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검은 그림자
그들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숙은 곧 인사를 나눈 뒤 류청과 함께 떠나갔다.
“심협 이 사람, 예전에는 몰랐는데 여복이 이리 좋았단 말이야?”
백소천은 심협과 나란히 서서 어깨를 툭 치더니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왜, 부럽소?”
심협이 물었다.
“어허! 나는 불가의 사람일세. 욕망을 자제해야 하지.”
백소천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술부터 끊는 게 옳지 않겠소?”
심협이 장난스레 비웃었다.
“그 말은 틀렸네. 술과 고기는 장을 지나 빠져나가도, 부처님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걸 어찌 모르는가?”
백소천은 마치 불변의 진리를 설명하듯 진중하게 말했다.
심협은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데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 나는 왜 그 낭자가 자네를 바라보는 눈길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백소천은 갑자기 진지해지더니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헛소리 마시오. 그녀는 대당의 공주이시오.”
심협이 가볍게 꾸짖었다.
“아니, 그녀 말고, 옆에 있던 그 류청이라는 낭자 말일세.”
백소천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자 심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구려. 어째 갈수록 어이없는 말을 하시오?”
심협은 시시콜콜 따지기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고는 돌아서서 누각으로 돌아갔다.
백소천도 씩 웃더니 몸을 돌려 자기 누각으로 돌아갔다.
* * *
밤. 누각 안에는 희미한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심협은 가부좌를 튼 채, 양손으로 원을 감싸 안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 바깥은 희미한 빛에 뒤덮여 마치 별빛에 흠뻑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신념은 이미 천책의 허상 속으로 들어가 허무의 공간에 와 있었다.
꿈속에서 천책에 대해 점점 많은 것을 파악하면서 천책에 대한 장악력도 한 단계 높아진 터라 옥침에서 그림자를 불러낼 필요도 없이 신식을 집어넣고 마음껏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그 별바다 속에서 원래 보이던 별의 궤적은 더욱 또렷해지기 시작했고, 찬찬히 기억을 더듬자 별의 법진이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법진의 운행 변화가 꿈속 수련경지를 불러낼 수 있는 핵심이며, 이 법진을 통제해야만 자신의 신념으로 작동시켜 훗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만 꿈속 경지를 소환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별의 궤적대로 별의 법진을 작동시켜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만일 자칫 잘못하여 법진을 작동시켰다가 꿈속 경지를 불러오게 될 경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 곧바로 바닥나고 말 터였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손을 휘둘러 곁에 있던 옥침을 거둬들였다.
심협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멈추었다. 마음속에서 귀장 조비극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주인님, 아래층에 뭔가가 몰래 잠입해 들어왔습니다.’
‘망령? 아니면 귀물이냐?’
심협은 긴장하여 전음으로 물었다.
오계국에서 임달의 잔혼을 흡수한 이후로 조비극의 실력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지금은 이미 출규 후기에 도달해 있었다. 한 쌍의 유명귀안도 따라서 완전히 제련되어 음살과 귀물에 대한 통찰력이 전보다 훨씬 뛰어났다.
‘예. 실력은 강해보이지 않으나 기운이 몹시도 은밀합니다.’
조비극이 말했다.
‘붙잡을 자신이 있느냐?’
심협이 물었다.
‘자신은 할 수 없으나 시도해볼 수는 있지요.’
조비극이 답했다.
‘그럼 가거라. 단, 살려두어야 한다.’
심협은 당부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사이 어두운 그림자 한 줄기가 건곤대에서 조용히 미끄러져 나와 심협의 옷자락을 타고 바닥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갑자기 탁자며 의자 따위가 나뒹구는 소리가 울리더니,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달아났군!”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1층은 온통 아수라장이었지만, 사람 그림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귀장은 벌써 쫓아나간 뒤였다.
심협도 바로 그들을 쫓아나갔다.
때는 한밤중이라 온 산골짜기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오직 누각 안에 켜진 등불들만이 아른아른 빛났다.
