 순간, 밀물 같은 음파가 그녀의 몸에서 뻗어나가 사람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 속에 담긴 가닥가닥 법력들은 사람들의 몸속으로 녹아들었고, 그들의 몸 밖에는 하나하나 푸른 연꽃 허상이 떠올랐다.
이 연꽃 허상이 비추자 그들의 몸에서 자줏빛 반점들이 하나하나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 * *
비경 밖은 떠들썩했다. 구경하던 제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대부분은 심협처럼 불쑥 나타난 이 두꺼비 요괴를 마지막 시련이라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위청은 뭔가 일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주옥, 이게 어찌된 일인가?’
위청이 전음으로 묻자 주옥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후배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요괴가 탈출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서 비경을 열고 들어가 저들을 구하게!’
위청은 그와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 않아 즉시 꾸짖었다.
‘그것이…… 위 사숙께서도 아시다시피, 비경의 문은 시간이 되기 전에는 장문께서 직접 오시지 않으면 열 수가 없습니다.’
주옥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서 장문께 보고 드리지 않고 뭘 하는 겐가! 아직 반 시진이나 더 남았는데 저들이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누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네나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냔 말이네.’
위청이 버럭 화를 내자 주옥도 마침내 조금 당황했다. 그는 그저 한순간의 질투심에 심협을 사지에 내몰 생각이었을 뿐, 결코 모든 사람이, 특히 섭채주가 위기에 처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장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주옥은 황급히 일어나 떠났다.
위청은 더없이 어두운 얼굴로 현천경 위의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 * *
심협과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다. 두꺼비 요괴가 바짝 뒤쫓아 와서는 고개를 홱 돌려 커다랗고 시뻘건 입을 다시 벌리자, 입안에서 두 줄기 핏빛 소용돌이가 떠올랐다. 또한 그 아랫배가 갑자기 수축하면서 입속의 핏빛 소용돌이도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빨리 온 힘을 다해 용각추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옆에 선 참월도 다시 검은 연꽃을 꺼내 입을 벌리고 정혈을 뿜어냈다.
용각추에서는 금룡이 떠올랐고, 검은 연꽃 위에는 핏빛이 퍼져 나갔다. 두 법보는 각자 주인과 자신이 지금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며 두꺼비 요괴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핏빛 소용돌이가 갑자기 진동하더니 길이가 1장쯤 되는 굵직한 핏빛 화살 두 개가 쏘아져 나와 심협과 참월에게 돌진했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마다 허공이 일렁이며 검붉은 아지랑이가 넘실거렸다.
쿵! 쿵!
두 차례의 폭발음이 거의 동시에 울려 퍼지면서 용각추와 검은 연꽃 모두 튕겨나갔다. 핏빛 화살들도 함께 부서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채 두 무리의 핏빛 안개가 되어 여전히 심협과 참월을 덮쳐왔다.
그때,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금강호체!”
심협과 참월은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몸 위로 갑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순식간에 금빛이 덮이면서 핏빛 안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펑! 펑!
두 차례 충돌음이 울렸고, 핏빛 안개가 흩어져버렸다.
심협은 고개를 들려 법술을 쓴 백소천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다른 이들도 독소가 말끔히 제거된 듯 안색을 되찾았으나, 오직 섭채주만이 몹시 창백한 얼굴로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채주야, 괜찮으냐?”
심협이 곧바로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요. 그저 법력을 지나치게 소모해서…….”
섭채주가 고개를 저으며 밝게 웃었다.
“조심하시오. 또 공격해올 거요.”
참월이 긴장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심협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꺼비 요괴가 높이 뛰어올랐다가 다시 제자리에 묵직하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잔뜩 부풀어 오른 배는 이제 안으로 움푹 들어가 마치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조심하십시오! 저놈이 신통력을 쓰려 합니다.”
심협이 즉시 주의를 주었다.
사람들은 각자 신통과 법보로 몸에 보호했다.
쿵!
두꺼비 요괴는 땅으로 묵직하게 떨어져 내리는 순간, 돌연 입을 떡 벌리고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꾸엑!”
이 울음소리와 땅에 떨어질 때의 거대한 진동이 하나로 맞물리자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엄청난 음파가 되었다. 심지어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의 검붉은 음파가 세차게 몰려왔다. 지나가는 곳마다 썩은 나뭇가지 꺾듯 숲과 땅이 겹겹이 치솟았고, 땅은 몇 장이나 벗겨져나갔으며,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심협과 사람들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이들은 마치 해일 속에 홀로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수백 장이나 날아갔고, 땅에 세차게 곤두박질쳐 피를 토했다.
두꺼비 요괴는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혀를 날름거리더니 뒷다리를 힘껏 굴러 뛰어올라 쫓아왔다.
정균은 멀리서 옷자락이 피로 흥건한 임천천을 보고는 애써 기어갔고, 참월은 가까스로 가부좌를 틀었다.
백소천은 두 눈으로 두꺼비 요괴를 빤히 노려보면서 손에 부적 한 장을 틀어쥐고 녀석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심협은 여전히 섭채주를 뒤에 둔 채 보호했는데, 그의 옷섶은 이미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이토록 강력한 요수를 상대하기에 그들의 실력은 너무도 부족했다.
“꾸억!”
다시 한번 두꺼비 울음소리가 퍼졌고, 요괴는 긴 혀를 내뻗으며 심협을 향해 곧장 돌진해왔다.
백소천은 두 눈을 집중하고 손에 부적을 틀어쥔 채,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두꺼비 요괴를 막아 세우겠노라 다짐했다.
심협도 이를 악물고 두꺼비 요괴를 맞았다. 이미 천책과 신념이 얽힌 그는 남은 수명을 모두 쓰는 한이 있어도 꿈속의 경지를 다시 불러내 이 두꺼비 요괴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섭채주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때, 하늘에 갑자기 빛이 반짝이더니, 칼날 하나가 푸른 연꽃 허상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치 만 개의 연꽃잎이 떨어져 내리듯 한순간 두꺼비 요괴의 기다란 혀를 토막토막 잘라버렸다.
“쿠에에에!”
두꺼비 요괴의 고통에 찬 비명을 배경 삼아 곧이어 한 인영이 높은 하늘에서 한들한들 내려와 땅에 꼿꼿하게 꽂혀 있는 장검을 움켜잡았다.
“위청 선배님!”
사람들은 곧바로 그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비경의 시련은 끝났으니 다들 나가도 좋소.”
위청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짧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 말에 하늘의 밝은 구멍을 올려다보며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바탕 난리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어서 가시오.”
위청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멀찍이서 인사를 올리고는 서로 부축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모두 밝은 구멍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심협이 고개를 돌려 보니, 위청이 손에 든 장검을 가로로 슬쩍 그었다. 그러자 길이가 백 장에 달하는 푸른 검광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며, 막 달려들려던 두꺼비 요괴의 몸에 피로 흥건한 상처를 남기고는 그대로 멀리 사라져버렸다.
땅으로 내려온 뒤에야 심협을 비롯한 사람들은 광장 밖의 제자들이 모두 해산한 것을 알았다. 오직 보타산의 장로 몇 명만이 그들을 맞았다.
참가자들은 부상을 치료받은 뒤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