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숲속에 있으면 숲을 보지 못하는 법
사흘 뒤, 심협과 황정은 마침내 우거진 숲을 뚫고 나왔다. 뜻밖에도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전체가 대리석으로 포장된, 무척 넓은 고리모양 광장이었다.
광장이 고리모양인 까닭은 광장 한가운데에 백 장 높이의 반투명한 빛 덮개가 마치 땅바닥에 엎어놓은 커다란 솥처럼 반원 모양으로 안쪽 산림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협과 황정이 광장에 발을 들여놓자 멀리서 두 줄기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심협!”
“오라버니!”
백소천과 섭채주의 목소리였다.
“누이, 백형.”
심협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자네 어찌 된 일인가? 이리 오래 걸리다니, 한참을 기다렸네.”
백소천은 오자마자 심협의 어깨에 주먹을 툭 치며 말했다.
“나도 일찍 오려고는 했는데, 오는 내내 끊임없이 요수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소.”
심협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했다.
백소천과 섭채주는 그 말에 기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그러시오? 설마 누군가가 벌써 영기(令旗)를 가져간 거요?”
심협은 표정이 살짝 변해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오는 내내 끊임없이 요수들에게 시달리셨다고요? 대단한 요수라도 맞닥뜨리신 건가요?”
섭채주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그럭저럭……. 다들 출규기 전후의 요물들이었지.”
심협은 아직 우승자가 없다는 말에 안도하며 말했다.
“출규기라고? 그렇다면 정말 운이 안 좋았구먼. 나는 오는 내내 요수를 거의 마주치지도 않았고, 그나마 응혼 후기의 늑대 요괴가 가장 번거로운 놈이었지.”
백소천이 혀를 찼다.
“저도 비슷했어요. 오라버니께서 운이 좋지 않았나봅니다.”
섭채주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황정이 다가왔으나, 심협이 두 사람과 대화에 열중해 있자 까딱 인사만 하고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떠나버렸다.
심협은 그녀를 불러 세울까 했지만, 곧 소태나무 근처에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야 동지였을지 몰라도 이제 곧 경쟁자가 될 것 아닌가.
“두 사람 모두 일찌감치 도착했으면서 왜 여지껏 여기 있는 거요?”
심협이 백소천과 섭채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사람들도 속속 도착했네만, 다들 저 결계에 막힌 상태라네.”
백소천이 먼 곳에 엎어져 있는 반투명한 ‘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열 수 없소?”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법술로든 힘으로든,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섭채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게 무슨 법진인지 아는 사람 없소?”
심협이 물었다.
“청련사의 고림 도우 말로는 불문의 금강복마권(金剛伏魔圈)과 비슷하다고는 하네. 다만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이 법진 바깥에 다른 법진이 한 겹 더 덮여 있어서 금강복마권의 진추(陣樞)를 완전히 가린 터라 뚫을 수가 없다네.”
백소천의 말에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섭채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섭채주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저는 입문한 이후에 줄곧 수행에 바빠 문중을 돌아다닌 적이 거의 없어서 문중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아니다, 네 잘못이 뭐가 있겠느냐? 우선 가서 보고 다시 얘기하자꾸나.”
심협이 웃으며 섭채주를 다독인 후, 세 사람은 대리석 광장을 가로질러 반투명한 빛 덮개 앞에 이르렀다.
심협이 안쪽의 나무 틈새로 들여다보니, 가장 중앙에 선 소태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빛 덮개를 살짝 매만져보니 마치 따뜻한 달걀 껍질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가 힘주어 누르자 빛 덮개도 따라서 더욱 단단해졌다.
“힘으로 공격한다면 빛 덮개는 더욱 깨뜨릴 수 없이 단단해질 거야. 반동으로 오히려 공격자가 다칠 가능성도 높지.”
백소천의 설명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겼다. 빛 덮개 뿌리 부분 바닥에는 복잡한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덮개의 가장자리를 따라 양쪽으로 곧장 뻗어나갔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빛 덮개의 뿌리 부분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면서 바닥의 부적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반 바퀴쯤 돌았을 때, 고림과 참월을 마주쳤다. 두 사람도 바닥의 부적 문양을 세심하게 연구하며 잔뜩 인상을 찌푸린 것이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표정이었다.
“두 도우께서는 어떤 단서라도 찾으셨습니까?”
심협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불문의 금강복마권 법진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진추가 있는 곳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참월이 고개를 저으며 어쩔 도리 없다는 듯 말했다.
“두 분께서는 찾는 범위를 넓혀보시지요. 다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심협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범위를 넓힌다고요?”
참월과 고림 모두 잠시 망설이더니 곧 뒤로 조금 물러났다가 다시 바깥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심협은 더는 별다른 말은 없이 씩 웃더니, 영문을 모르고 있는 백소천과 섭채주에 앞장서서 다시 전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결계를 절반 이상 지났을 때, 앞에서 문득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황정이 혼자서 손에 새하얀 장검을 들고 결계의 빛 장막 위를 내리찍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범어(梵語)를 읊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반투명한 빛 장막 위에 느닷없이 거대한 금빛 손도장이 떠올라 황정의 장검 위를 내리쳤다.
꽝!
한층 강렬해진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황정과 검 모두 이 거대한 힘에 백여 장이나 튕겨나갔고, 그녀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얼굴을 덮은 하얀 천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애써 일어나 피로 물든 천을 떼어내고는 얼굴의 핏자국을 닦은 뒤, 곧 다시 새 천을 꺼내 입가의 비스듬한 흉터를 덮었다.
