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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503화 (503/1,214)
  • 503화. 스스로 쟁취하겠소!

    섭채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청련진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 너의 자질로는 이번 생에 채주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선배님께서는 실망하셨습니까?”

    심협이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그 반대다. 도리어 조금 놀랐지. 네 자질로 이리 짧은 시간에 출규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청련진인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 후배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지요.”

    심협은 그녀를 대신해 더없이 평온한 투로 다음 말을 맺어주었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담겨 있었다.

    “네가 이번 선행대회에 참가하는 이유 또한 수명을 늘리기 위함이겠지? 허나, 솔직히 말해 미안하다만…… 그렇게 외부의 힘을 빌려 수명을 보충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최선의 방법은 수행하여 경지를 돌파해 신선이 되는 것이야. 하지만 지금 너의 경지와 자질로는 진선의 경지에 이르기란 너무나 어렵겠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시간이 부족할 게다.”

    청련진인이 천천히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당시에도 후배가 지금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 거라 여기셨지요. 그렇다면 장래의 일을 또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심협은 한결같이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웃으며 답했다.

    “너의 앞길은 걱정스럽다만, 채주는 장래에 큰일을 기대할 수 있는 아이다. 네가 다시 그 아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짐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청련진인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화가 난 것도, 꾸짖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전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면 그런 염려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녀를 만나보니 이제 두렵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니 선배님께서도 채주를 경시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심협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그 아이의 자질은 내 이제껏 걱정한 적이 없다. 오직 한 가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그 아이의 심성이야. 그동안은 서둘러 하산하기 위해 절제 없이 수행하고 단련하다가 난관에 부딪쳐 돌파하지 못하고 있지. 이게 네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청련진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승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하산할 수 없다는 규칙은 선배님께서 세우신 겁니다. 한데 어찌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십니까? 허나 선배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난관은 채주를 가로막을 수 없으니까요.”

    심협은 실제로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따지듯 말했다.

    “선행대회의 승부가 어떻게 되든 내 너에게 선행 한 알을 줄 수 있다. 네 수명을 적어도 2백 년쯤 늘리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게야. 네가 앞으로 더는 채주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조만 한다면 말이다.”

    설득이 통하지 않자 청련진인은 거래를 시도했다.

    “선배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이 후배는 어떤 것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어떤 것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쟁취합니다.”

    심협은 흥미가 사라져 포권하고는 곧장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너는 네가 선행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느냐?”

    청련진인은 뒤돌아선 심협에게 물었으나,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을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련진인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심협이 보타산에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보타산 수미곡(須彌谷), 부지가 무려 천 장이나 되는 거대한 광장이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게 붐볐다.

    수많은 보타산 제자들이 광장 주위에 모여 곧 있을 선행대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평소 생업으로 분주하던 잡부들도 오늘은 적잖이 여유가 생겨 성대한 행사를 구경하러 왔다.

    심협은 백소천과 함께 보타산 집사 장로의 안내로 수미곡에 도착했다.

    한데 두 사람이 채 골짜기에 다다르기도 전에 누군가 그들을 불렀다.

    “백 도우, 심 도우.”

    심협이 고개를 돌려 보니, 푸른 갑옷을 입은 거한이 길을 안내하던 보타산의 집사 장로는 버려둔 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9척이 넘는 키에 단정하게 기른 단발, 머리카락보다도 긴 구레나룻이 입가까지 나 있었다. 등 뒤에는 너비가 거의 문짝만 한 거검(巨劍)을 메고 있어 멀리서 보면 꼭 앞에 철탑이 우뚝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정 도우.”

    백소천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선행대회에 참가한 거검문 제자 정균이었다.

    “두 분 도우께서는 준비를 잘하시었소?”

    가까이 다가온 정균이 웃으며 물었다.

    “이게 준비할 것이 뭐 있소이까? 도우들끼리 한바탕 겨뤄보는 것뿐이니 우정이 제일이요, 시합은 둘째이지 않소.”

    백소천이 웃으며 말했다.

    “정신 좀 차리시오! 그대가 그리 말하니 나까지 의욕이 다 사라지는구려.”

    백소천의 대답에 정균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으나, 목소리는 썩 유쾌했다.

    “그러는 도우야말로 정신을 차려야겠소. 그대는 아미산의 그 임천천(林芊芊)이라는 사저 앞에서 실력발휘를 좀 해보고 싶은 것 아니오?”

    백소천이 싱글거리며 놀리듯 내뱉은 말에 뜻밖에도 정균은 귀뿌리가 살짝 벌게지면서 부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말은 그렇지만, 나는 선행에 별 욕심도 없으니 그녀가 쟁취하도록 도와주고 싶긴 하오.”

    백소천은 그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심협을 쳐다봤다.

    선행이란 물건은 적어도 수명을 2백 년은 늘려주는 보물인 만큼 현재 이들 경지의 수선자들에게 얼마나 중한 것인데 정말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백소천이 이번에 온 이유는 심협이 선행을 거머쥐도록 돕고자 하는 의도였다.

    세 사람은 어느새 골짜기 안으로 접어들었고, 곧장 통로를 따라 하얀 광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보타산의 제자들이 수군거리며 이들, 특히 심협을 향해 손가락질들을 해댔다. 어떤 이는 그의 훤칠한 풍채를 칭찬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그저 그렇다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심협을 그들의 어떤 사형과 비교했다.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섭채주의 소문과 비웃음이었다.

