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04화 (504/1,214)
  • 504화. 7일의 기한

    “섭 사매! 사매가 어찌 왔나?”

    주옥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위 사숙과 주 사형을 뵙습니다.”

    섭채주가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위청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행사가 되도록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반면 주옥은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눈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노여움이 번쩍 스쳐 지났다.

    “사매는 장문의 명을 받고 최대한 빨리 난관을 돌파하기 위하여 오늘 노 사저 대신 이번 선행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섭채주는 웃음기를 띠며 포권을 했다.

    “직전에 사람을 바꾸다니, 이게……?”

    주옥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난처한 듯 중얼거렸으나, 그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위청이 말을 받았다.

    “괜찮네. 장문의 명이니 응당 따라야지.”

    “예, 감사합니다. 위 사숙, 주 사형.”

    섭채주는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추고는 심협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백소천은 이미 눈치껏 비켜서서 심협 옆에 자리를 비워두었다.

    섭채주가 자연스레 다가가 심협 옆에 서자, 순간 단상 아래에서는 다시 수군거림이 퍼졌다.

    ‘누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심협이 전음으로 물었다.

    ‘오라버니를 도우러 왔지요.’

    섭채주가 간단하게 말했다.

    심협은 그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을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 짧은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다.

    ‘참, 대회에 참가한 용궁 사람들이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지 혹시 아느냐?’

    그는 문득 또다시 그 일이 떠올라 물었다.

    ‘일전에 사부님께서 사해용궁 내부에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하다 하셨는데, 동해에서 보낸 서신에는 대회에 불참한다는 소식뿐, 구체적은 설명은 없었답니다.’

    섭채주의 대답에 심협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한편, 광장 밖에는 이숙과 무명이 군중들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 곁에는 호리호리한 여인이 한 명 더 서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비스듬히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 검은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칼은 높이 올려 묶은, 남자 같은 차림새였다.

    “노 사저,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숙이 곁에 있던 여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섭채주가 자리를 대신한 노영이었다.

    “어찌된 일이긴, 제 정혼자를 위해 내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 청하더구나. 정말이지, 저 심협이라는 놈의 어디가 그리 좋다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노영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장문께서는……?”

    이숙이 떠보듯 물었다.

    “장문의 명은 무슨! 저 녀석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지. 이번에는 수련에 누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 징계를 면치 못할 게다.”

    노영이 더욱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렇게 계속 화를 자초해라. 일이 술술 풀리는군. 흐흐흐.’

    옆에 선 무명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속으로 냉소를 금치 못했다.

    일전에 그가 심협과 섭채주의 관계를 슬쩍 흘렸을 때, 주옥은 비록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기에 무명은 심협과 섭채주가 친밀한 모습을 보일수록 주옥이 더욱 날카롭고 매서운 수를 쓰리라고 믿었다.

    “이 연극은 정말이지 갈수록 재미있구나.”

    무명은 우쭐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연극이요?”

    이숙이 의아한 듯 묻자, 무명은 민망한 표정으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에 이숙도 그에게 신경을 끊고 시선을 다시 단상 위로 향했다.

    한편, 주옥은 잠깐 당황했으나 금세 평온한 모습을 되찾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 선행대회는 인원이 비교적 적기에 지난번과 달리 참가자들의 대련이 아닌 비경(秘境) 수련으로 바꾸었습니다.”

    “비경 수련이라니, 승패를 어떻게 가르려고?”

    “그러게, 실력을 겨루는 것도 아닌데 어찌 판단할 거지?”

    구경하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러나 연륜이 좀 있는 몇몇 제자들은 이미 상황을 짐작하였다.

    “비경이라…… 화련비경(花蓮秘境)이 다시 열리려나?”

    “정숙해주십시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번 시합의 모든 과정은 현천경(懸天鏡)을 통해 여러분께 보여드릴 것이니 편히 관람하시면 됩니다.”

    주옥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추스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광장의 천수관음상 뒤로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일곱 개의 커다란 구리거울이 나타나 천천히 10장 높이의 허공을 떠다녔다.

    이 거울들은 모두 누르스름한 광채를 반사하여 여염집에서 쓰는 구리거울보다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뒤이어 주옥이 양손으로 법결을 맺고 손을 들더니 일곱 개의 노란 구리거울 향해 하나하나 푸른 빛을 쏘아 보냈다.

    푸른 빛이 날아들자 거울들에 고리 모양의 부적 문양이 잇달아 비쳤다. 뒤이어 부적 문양 가운데에서 푸른 빛이 번득이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거울면의 노란 빛을 모두 쓸어버렸다.

    거울의 광채가 흩어지면서 곧 그 위로 서로 다른 경치가 나타났다.

    이런 법기를 처음 본 사람들이 신기한지 연달아 탄성을 질렀다.

    “현천경에 나타난 것이 바로 화련비경의 풍경들입니다. 여러분은 후에 이것으로 각 문파 도우들이 비경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위청 사숙께서는 시합에 참가한 제자들을 위해 규칙을 상세히 설명해주시지요.”

    주옥은 사람들의 반응에 흡족해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위청에게 말했다.

    위청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주저하더니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도우 여러분, 이번 화련비경의 시련은 모두 7일 동안 이루어지오. 비경이 열리면 무작위로 비경의 경계 지역으로 보내질 것이오. 비경 속에 겹겹이 도사리고 있는 장애물들을 가장 먼저 통과하고, 비경 한가운데의 소태나무에 이르러 그곳에 놓인 영기(令旗: 명령을 전하던 깃발)를 손에 넣는 이의 승리요.”

    모든 사람이 방금 들은 규칙들을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다.

    “위 사숙, 만약 7일이 지나도록 누구도 소태나무 아래에 이르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임천천이 가장 먼저 물었다.