“황 도우, 이 법진은 이상하리만치 단단하여 힘으로는 맞설 수가 없습니다.”
심협은 다시 시도하려는 황정을 보고는 걱정스런 마음에 조언을 했다.
황정은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심협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심협은 속으로 가볍게 탄식했다. 아직 선행을 놓고 다툴 마지막 관문에 이르지도 않았건만 그들은 파벌이 나뉘었다. 청련사의 고림과 구화산의 참월, 거검문의 정균과 아미산의 임천천이 각각 하나의 파벌이었고, 자신은 백소천과 섭채주와 함께였다. 그러나 오로지 황정만은 혼자였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들 쪽이 조금 더 승산이 클 터였다.
심협은 반투명한 빛 장막을 따라 한 바퀴를 돈 뒤, 끝으로 방금 출발했던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몸을 굽히고 바닥의 벽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살펴본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뒤로 물러나 광장 밖으로 나와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백소천과 섭채주는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심협은 꼿꼿이 서서는 속으로 구결을 외우며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볍게 문질렀다. 한 쌍의 새카만 눈동자에 순간 기이한 빛이 어리더니 그 안에 마치 빛을 내는 부적 문양이 생겨난 듯했다.
“동술……?”
백소천은 심협이 언제 이런 비술을 익혔는지 몰라 조금 의아해했다.
이 법술은 바로 심협이 용단의 손에서 얻은 유명귀안이었다. 지금껏 그는 순양검배를 온양하는 것 다음으로 이 법술에 시간을 쏟은 결과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룬 상태였다.
두 눈의 밝은 빛이 점점 더 환해지면서 눈앞의 풍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앞쪽의 대리석 광장 바깥에는 놀랍게도 살짝 누르스름한 빛을 띠는 얇은 빛 장막이 한 겹 더 있었는데, 이 역시 뒤집어놓은 무쇠 솥 모양이었고, 바닥의 모든 범위를 감싸고 있었다.
심협은 의문을 느끼며 유명귀안을 거두었다. 두 눈의 빛이 차차 어두워지면서 눈앞의 빛 장막도 따라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동술을 시전하자 눈앞의 빛 장막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렇군, 바로 그거였어!”
심협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기쁨을 금치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린가?”
백소천이 궁금한 듯 재빨리 물었다.
“이 금강복마권 법진 밖에 환진(*幻陣: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미혹하여 해치는 진법)이 더 있소.”
심협이 들떠서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그건 이미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다만 모두들 환진의 흔적을 찾아내지도 못했고 장애물을 뚫지도 못했다고, 그래서 금강복마권 법진의 진추를 찾아내지 못하고 밖에서 가로막힌 거라고…….”
백소천은 뭐 이런 바보가 다 있냐는 듯 심협을 빤히 보며 말했다.
심협은 그런 백소천을 바라보며 웃었다.
“겹겹이 산과 물이 앞을 가로막아 마치 길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단지 몸이 그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뭔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할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하게!”
왠지 자신이 바보가 된 듯해 백소천은 눈을 흘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이 환진을 발견할 수 없는 까닭은 이미 환진에 들어간 상태이기 때문이오. 환진 안에서 환진의 빈틈을 찾으니 헛수고일 수밖에…….”
심협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환진이 광장 전체를 뒤덮었으니 깨뜨리려면 그 바깥에서 허점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백소천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내 이미 찾았소.”
심협은 가볍게 웃으며 답하고는 곧장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양검배가 그를 태우고는 곧장 백 장 높이의 상공까지 올라갔다.
심협이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법진의 전체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는 눈빛을 집중하여 법진의 가장 꼭대기, 즉 ‘솥 밑바닥’의 한가운데 자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바로 여기다!”
말을 마친 그가 손을 흔들자, 옆에서 금빛이 폭발하더니 용 울음소리가 울렸다.
용각추는 금빛을 휘감은 채 아래로 내려가 순식간에 그 빛 장막의 중심을 때렸다.
그곳의 허공에는 담황색 깃털이 하나 떠 있었는데, 용각추가 꽂힌 순간 화르륵 하고 불길이 치솟아 금세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깃털이 사라지자 허공에는 마침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빛이 번득였지만, 마치 썰물처럼 곧 사방으로 물러나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정균 등이 머리 위에서 울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심협이 높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그들의 발밑에 있던 대리석 광장에도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원래 온통 새하얗게 보였던 온 땅의 벽돌들은 순식간에 천 년이 지나기라도 한 것처럼 얼룩지고 심하게 훼손되었다. 동시에 광장의 동서남북 네 방향에는 검은 부적 문양 선이 각각 하나씩 나타났다.
“심 도우가 환진을 깨뜨린 것 같은데요?”
정균의 말에 임천천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고림과 참월 등은 의아해하면서도 기뻤지만, 잠시 시간을 끈 뒤 사방에서 금강복마권 법진을 뚫을 진추를 찾기 시작했다.
* * *
보타산에서 현천경을 지켜보던 인파 속에서는 저절로 갈채가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빈틈없이 꼼꼼하군. 저 심 도우라는 사람 참 대단한데?”
“환진이 거기에 있었구나!”
문득 크게 깨달은 이도 있었다.
“대단해! 역시 섭 사매가 선택한 사내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