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09화 (509/1,214)
  • 509화. 깃발 쟁탈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심협에 대한 사람들의 찬탄과 환호에 가장 화가 나고 우울한 사람은 물론 주옥이었다. 장문의 비밀스런 지시를 받고 손을 써서 심협을 그 늪지로 보낸 뒤 쉬지 않고 요수들을 이끌어 습격하게 한 것도 그였다.

    한편, 화면 속에서 심협은 이미 광장으로 들어섰고, 사람들도 금강복마권 법진을 풀기 시작했다.

    “심 도우께서 환진을 깨뜨리셔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얼마나 망신스러웠겠어요?”

    임천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행을 두고 다툴 필요가 더 있겠습니까?”

    참월선사가 한 손을 세우며 그렇게 말했으나,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법진을 깨뜨린 공로야 자연히 심 도우께 돌아가야겠지만, 어쨌거나 이는 시련이고 우리는 사문의 명을 받아 선행을 쟁취하러 왔으니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고림 두타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여러분,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우정은 우정이고 수련은 수련이지요. 누가 이길 것인가는 각자의 능력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여러분께서 이리 양보하신다는 것은 이 심모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갈등이 생길 조짐이 보이자 심협이 나섰다.

    “심 도우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온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사문에도 부끄럽고 모든 참가자들에게 부끄러운 일일 겁니다.”

    정균도 그리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다시 투지를 불태웠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여러분과 한바탕 시원하게 겨뤄보는 것도 헛되지 않겠지요. 하하하!”

    사람들은 상의를 마치고 법진을 깨는 데 착수했다.

    진추를 가렸던 환진이 사라졌으나, 금강복마권 대진은 여전이 몹시도 견고하여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다. 이에 결국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일제히 나선 뒤에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숲을 뒤덮고 있던 빛 덮개가 부서져 나가는 순간, 심협과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온 힘을 다해 소태나무를 향해 질주했다.

    황정은 언제 꺼냈는지 푸른 부적을 가슴팍에 붙였고, 온몸이 갑자기 푸른 회오리에 휩싸이더니 앞장서서 소태나무를 향해 곧장 달렸다.

    그러나 겨우 백 장쯤 가자마자 몸 앞에서 갑자기 푸른 빛 한 줄기가 피어나더니, 문짝만 한 푸른 대검(大劍) 한 자루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거대한 검의 검 자루에는 팔뚝 굵기의 쇠사슬이 이어져 있었다. 사슬이 쩔그렁 쩔그렁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도로 되감기자, 정균이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검심(劍鐔)에 흔들림 없이 내려섰다.

    “미안하오. 이 선행은 내가 임 사저 대신 가져가겠습니다.”

    정균이 순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천천의 모습이 마치 나비처럼 그의 곁을 오가더니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고마워요.”

    인사를 남긴 그녀는 곧바로 소태나무를 향해 달렸다.

    바로 그때!

    “아미타불…….”

    문득 염불 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천천이 고개를 돌려보니, 10여 장 밖에 참월 선사가 한 손을 세운 채로 빠르게 뭔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임천천이 문득 좋지 않은 예감에 속도를 올리려는데, 갑자기 앞쪽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마치 철을 부어 만든 것처럼 전체가 새카만 문루가 땅속에서 솟아올라 앞길을 막았다.

    임천천은 굳은 얼굴로 손을 들어 결인한 뒤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빛 한 줄기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날아가 문루에 묵직하게 떨어지더니 갑자기 폭발했다.

    꽈릉!

    둔중한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러나 문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임천천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문루 아래쪽에 악귀의 얼굴이 새겨진 문 두 짝이 안으로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새카만 소용돌이가 나타났고, 소용돌이가 유유히 회전하자 맹렬한 흡인력(吸引力)이 전해져 왔다.

