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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07화 (507/1,214)
  • 507화. 기괴한 그림자

    “심 도우, 혹시……?”

    황정이 의혹을 제기하려 했으나, 말을 맺기도 전에 심협이 갑자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이에 황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물러나시오!”

    심협이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고,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움츠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모닥불에 갑자기 검은 눈동자가 한 쌍 나타났다. 동시에 불길도 더 거세게 화르륵 불타오르며 갈라지더니, 두 마리 불구렁이가 한 마리씩 각자에게 달려들었다.

    심협은 재빨리 한 손을 결인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공기 중의 수증기가 빠르게 모여들어 푸른 수룡이 되더니 불구렁이와 한데 뒤엉켰다.

    치직!

    뜨겁게 달군 쇳덩이에 물을 뿌린 듯한 소리가 울리면서 희뿌연 수증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거의 동시에 황정 또한 한 손을 결인해 앞으로 떠밀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푸른 옥팔찌가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둥근 방패를 응집해 달려드는 불구렁이를 막아냈다.

    두 사람이 가까스로 불구렁이를 막아냈을 때, 대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굵직한 검은 덩굴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그들의 몸을 미친 듯이 휘감았다.

    심협과 황정은 미처 대비할 겨를이 없어 순식간에 검은 덩굴에 칭칭 휘감기고 말았다. 더욱이 그 덩굴에는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있어 가시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자 강렬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심협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 순간,  순양검배가 튀어나와 주위를 빽빽한 검광으로 가득 채우며 순식간에 덩굴들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그러나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방금 전 물리쳤던 두 마리 불구렁이가 한데 합쳐져 머리에 뾰족한 뿔이 달린 화염거인으로 변했다. 키가 3장에 이르는 이 거인은 곧장 손에 든 화염 장검을 휘둘러 심협을 내리쳤다. 더욱이 화염거인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숨겨져 있던 기운의 파동이 방출되어 나왔는데 놀랍게도 출규 초기의 기세였다.

    심협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다시 손을 휘둘렀다. 곧바로 소매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용각추가 용 울음소리를 내며 튀어나가 화염 장검을 향해 돌진했다.

    쾅!

    순간 굉음이 울리며 화염 장검은 용각추와 맞부딪쳐 엄청난 불빛을 내뿜었고, 용각추의 금빛이 흩어졌다.

    심협이 손을 다시 휘두르자 이번에는 순양검배가 허공에 둥근 곡선을 그리며 멀리서부터 화염거인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화염거인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화염 장검을 단단히 쥔 채, 칠흑 같은 두 눈에서 갑자기 금빛을 발했다. 그러자 검신에 갑자기 화염이 엉겨 붙으면서 불빛이 더없이 맹렬해졌고, 그 둘레에 날카롭게 솟은 불꽃이 톱니처럼 변했다. 거인은 그 상태로 심협을 쪼개버릴 듯 다시 장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심협은 두려워하기는커녕 도리어 기뻤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정면으로 맞서며 손에 용각추를 움켜쥔 채 들어 올려 가로막았다.

    꽝!

    화염거인의 장검이 묵직하게 내리치자 불타는 듯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그리고 그 순간, 순양검배가 단숨에 화염거인의 뒤통수를 찔렀다.

    그러나 심협의 눈에 차올랐던 희색은 순식간에 사라지고야 말았다.

    순양검배는 순식간에 화염거인의 뒤통수를 뚫고 이마로 솟아 나왔지만, 이거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거세게 장검을 내리친 것이다.

    쿵!

    화염 장검이 다시 한번 용각추 위에 떨어지자 거대한 힘에 심협은 살짝 무릎을 굽히고 말았다. 곧이어 작열하는 불길이 세차게 몰려와 그를 집어삼켰다.

    “심 도우!”

    덩굴에 얽혀 있던 황정이 이 광경에 깜짝 놀라 외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화염 속에서 푸른 빛이 번득이며 사방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심협은 손으로 피수결을 맺으며 몸 밖에 물의 장막을 덧씌워 화염의 힘을 차단하고, 별안간 화염 장검 아래로 파고들면서 손을 휘둘러 용각추를 던졌다.

    “캬오오!”

    용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용각추가 흐릿한 금빛에 덮인 채 화염거인의 가슴을 일격에 꿰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순양검배와 마찬가지로 용각추의 일격 역시 허공을 찌른 것처럼 화염거인에게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로군. 이건 도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 같지?”