심협이 훑어보니 전방 백여 장 밖의 산비탈에서 조비극의 몸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시커먼 그림자와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는 즉시 사월보를 운공하여 발밑에 달빛을 흩뿌리면서 곧 흐릿한 그림자로 변해 그쪽으로 내달렸다.
그 검은 그림자는 몹시 경계하고 있던 터라 심협이 가까워지는 것을 눈치채고는 몸에서 대량의 검은 연무를 내뿜더니, 몸을 굴려 조비극의 공격범위를 벗어났다. 그리고는 구르다가 껑충껑충 뛰면서 산골짜기 밖으로 달아났다.
심협은 달려들어 조비극과 함께 그 검은 그림자를 쫓아갔다.
“어찌 된 일이냐? 저것은 무엇이고?”
심협이 물었다.
“어떤 요정이나 요괴인 듯한데, 몸에 귀기가 섬뜩한 것이 감지력이 뛰어납니다. 방금 제가 아래층에 잠입하자마자 들키고 말았지요.”
조비극이 멈추지 않고 내달리면서 말했다.
“저게 무엇이든 일단 잡고 보자. 좌우를 포위해 달아나지 못하게 하자꾸나.”
심협이 짧게 설명한 후 신호를 보내자 두 사람은 좌우로 찢어져 추격을 이어갔다.
그 검은 그림자는 수백 장을 굴러간 뒤, 갑자기 높이 튀어 오르더니 몸을 휘리릭 펼쳐 놀랍게도 마치 연처럼 앞을 향해 미끄러져 지나갔다.
이를 본 조비극은 몸을 높이 날려 흐릿한 귀무(鬼霧)로 변해서 뒤쫓았다.
그러나 그가 막 가까워지는 순간, 그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한 덩어리로 줄어들더니 곧장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온몸에 검은 빛이 번쩍하더니 땅속으로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
심협이 한 발 늦게 손을 뻗었지만, 그의 몸에서 검은 머리칼만 한 움큼 쥐어뜯었을 뿐 그를 놓치고 말았다.
“땅속으로 숨을 줄도 알다니!”
조비극은 땅에 내려선 뒤 조금 놀란 듯 내뱉었다.
“공격력과 기운 파동 모두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을 보니 그저 정탐하기 위해 온 것이로구나. 마기가 있어.”
심협은 손안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문질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가서 그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조비극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 어쨌거나 이곳은 보타산이니 귀물인 네가 돌아다니는 것은 좋지 않아. 우선 건곤대로 돌아가거라. 내 직접 좇을 것이다.”
심협의 대답에 조비극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 말이 옳다는 생각에 몸을 말아 한 줄기 연무로 변하여 건곤대 속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머리칼의 냄새를 살짝 맡고는 손을 흔들어 새로운 둔지부를 한 장 꺼낸 뒤,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부적에서 곧 빛이 반짝이며 노란 광채가 뻗어 나와 위에서 아래로 심협을 뒤덮었고, 그는 곧 몸을 낮추더니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땅속에 들어가자마자 심협은 주변의 대지가 온통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혀왔다. 꿈속에서 원 도인이 빌려준 비단 손수건을 썼을 때와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그러나 그런 느낌에는 이내 적응할 수 있었고, 그는 손에 쥔 머리칼의 기운에 의지하여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둔지부 덕에 그는 땅속에 있었지만 진행속도가 조금도 느리지 않았고, 금세 수백 장을 추격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앞쪽 땅속에 검은 그림자 한 덩이가 제자리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아하니 땅속에서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협은 즉시 속도를 높여 따라잡았다.
그 검은 그림자는 대경실색해 더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한 방향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완전히 구르는 괴이한 방식으로 도망쳤는데, 몸 바깥은 엷은 검은 빛으로 싸여 있었고, 속도 또한 엄청났다.