    임천천은 온몸이 보이지 않는 실오라기들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참월은 한 걸음 크게 내딛었고, 발아래에 달빛이 맺히면서 마치 땅에 바짝 붙어가는 영주(靈舟)를 이룬 것처럼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갔다.

    “참월 도우, 조급해 마시오!”

    느닷없이 울린 목소리는 백소천의 것이었다. 그는 어느새 비검을 밟고 쌩하니 날아왔는데, 손에는 평소 자주 쓰던 항마저 대신 쥘부채를 하나 들고 있었다. 부채의 한쪽 면에는 부처의 형상이, 다른 한쪽 면에는 용 두 마리가 구슬을 희롱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법보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그의 가문에서 전해 내려온 보물이지만, 백가는 그 물건의 진짜 유래를 알지 못했다. 그 역시 화생사에서 스승의 가르침 덕에 비로소 이 물건의 진정한 힘을 깨달은 터였다.

    백소천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에 든 쥘부채를 촥 펼치더니 참월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수많은 불타 형상의 가장자리에 금빛 문양이 번득이고 다른 한쪽의 용주(龍珠)도 환한 빛을 내뿜었다.

    별안간 폭풍우 휘몰아치는 소리가 부채에서 터져 나오고 구름과 비의 기운이 세차게 솟아나 강력한 폭풍우로 변해 돌진하면서, 참월선사의 발아래에 맺힌 달빛을 흩어버렸다. 그러자 참월은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고림 두타는 이들과 얽히지 않고 홀로 사람들과 거리를 벌린 뒤, 길을 약간 우회하여 곧장 소태나무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섭채주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섭채주는 어느새 몸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일하게 가로막는 사람 없이 홀로 남은 심협은 조금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곧 사월보를 시전하여 소태나무를 향해 돌진했다.

    소태나무는 높이가 백 장에 달하고 모양은 은행나무 같았는데, 줄기는 꼿꼿하고 잎은 무성했으며, 어쩐지 씁쓸한 내음이 풍겼다. 그 아래에는 고르지 않은 회백색 돌 받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선명한 빛깔의 붉은 삼각기 하나가 비스듬하게 꽂혀 있었다.

    깃발 위에는 관음 입상(立像)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심협은 나무 아래에 이르자 유명귀안을 운공하여 사방을 한 차례 훑어본 뒤, 주위에 아무 금제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곧장 다가가 깃발을 쥐어들었다.

    * * *

    비경 밖. 심협이 영기를 쥐는 광경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심 오라버니께서 정말 깃발을 쥐셨어! 이제 조금만 버티시면 이기는 거야!”

    이숙은 기뻐서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

    “다른 이들 모두 일부러 져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더욱이 섭 사매와 저기 화생사의 도움이 있으니 그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노영은 눈을 흘기며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류청의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줄곧 심협의 얼굴로 닿은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편, 무명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서는 초조한 눈길을 주옥에게로 돌렸다.

    광장에서는 주옥이 커다란 의자에 앉아 차분한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매 안에 감춰진 그의 손에는 갈수록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미간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소매 안에 꽉 움켜쥐었던 손바닥도 느슨하게 풀렸다. 손바닥 안에는 청동 진반(陣盤)의 모서리가 살짝 드러났는데, 위에는 한 가닥 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위청이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틀어 힐끗 쳐다보더니 시선을 다시 현천경으로 향했다.

    이번 시련은 예년과 달리 대혼전이라 구경하던 제자들이 환호했다. 참가자들이 처음에는 서로 자제했으나, 싸움이 이어질수록 섭채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점점 격렬해졌던 것이다.

    “하하, 모처럼 이리 통쾌하게 싸웠으니 이번 걸음이 헛되지는 않았군.”

    정균이 거대한 검을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나도록 휘두르자 겹겹이 검기가 뿜어져 나와 광풍처럼 휘몰아치며 주위의 나무들을 뽑아내고 산산조각으로 갈아버렸다.