    심협의 의문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제대로 생각해볼 틈도 없이 엇갈려 지나간 화염거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심협은 반쯤 몸을 웅크린 자세로 공격을 피했는데, 온 땅 가득 잘려나간 덩굴 잔해가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쩍 스쳤다.

    “이 두 놈의 본체는 모두 땅속에 있소! 그러니 지금처럼 공격해봐야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요!”

    심협은 곧바로 큰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황정이 그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할 리 있겠는가? 그녀는 즉시 몸을 날려 버들잎 모양의 비검을 딛고 서서 공중에 뜬 채 손에 든 불진을 떨쳤다. 그러자 불진이 하얀 빛으로 변하여 아래로 돌진했다.

    불진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수천수백 가닥의 눈처럼 새하얀 수정 실이 무수히 많은 투명한 바늘로 변해 땅에 내리꽂혔다. 이에 땅 위로 높이 뻗은 검은 덩굴들은 하나하나 산산조각이 났다.

    모든 수정 실들은 백배로 늘어나 땅속 깊숙이 곧장 뻗어 내려가 덩굴의 뿌리를 찾았다.

    심협도 둔지부를 한 장 꺼내 몸에 붙였고, 몸 바깥에 빛이 피어오르는 순간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땅속에 들어선 심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신식을 퍼뜨리자, 한쪽에서 이글이글한 열기가 느껴졌다.

    “거기 숨어 있었구나!”

    심협은 두말 않고 즉시 그쪽으로 추격해갔다.

    그는 땅속을 백여 장 헤치고 나가 그리 넓지 않은 지하 석굴로 뛰어들었다. 땅굴에는 자줏빛 갑옷을 입고 자줏빛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외투, 망토)을 뒤집어쓴 기괴한 그림자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옷자락 아래에는 실체가 없는 엷은 자줏빛 화염이 가득했고, 몸 아래에는 불꽃이 이글이글 치솟아 그 괴상한 몸뚱이를 떠받친 채 오르락내리락 떠다녔다.

    심협이 다소 얼떨떨해 있는 사이, 그 괴상한 형체도 그를 발견했다.

    심협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그 이상한 그림자는 물러서지 않고 맹렬히 마주쳐왔다. 상대의 몸에서 갑자기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서 경지의 파동이 단숨에 출규 후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심협은 전혀 물러섬 없이 한 손을 빠르게 결인하여 무명공법을 극한까지 운공했다. 주변 지맥(地脈) 속 수액들이 빠른 속도로 모여들더니 금세 길이가 10장이나 되는 3마리의 푸른 수룡이 되어 괴상한 그림자를 향해 돌진했다.

    기괴한 그림자가 양 소매를 떨치자, 자줏빛 화염 두덩이가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면서 튀어나와 두 마리 불구렁이로 변해 수룡과 맞부딪쳤다.

    자줏빛 화염에 닿는 순간 수룡들은 눈 깜짝할 새 증발하여 사라져버렸고, 더없이 뜨거운 기운이 삽시간에 온 땅굴에 퍼졌다.

    심협은 가슴이 철렁해서는 양손을 힘껏 앞으로 떠밀었고, 용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용각추가 어렴풋한 비늘을 가진 금룡을 휘감은 채 자줏빛 불구렁이에게로 부딪쳐 들어갔다.

    금룡과 거대한 구렁이가 맞부딪쳤을 때, 심협과 그 그림자의 거리는 서너 장에 불과해 무시무시한 열기가 몰고 온 거센 열풍이 그의 옷자락을 뒤흔들었다.

    그 순간, 심협이 두 손을 홱 돌리자 화염 속에 들어갔던 용각추가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금룡도 지렁이가 엎치락뒤치락 몸을 뒤집는 것처럼 함께 불구렁이의 맹렬한 불길 속에서 몸부림쳤다.

    이렇게 일어난 회오리는 강철로 만든 칼처럼 휘감겨 모든 화염을 흩어버렸다. 영성이 튀던 불꽃도 심협이 소매를 흔들자 전부 꺼져버렸다. 그의 옷에도 자그마한 구멍들이 뚫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

    거센 폭발음이 울리면서 용각추가 갑자기 커다란 힘에 튕겨 날아갔다.

    뒤이어 그 기괴한 그림자는 번쩍 몸을 날려 다가오더니 소맷부리를 들어 올려 심협을 향해 뻗었다.

