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나란히 걷다.
흑곰 요괴는 그 말을 듣고 동작을 늦추더니 정말 멈춰 섰다.
“그 도우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 자죽림 안에 정말 요물이 침입했습니다. 제가 사로잡으려 했으나, 뜻밖에도 놈이 둔술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곧이어 한 사람이 숲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심협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잠시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담황색 옷을 입은 그 여인은 피부가 눈보다 희었으며, 두 눈동자는 먹빛처럼 검은 데다, 코는 오똑했으며, 붉은 입술은 옥과 같았다. 고운 얼굴 위의 눈썹은 옅으면서도 잘 어울렸는데, 더없이 아리따워 보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정혼자 섭채주였다.
“네가 보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소리 소문 없이 자죽림의 결계를 통화할 수 있었단 말이냐?”
흑곰 요괴가 흠칫하여 물었다.
“일종의 요정 따위인 듯합니다만, 몸에 엷은 마기가 존재하였으니 아마 마화되는 중일 것입니다.”
섭채주는 시선을 줄곧 심협에게 둔 채로 답했다.
“너 아느…… 이 도적놈아, 빤히 뭘 보고 있는 것이냐?”
흑곰 요괴는 심협에게 물어보려다가 그가 멍하게 섭채주를 보고 있자 벌컥 화를 냈다.
하지만 그의 물음은 심협의 귀에 반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도적놈아, 섭가 계집애가 네 마누라냐? 아직도 쳐다보고 있어?”
흑곰 요괴는 문득 불만스러운 마음에 속으로 ‘색마 같으니라고’ 하고 욕을 내뱉었다.
한편, 심협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섭채주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고 웃었다.
“계집애야, 너는 아직 폐관 중 아니더냐? 어찌 제 발로 뛰어나온 게야? 네 사부님께 야단맞을까 무섭지도 않으냐?”
흑곰 요괴는 두 사람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었다.
“호법 선배님, 저는 오늘 저녁에 미리 출관하였습니다. 그 난관은 늘 지나갈 수가 없어서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잠시 보류해두기로 하였지요.”
섭채주는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너의 자질은 내가 근래에 봐왔던 인간족 중 제일이다. 위청조차도 너보다는 조금 뒤떨어지지. 이곳에 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출규기 정점에 올라 대승기를 눈앞에 두고 있지 않으냐. 허나 솔직히 말해서 수행이 너무 빠른 것도 꼭 좋은 일만은 아니야. 네가 현재의 난관을 뚫기 어려운 것은 그동안 너의 수행이 너무 순조로웠던 것과도 무관치 않아.”
흑곰 요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사부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긴 합니다.”
섭채주가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하! 물론이겠지. 허나……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지금 보타산 위아래로 도치(道痴)라는 네 별명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더냐? 그동안 매일 같이 폐관수련 중이지 않았더냐.”
흑곰 요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호법 선배님, 그만 놀리시고, 자죽림의 결계 법진에 이상이 있는지 봐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섭채주는 얼굴이 발갛게 변해 황급히 말했다.
“그래, 그래. 하마터면 중요한 일을 잊을 뻔했구나.”
흑곰 요괴는 거듭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떠나려다가 심협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또다시 구시렁거렸다.
“이곳은 보타산의 금지 구역인데, 이 좀도둑놈이 왜 아직 안 가는 게야?”
“후배가 올 때는 줄곧 땅속에 숨어 왔던지라 위로 올라오니 어떻게 유연곡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심협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말했다.
“그럼 물을 줄도 모르느냐? 너는 그냥…….”
흑곰 요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섭채주가 끼어들었다.
“호법 선배님, 저는 당장 아무 일도 없으니 제가 길을 안내하지요.”
흑곰 요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늘 밤은 달이 서쪽에서 떴나? 이 섭가 계집애의 행동이 평소와 좀 다른데? 예전에는 그녀가 어디 이깟 일에 흥미나 보였던가?’
그러나 그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섭채주는 이미 인사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 심협을 이끌고 떠나버렸다.
흑곰 요괴는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낌새를 차리고는 허벅지를 철썩 치더니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알고 보니 저놈이 그 썩을 놈이었구먼!”
심협과 섭채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참을 걸었지만,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누이, 수행에 있어서 부지런한 것도 좋지만 순리를 따라야지. 왜 그리 악착같이 하는 거야?”
마침내 심협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며 물었다. 그러나 말을 마친 그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섭채주의 경지는 자신보다 훨씬 높건만, 이런 말은 다소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을 테니까.
“방법이 없었어요. 이곳에 온 뒤로 저는 줄곧 돌아가고 싶었으나 사부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셨어요. 수련 경지가 대승기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산문을 떠나지 못하도록 지엄한 명령을 내리셨거든요.”
섭채주의 말에 심협은 저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이가 네게 모질게 대하느냐?”