    참월은 같은 불문 출신인 백소천을 보기 드문 맞수로 여겼다. 두 사람도 점점 흥이 올라 주위에 폭발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법력과 법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섭채주는 고림보다 경지가 조금 더 높고 법력도 더 두터웠지만,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한편, 잠깐 손이 비었던 임천천도 심협에게 달려들어 맞붙어 싸웠다.

    심협의 경지는 임천천에 못 미쳤지만 경험은 오히려 풍부했기에 큰 열세에 처하지 않았고, 심지어 순양검배와 용각추를 조종해 거듭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섭채주가 조금씩 밀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단칼에 임천천을 밀어낸 뒤 곧바로 도우러 갔다.

    임천천은 놓치지 않고 바짝 뒤쫓아 왔다.

    싸움은 일대 일에서 이제 짝을 지어 벌이는 교전으로 바뀌었는데, 심협과 섭채주가 힘을 합쳐 고림과 임천천에게 맞서는 형국이었다.

    한데 모두가 한창 신이 나서 싸움에 열중하던 중, 문득 섬뜩한 짐승의 포효가 멀리서 들려왔다.

    곧이어 이들은 모두 더없이 강력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다들 낯빛이 변했다. 그리고 이들이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하늘에 느닷없이 거센 회오리가 몰려왔고, 거대한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어서 흩어지시오!”

    심협이 크게 소리치며 섭채주를 끌고 먼저 물러나자,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사방으로 달아났다.

    쿠웅!

    커다란 굉음이 울리면서 마치 산봉우리가 곤두박질친 것처럼 온 대지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자욱한 먼지가 폭풍처럼 솟구쳐 눈 깜짝할 사이 시야를 가렸고, 나무며 바위가 사방으로 튀면서 그 일대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심협이 손을 휘둘러 먼지를 밀어내며 자세히 보니, 방금 전까지 숲이었던 자리에는 키가 수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청록색 두꺼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비단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리 위에는 하얀 외골격이 돋아 있어 매우 기이했다.

    “두꺼비 요괴?”

    섭채주가 가볍게 소리쳤다.

    “저것을 아느냐?”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노영 사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예전에 문중에는 연단에 능한 장로님이 있었대요. 이 비경에서 수년간 영초들을 채집하여 수결단(獸訣丹)을 하나 만드셨는데, 미처 복용하기도 전에 지나가던 평범한 두꺼비가 꿀꺽 삼켜버렸다지요.

    장로께서는 화병이 날 지경이 되어 두꺼비를 죽이고 약을 되찾으려 하였지만, 단약의 힘을 흡수한 두꺼비는 요력이 생겨나 요괴가 되어 달아났지요. 훗날 그 장로께서는 고생 끝에 두꺼비 요괴를 찾아냈는데, 놀랍게도 이미 출규기의 요수가 되어 있었던 터라 도리어 녀석에게 죽임을 당했답니다.”

    섭채주는 단숨에 옛일을 이야기했다.

    심협은 이 두꺼비 요괴를 살피고는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분명 이미 출규기를 넘어서서 거의 대승 중기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설마, 이것도 이번 시련의 관문 중 하나인가? 이상한 일인데…….’

    그러나 그가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두꺼비 요괴가 갑자기 꾸르륵거리며 울부짖더니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러자 뱃속에서 자흑색 독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심협은 또다시 섭채주를 끌고 물러나면서 한 손을 결인하고 체내에서는 무명공법을 미친 듯이 운공하여 손바닥으로 앞을 밀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파도가 허공에서 응집되어 독기를 향해 몰려갔다. 하지만 독기에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심협이 조종하던 물줄기는 빠르게 자흑색으로 물들면서 독액으로 변해버렸다.

    심협은 하는 수 없이 물줄기를 이끌어 세차게 밀려오는 독기에 맞서며 섭채주를 뒤에 두고 보호했다.

    섭채주는 따스한 눈길로 심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자신을 앞으로 내보내달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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