    “비경의 시련은 기한이 7일이니 그 안에 우승자가 나오지 않으면 이번 대회는 전원 실패로 끝날 거요.”

    “위 선배님, 만약 누군가가 7일이 되기 전에 영기를 얻으면 또 어찌 합니까? 시련은 바로 끝나는 겁니까?”

    이번에는 심협이 물었다.

    “그렇지 않소. 비경 속에서 7일을 머무르는 것도 시험에 포함되오.”

    위청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만약 미리 손에 넣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고 7일 뒤까지 영기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겠군요?”

    심협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렇소.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영기를 손에 넣은 후에 종적을 감추고 다른 곳으로 떠나서는 아니 되오. 반드시 소태나무 아래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거요.”

    위청의 마지막 말에 사람들은 안색이 변해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되면 이번 선행대회는 지금까지의 대회보다 훨씬 어려워질 터였다. 승리를 거머쥐려면 비경 곳곳에서 순위 다툼을 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소태나무 아래에 도착해야 하고, 게다가 일단 영기를 손에 넣으면 다른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 셈이니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들여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터. 당연히 지금까지의 대회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심협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심지어는 청련 장문이 자신을 겨냥하여 갑자기 대회 내용을 바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련 과정에서 여러분은 자기 능력을 가늠하여 행동해야 하오. 위험을 만나거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쟁탈전이 벌어진다 해도 상대의 목숨을 해칠 의도를 품어서는 아니 되오.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할 거요. 목숨을 잃을 정도의 위기가 아니라면 우리 보타산에서는 시련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오. 모두 이해했소?”

    모처럼 많은 말을 단숨에 쏟아낸 위청은 마침내 귀찮은 듯 물었다.

    “알아들었습니다.”

    심협을 비롯한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며 한참을 주저한 뒤에야 다소 어수선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할 수 있겠구려.”

    사람들이 이해한 듯하자 위청은 주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옥은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타원형 영패를 끌러 한 손으로 결인하고는 두 손가락을 모아 그 위를 짚어 한 가닥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영패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그 위로 은빛 법진 문양이 뻗어 나와  한 변이 3척 정도 되는 흐릿한 정사각형 그림이 되었고, 그 안에서 기이한 파동이 전해졌다.

    이어서 그가 슬쩍 내던지자 영패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 위로 날아갔고, 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흐릿한 그림은 다시 몇 배로 불어나 연못 한가운데의 연꽃을 뒤덮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연꽃은 다른 연꽃과 달리 분홍빛 꽃잎 바깥쪽에 금실을 박아 넣어 연꽃 송이 전체에 금테를 두른 것만 같았다. 또한 꽃잎 하나하나에 흐릿한 그림이 비치자 옥으로 만든 것 같은 투명한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 실로 비범했다.

    잠시 후, 이 연꽃 위를 뒤덮었던 흐릿한 빛이 조금씩 실체화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둘레가 1장쯤 되는 둥근 입구로 바뀌었다. 그 너머 통로에서는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회에 참가할 도우들은 어서 들어가십시오!”

    주옥이 큰소리로 지시했다.

    심협에게 여전히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태응관의 여관이 앞장서서 곧장 통로로 날아 들어갔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은 푸른 빛에 파묻혀 사라져버렸다.

    청련사의 고림 두타와 구화산의 참월선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여러분, 제가 먼저 가도록 하지요.”

    임천천도 웃으며 말하고든 입구로 날아 들어갔다.

    “임 사저, 기다리십시오.”

    정균이 재빨리 그녀 뒤를 바짝 쫓았다.

    심협과 백소천, 섭채주만이 그 자리에 남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서로 다른 지역으로 보내질 것을 알면서도 함께 날아 들어갔다.

    “조심해야 한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섭채주에게 당부했고, 미처 응답을 받기도 전에 눈앞에 점점 더 밝은 빛이 가득 밀려들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대한 힘이 불쑥 끌어당기는가 싶더니, 그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한쪽으로 벗어나 곧 옆에 있던 섭채주와 백소천의 기운을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다.

    거의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이 조금씩 흩어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심협은 빠르게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고, 순양검배를 불러낼 틈도 없이 두 발이 땅을 디뎠다.

    철퍽!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심협은 두 발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자신이 떨어진 곳이 어느 늪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둘러보니 반경 수백 장은 거의 모두가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었는데, 온통 시커먼 그 안에서는 때때로 하얀 공기방울이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더 먼 곳은 모두 희미한 안개로 가려져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심협이 손을 들어 결인하고 손 가는 대로 휘두르자, 웅덩이에 고인 물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굵직하고 투명한 물구렁이로 변해 고개를 쳐들고 심협의 발아래를 떠받쳤다.

    심협은 물구렁이에 올라선 채 신식을 풀어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뒤쪽으로 향했던 신식은 불과 10여 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어떤 벽에 부딪힌 것처럼 되돌아왔다.

    그는 방향을 살짝 틀어 신식을 머리 위쪽으로 뻗었다.

    그러나 신식이 수백 장을 막 벗어난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면서 그의 신식을 그대로 흩어버렸다.

    ‘대단한 금제다! 신념(神念)을 겨냥한 것만이 아닐 거야.’

    심협은 욱신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한참이나 공을 들여 땅 위에서 자갈 하나를 찾은 뒤, 온힘을 다해서 머리 위쪽을 향해 비스듬히 날렸다.

    전혀 볼품없었던 자갈은 법력에 싸여 마치 유성처럼 솟아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심협의 신념이 무너졌던 높이에 이르렀다.

    펑!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던 돌멩이가 터지면서 가루로 변했다.

    심협은 이를 올려다보다가 섣불리 어검비행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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