“아, 아니에요. 오해 마셔요. 사부님께서는 제게 아주 잘해주십니다. 그분은 현재 보타산의 장문으로서 본인의 일이 바쁘시지만, 저의 수행을 이끌어주시는데 있어서는 소홀하셨던 적이 없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아무리 부지런했어도 지금과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을 테지요.”
섭채주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설명했다.
“그럼 다행이구나. 나는…… 훨씬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너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토록 빨리 보타산에 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심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섭채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심협을 자세히 훑어보더니 돌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그러느냐?”
심협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인가 싶어 당황했다.
“저도 수행한 뒤에야 수련에는 큰 고생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문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지요. 한데 사문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오라버니는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섭채주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하자 심협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앞의 여인은 이미 어린 티가 조금도 남지 않았으나, 그는 마치 춘화성에 있던 때로 되돌아간 듯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종문의 뒷받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지금껏 많은 귀인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 네가 상상했던 것만큼 그리 힘들지는 않았단다.”
지금껏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때때로 수명이 바닥을 드러냈건만, 되돌아보니 어째서인지 정말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엇, 섭 사매?”
심협은 그제야 자신들이 어느새 자그마한 광장까지 걸어왔으며, 한밤중임에도 몇몇 사람이 자신들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여제자가 외치자 서너 명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은 누구야? 우리 문중 제자 같아 보이지 않는데…….”
“한데 섭 사매는 어찌 저 사람과 저토록 친밀해 보이지?”
“주옥 사형이 아니잖아?”
“흠, 저 사람도 잘생기긴 했는데, 주옥 사형에 비하면 뭐…….”
주위의 수군거림에도 심협은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 섭채주의 섬섬옥수를 잡고는 산보하듯 유유자적 걸었다.
섭채주 역시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그저 귀뿌리가 살짝 달아올랐을 뿐 말없이 그를 따랐다. 오히려 보타산 제자들이 깜짝 놀라 더욱 수군댔다.
한편, 나무 그림자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 아래, 무명은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나무줄기를 붙잡은 채, 다섯 손가락을 나무껍질 속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그의 눈은 질투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안도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저자의 마음은 이숙 사매가 아니라 섭 사매에게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흐흐…….”
혼잣말을 마친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주옥의 동부로 향했다.
그사이 심협과 섭채주는 광장을 벗어났고,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내가 보타산에 온 것은 언제 알았느냐?”
심협은 여전히 섭채주의 곱디고운 손을 쥔 채 물었다. 섭채주가 오늘 갑자기 출관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터였다.
“저녁 무렵, 노영 사저께서 갑자기 기별을 보내 대당관부에서 온 호색한 하나가 저의 정혼자라고 자칭한다며 제게 혼쭐을 좀 내줄지 묻더라고요. 정말 오라버니라는 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부디 오라버니이길 바라는 마음에 폐관을 그만두고 나왔지요. 한데 나오자마자 자죽림에서 오라버니와 마주치게 될 줄은…….”
섭채주가 천천히 말했다.
“이숙 도우가 그 노영이라는 이에게 말한 모양이구나.”
심협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한데 어찌 대당관부를 대표해 선행대회에 참가하는 건가요?”
섭채주가 의아해한 듯 물었다.
“말하자면 조금 긴데…….”
심협은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말씀해주셔요.”
섭채주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에…… 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곧 춘화현을 떠났다. 그리고 곧장…….”
심협은 자신이 요 몇 년간 겪었던 일들을 차분히 이야기했고, 섭채주는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다만 심협은 옥침과 꿈속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숨겼다. 자신이 섭채주라 해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자박자박한 두 사람의 발소리와 심협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은은히 메아리치는 밤의 숲은 고즈넉했다.
심협의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이야기 내용에는 수많은 위험이 담겨 있어, 섭채주의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심협은 자신의 수명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총명한 그녀는 그의 말 속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알아채고는 입술을 꼭 깨물었고,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푸른 빛이 한 줄기 허공에서 나타나 갑자기 뚝 떨어지더니 두 사람 전방 머리 위 3척쯤 되는 허공에 하늘하늘 떠올랐다. 푸른색 얇은 비단치마를 입은 채 눈처럼 하얀 맨발로 허공을 딛고 선 여인이었다.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으나 매우 아름다웠고, 독특한 청록색 긴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린 그녀에게서는 속세를 초월한 듯 맑고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심협은 대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바로 당시 섭채주를 데려갔던 보타산의 그 선사였다.
“사부님!”
섭채주도 그녀를 보고는 심협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췄다.
“청련진인(靑蓮眞人)을 뵈옵니다.”
심협도 따라서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이 정도면 배웅은 충분히 했으니 이만 돌아가야지.”
여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섭채주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아쉬운 듯 심협을 쳐다보았다.
심협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섭채주는 그제야 조금 떨떠름하게 ‘예’라고 말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사부인 청련진인은 곧바로 떠날 생각이 없었던 듯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에 그녀는 사부에게 다가서며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지만, 심협이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먼저 돌아가려무나.”
심협의 평온한 목소리에 섭채주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조용히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