심협은 전력으로 법력을 재촉하여 바짝 뒤쫓아 갔다.
그러나 그 검은 그림자는 둔지술에 매우 능한 놈인지, 심협이 아무리 속도를 내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쫓아가자 몸에 붙어 있던 둔지부의 빛이 차츰 약해지면서, 곧 힘을 다해갔다. 그러자 심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부적을 꺼내 가슴에 붙였다.
두 번째 둔지부가 빛을 발하자, 심협의 속도는 다시 조금 더 빨라진 반면, 도망치던 검은 그림자는 힘이 조금 빠진 듯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심협은 미소를 지으며 곧장 돌진해 검은 그림자 뒤에서 손을 뻗어 뒷덜미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바닥이 막 닿으려던 그때, 검은 그림자는 몸을 확 움츠리더니 크기가 수박에서 사과 정도로 확 줄어들었다.
심협의 손바닥을 피하는 순간, 검은 그림자는 또다시 갑자기 부풀어 오르면서 갑자기 튀어 올라 돌진했다. 그리고 3척 정도 거리를 벌리자마자 온몸에서 갑자기 빛을 발하며 번쩍하고 심협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심협은 그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순간,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 파동도 느낄 수 없게 되자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그가 어찌된 일인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 위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고함이 들려오더니, 뒤이어 힘차고 거대한 힘이 위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땅이 말 그대로 폭파됐다.
콰쾅!
심협은 뒤로 휙 물러나 이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요동치는 힘의 파동에 맞아 가슴이 푹 내려앉았다. 반면 몸은 튕겨나가 땅 위로 곧장 날아갔다.
그가 흙을 뚫고 나오는 순간, 정면에 서슬 퍼런 빛이 스쳐 지나면서 구환대도(九環大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눈을 가로로 스쳐 지나갔다.
심협은 화들짝 놀란 와중에도 발밑에 달빛을 흩뿌리고 몸을 번쩍이면서 가까스로 피해냈다.
이 일격을 피한 뒤, 심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물러나며 주위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10여 장 앞에 키가 1장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음을 알게 됐다.
그는 흑금색 갑옷을 입었고, 겉에는 검은색 얇은 나포(羅袍: 얇은 비단으로 만든 옷)를 둘렀으며, 허리에는 진녹색 띠를 매고 있었다. 또 발에는 진홍색 가죽 장화를 신었고, 손에는 구환대도를 쥔 것이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커다란 곰 요괴였다.
“옳거니! 어디서 온 좀도둑놈이 간덩이가 부어 감히 자죽림(紫竹林)에 함부로 뛰어든단 말이냐?”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심협을 빤히 노려보면서 흉악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
“선배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지요. 후배는 까닭 없이 침입한 도둑놈이 아닙니다. 마물을 쫓다가 잘못하여 이곳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놈이 좀 전에 뛰어 들어갔지요.”
심협은 몸을 가누고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헛소리! 내가 이곳을 지키고 또 결계가 차단하고 있는데, 만약 정말 요마가 있다면 어찌 법안(法眼)을 빠져나갈 수 있겠느냐?”
흑곰 요괴는 벌컥 역정을 내며 다시 공격을 하려 했다.
“그 마물은 자취를 감추는 데 능하여 조금 전까지 곧장 땅속에 숨어서 달아났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이르자 곧장 결계를 뚫고 들어갔지요.”
심협은 초조한 얼굴로 빠르게 설명했다.
한편, 뒤쪽의 무성한 자줏빛 대나무 숲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그 너머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쳇! 도둑놈 심보를 버리지 않고 감히 엿보기까지 하느냐? 간도 크구나!”
흑곰 요괴는 갑자기 크게 고함을 지르며 장도를 다시 휘둘러왔다.
심협은 자신이 적수가 안 됨을 스스로 알았기에 애써 맞서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때, 듣기 좋은 목소리가 문득 자죽림 안에서 들려왔다.
“호법 선배님, 어서 손을 거두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