    심협이 깜짝 놀라 자신을 향한 소맷부리를 보니, 그 안에는 흡사 펄펄 끓어오르는 자줏빛 불꽃 같은 것이 그를 향해 용암처럼 솟구쳐 나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의 심신(心神)이 갑자기 가라앉더니 옥침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의 몸 앞에 강한 금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갑자기 천책 허상이 나타났고, 곧 그 위로 한 줄기 금빛이 흘러나와 이제 막 솟구쳐 나온 자줏빛 화염을 휘감았다.

    다음 순간, 불가사의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자줏빛 화염이 마치 커다란 용이 물을 빨아들이듯 기이한 힘에 이끌려 천책 허상 속으로 잇달아 쏟아져 들어간 것이다!

    기세등등했던 자줏빛 화염은 천책의 허상으로 들어가자 마치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에 들어간 것처럼 일말의 파장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 기괴한 그림자는 깜짝 놀랐는지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반대쪽 소매가 펄럭이면서 다시 뜨거운 자줏빛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당연하게도 이 화염들 또한 금빛에 휘감겨 천책 허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상황을 본 그림자는 이제야 기이함을 깨달았는지 양 소매를 떨쳐 화염들을 거둬가려 했다.

    물론 심협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는 즉시 온 힘을 다해 천책을 재촉하여 더욱 빠른 속도로 화염을 빨아들였다.

    그때, 괴상한 그림자의 두봉 아래서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렸다.

    “크아아!”

    뒤이어 자줏빛 화염이 치솟아 그의 온몸을 집어삼켰다가 곧 다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폭발하고 사그라들면서 그 힘에 의해 천책 허상의 금빛이 거세게 떨렸고, 그 안에서 거대한 자줏빛 화염이 두 줄기 불기둥으로 변해 그림자의 소매로 다시 날아 돌아갔다.

    심협이 다시 나서기도 전에 이 그림자는 커다란 자줏빛 화염으로 변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향해 돌진하여 위쪽의 암석층에 부딪쳐 들어갔다.

    심협은 재빨리 둔지부의 힘을 발휘하여 그림자를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기괴한 그림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백여 장 밖에 황정이 푸른 덩굴에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한 송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이 달린 괴상한 요물을 한 손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꽃송이 같은 얼굴에는 사람의 그것과 닮은 이목구비가 달려 있었는데, 매우 흉악하고 사나운 표정으로 황정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 몸 아래에는 촘촘한 덩굴이 하나하나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심협이 갑자기 굳은 얼굴로 외쳤다.

    “조심하시오!”

    동시에 그가 손목을 떨치자 순양검배가 쌩하니 날아가 황정의 귓가를 바짝 스쳐 지나가면서 그의 뒤에서 뻗어 올라온 덩굴 하나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회개할 줄을 모르는구나!”

    황정이 돌연 싸늘하게 변한 얼굴로 버럭 호통을 쳤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눈부신 푸른 빛이 폭발하면서 푸른 화염이 갑자기 흘러넘쳐 순식간에 그 덩굴을 집어삼켰다.

    요물은 사람의 것과 비슷한 이목구비에 매우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냈지만, 소리는 조금도 내지 못하고 아래쪽 덩굴을 미친 듯이 휘감아 올리며 몸부림치는 듯했으나 잠시 후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감사합니다.”

    황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심협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심협이 물었다.

    “덩굴 요화(妖花)입니다. 출규 중기의 요물이지요.

    “이 비경에는 왜 이리도 많은 요물이 있는 것일까요?”

    심협이 아까부터 가졌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화련비경은 본디 보타산에서 종문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데 썼던 시련장소입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미 폐쇄된 지 오래되었지요.”

    황정은 덩굴 요화의 시신을 뒤져 요단을 챙기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앞서 도우께서 맞닥뜨렸던 꼭두각시도 시련에 쓰이는 것이었겠군요. 참, 방금 자줏빛 불덩이 하나가 튀어나오는 것 못 보셨습니까?”

    심협은 잠시 생각하더니 또다시 물었다.

    “보았습니다. 땅 위로 튀어나온 뒤 바깥에 있던 화염거인에게 흡수되어 달아나더군요.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운유화(雲遊火)였습니다. 상고시대 때부터 남아 있던 환수(幻獸) 종족의 하나인데, 보타산의 비경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황정의 설명에 심협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허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놈은 덩굴 요화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겁이 많으니까요. 이번에 도우께서 물리치셨으니 아마 다시 쫓아오지는 못할 겁니다.”

    심협은 황정의 뒤 이은 설명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까지 실랑이를 벌였더니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두 사람은 쉴 틈도 없이 다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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