    심협은 이에 개의치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광장을 둘러봤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는 여자 신상이 하나 서 있었다. 신상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부처가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푸는 인상(印象))을 맺은 채 왼손으로는 옥정병(玉淨甁)을 받쳐 들었고, 뒤에는 천 개의 팔이 마치 공작의 꽁지깃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신상이었다.

    신상 바로 앞에는 폭이 백 장에 가까운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늘씬하게 뻗은 연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주위에는 마치 옥처럼 푸른 연잎이 분홍빛 꽃잎과 어우러져 수면을 가득 뒤덮어 더없이 아름다웠다.

    연못가에는 이미 몇 사람이 서 있었는데, 이들이 다가오자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중 연녹색 긴 치마를 입은, 굴곡진 몸매의 아름다운 여인이 반갑게 맞았다.

    “정 사제, 백 사제, 심 사제!”

    이 여인이 바로 임천천 사저로, 요 며칠 동안 백소천이 서로를 연결해주어 모두 이미 잘 알게 된 사이였다.

    심협 일행도 재빨리 예를 갖추었다. 태연자약하던 정균은 임천천이 다가오자 얼굴에 웃음기가 늘어났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임천천 뒤에는 푸른색 선의(禪衣)를 입은 청년 두타(*頭陀: 행각승,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수행하는 승려)가 옅은 남색 승포를 입은 어린 승려와 함께 다가와 세 사람을 향해 손바닥을 세우며 불호를 읊조렸다.

    심협은 이 두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소식통인 백소천이 짧게 알려주었다. 앞사람은 청련사에서 온 고림선사(苦林禪師)이며, 뒷사람은 구화산에서 온 참월선사(鏨月禪師)였다.

    청련사는 불문에 속해 있으나 독자적으로 하나의 문파를 이루어 대부분의 청규계율(*淸規戒律: 승려, 도사가 반드시 지켜야할 규율)에 따르지 않았고, 공법도 마귀를 굴복시키고 요괴를 멸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살상력이 대단했다.

    구화산은 더욱 독특했다. 그들은 지부(地府)의 일맥에 속하여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에 몸소 들어가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의 도통(道統)을 확장시켰다. 공법도 귀신을 천도하고 업을 없애는 데에 무게를 두어 음살과 귀물 따위를 대적할 때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여러 도우들을 뵙습니다.”

    심협은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고는 시선을 그들 뒤에 선 여인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늘씬한 여인이었는데, 도가의 여관(*女冠: 도교의 여도사)차림이었는데, 회색과 하얀색이 섞인 도포를 입었고, 하얀 비단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심협의 시선이 닿자 여인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지만, 딱히 그들에게 인사하려는 기색은 없는 듯했다.

    심협은 다소 무안해져 어색하게 웃고는 그녀를 향해 포권했지만, 여인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이 연못가로 돌아온 뒤에야 임천천의 소개로 그 여인은 비로소 입을 열고 심협 일행과도 몇 마디 나누었다.

    심협은 그제야 그녀가 몸담고 있는 종문은 태응관으로, 여제자들만 있는 도가 종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하늘 멀리서 두 줄기 빛이 날아오더니 천천히 내려왔다.

    둔광이 땅으로 떨어질 때, 한 줄기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뒤이어 두 사람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한 사람은 용모가 평범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비할 데 없이 훤칠하고 비범해 보였다.

    두 사람, 특히 새하얀 옷을 입은 준수한 사내가 사람들을 향해 따사로운 웃음을 지어보이자, 보타산 제자들의 갈채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주 사형!”

    “주옥 사형은 그야말로 신선을 놀라게 할 만하다니까!”

    “섭 사매는 정말 눈이 삐었지, 어떻게 주 사형을 거절하고…….”

    광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귓가에 끊이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면서도 울분을 터뜨렸다. 울분의 대상은 ‘주 사형’의 마음을 사로잡은 섭채주, 그러면서도 주 사형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는 외부인을 택한 섭채주였다.

    허나 한 사람, 주옥과 함께 나타난 위청만은 역겹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이 상황에 혀를 찼다.

    이런 환대를 즐기던 주옥은 옆에 있던 사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즉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정숙해 주십시오!”

    온화하고도 웅장한 기세의 음파가 삽시간에 광장을 휩쓸면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뚝 그쳤다.

    “여러 도우들의 지지를 받아 이번 선행대회를 예정대로 열게 되었습니다. 이 주옥은 사문의 부탁을 받아 이번 대회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만약 온당치 않은 점이 있다면 여러분께서 바다같이 넓은 아량으로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옥이 그렇게 말을 마쳤을 때, 누군가가 의아한 듯 물었다.

    “모든 과정은 문중의 제자들이 주관합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심협이었다.

    “이 선행대회는 후배 제자들이 교류하고 대련하는 행사인 만큼 모든 권한을 제자들이 주관합니다. 우리 또한 문중 어른의 동행 없이 홀몸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이 주옥 사형이라는 분을 얕보지 마세요. 그는 수행한 지 백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대승 초기의 수사가 된 인재니까요.”

    임천천이 나서서 설명해주자 심협은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길이 멀다 해도 지금쯤이면 용궁 사람들이 도착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 저 멀리서 담황색 둔광이 한 줄기 날아와 날렵하게 회전하더니 마치 신령한 나비처럼 광장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심협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섭 사매! 사매가 어찌 왔나?”

    주옥은 하던 말을 끊더니 굳은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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