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500화 (500/1,214)
  • 500화. 무명의 요구

    “주옥 사형…….”

    “무명, 너는 아직도 그리 떠들 낯짝이 있단 말이냐? 너는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일을 망쳐 하마터면 동문을 다치게 할 뻔하였다. 너를 장률당(掌律堂)으로 보내 벌을 받지 않게 한 것만으로도 너희 무씨 집안 체면을 세워준 것이거늘, 나보고 더 어찌하란 말이냐?”

    주옥이라 불린 사내가 눈을 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는 바로 방금 성자도에서 서둘러 돌아온 무명이었다. 그는 분한 마음에 이 주옥 사형에게 하소연을 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호된 꾸중을 듣고야 말았다.

    “주옥 사형, 사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두 사람은 저와 예전부터 원한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감히 우리 보타산까지 찾아왔지 뭡니까?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나서서 그놈들 버르장머리를 좀 가르쳐주세요.”

    무명은 두려워하면서도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말했다.

    “나더러 나서 달라고? 어떻게 나서란 것이냐? 곧장 쳐들어가기라도 하라는 소리냐? 머리가 있기는 한 게냐? 그들은 선행대회에 참가하러 온 이들이다. 적이 아니라 손님이라고!”

    주옥은 그 말을 듣고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어찌되었든 사형께서 저를 도와주실 수만 있다면, 내년에 집에서 보내올 세공(*歲貢: 해마다 바치는 공물)이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명이 크게 결단을 내리고 제안하자 주옥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풀었다.

    무씨 집안은 대당의 명망 높은 귀족으로, 자신들의 적자(嫡子)이자 적손(嫡孫)인 무명을 보타산으로 보내 수행시키기 위해서 적잖은 돈을 썼다. 이후로도 해마다 거액의 불전(佛錢)을 보내왔다.

    또한, 무명의 입문을 위해 힘쓴 주옥과 그의 가족들도 적잖은 세공을 받아왔는데, 그게 배로 늘어난다니, 분명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말이야 쉽게 한다만, 감쪽같이 상대를 혼쭐내는 것이 어디 그리 쉽더냐?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부님은 장률조사(掌律祖師)이시다. 만약 사부님께 들키기라도 한다면, 중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야.”

    주옥이 주저하며 말했다.

    “주 사형께서 섭 사저(師姐)께 마음을 두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대승기로 진입하고자 몇 차례 폐관했지만 실패한 이유는 진월주(辰月珠)가 부족했기 때문이지요. 우리 가족이 마침 석 달 전에 진월주를 한 알을 구했는데, 저를 도와주신다면 조부님께 부탁드려 받아오겠습니다. 조부님께서 제 부탁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건 사형도 아시지요? 사형께서 진월주를 선물해 섭 사저가 대승기를 돌파하시게 된다면 분명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실 겝니다.”

    주옥이 여전히 망설이자 무명은 즉시 독한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너희 집에 진월주가 있다고?”

    주옥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석 달 전 동해의 어느 요괴잡이 도인에게서 거금을 주고 사온 것입니다. 도행이 겨우 3백 년밖에 되지 않는 대합 요괴에게서 난 것일 뿐이지만, 다행히 상태가 썩 훌륭하고 보존도 잘 되어 있…….”

    “마침 내가 이번 대회를 진행하니 뜻밖의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기껏해야 손발이 부러지는 정도겠지. 그보다 강력한 복수를 원한다면 생각지도 말거라. 그랬다가는 책임자인 나도 종문에 추궁당할 것이니. 알겠느냐?”

    무명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옥이 끊어버리며 단호하게 말하자 무명은 하하 웃으면서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아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두 사람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아라.”

    주옥은 다시 탁자 위의 찻잔을 집어 들고 천천히 말했다.

    이에 무명은 즉시 몸을 굽히고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심협과 백소천은 이미 각자의 처소에 들어와 있었다.

    심협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누각 2층으로 올라 방 안에 있는 부들방석에 가부좌를 틀었다.

    단전 앞에 두 손을 모아 원을 만들고 의식을 살짝 움직이자, 순양검배가 그의 단전에서 튀어나와 양손 사이에 가만히 떠 있었다. 이어서 의식을 불러일으키자 체내 법력이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와 가닥가닥 실오라기처럼 검배를 휘감더니, 조금씩 온양(*蘊養: 따뜻하게 품어 기르다)하기 시작했다.

    평소 단전에서도 자신과 검배의 연결에 의지하여 저절로 온양할 수도 있지만, 진도가 너무 느렸다. 더욱이 비검을 온양하는 것은 수련보다 지루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좌선하며 온양하면 효율을 훨씬 높일 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심협은 수명을 늘리기 위해 최대한 빨리 수련경지를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느라 비검을 직접 온양하기보다는 단전이 저절로 온양하도록 내버려둘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당분간 경지를 돌파하기가 어려웠기에, 그 틈에 순양검배를 잘 온양하여 곧 있을 선행대회를 준비하고자 했다.

    저녁이 가까워졌을 때, 심협은 문득 바깥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비검을 거둬들이고 창문을 밀어젖혔다.

    해질녘 노을이 산골짜기 뒤에서 조금 새어 나와 빛과 어둠이 뒤섞여 골짜기 전체를 비추었다. 골짜기와 꽃, 나무와 건물 모두 부드러운 빛에 휩싸여 매우 아름다웠다.

    “심 오라버니.”

    그때, 누각 아래쪽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 보니, 이숙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체격이 그녀와 비슷한 자색 옷의 소녀 하나가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 손은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퍽 얌전한 성격인 듯했다.

    “어찌 오셨습니까?”

    심협은 웃으면서 묻고는 창문에서 몸을 날려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동문에게 들으니, 오늘 두 분이 안개 바다에서 위험한 일을 당했다기에 마음이 놓이질 않아 와보았습니다.”

    이숙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위청 선배님을 만나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심협이 사실대로 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참, 여기는 제가 새로 사귄 벗인데, 이름은 류청이라 합니다. 소개해드리지요.”

    그 말을 듣고 이숙이 말했다.

    “류 도우.”

    심협이 가볍게 포권했다.

    “심 도우를 뵙습니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웃을 때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이 류청이라는 여인도 짧게 인사했다.

    “류 도우께서도 선행대회에 참가하러 오신 겁니까?”

    심협이 물었다.

    “아니요. 이번 대회는 예년과 조금 다릅니다. 각지에 마환(魔患)이 빈번하고 세상이 뒤숭숭하여 문중에서 대규모로 많은 종문을 초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중에 어떤 변고가 생겼는지 불참 서신을 보내온 곳들도 있지요. 류 언니가 속한 종문은 초청 대상에 있지 않지만, 대회를 관람하고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제가 초청해온 것입니다.”

    이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구경하러 왔을 뿐, 참여할 기회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심 도우께서 위세를 떨치는 모습을 보게 되겠군요.”

    류청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심 오라버니 힘내시라고 응원할 것입니다.”

    이숙도 한마디 보탰다.

    “또 어떤 종문들이 이번 대회에 참가했습니까?”

    심협은 그녀들의 말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대당관부, 화생사와 우리 보타산 외에도 용궁, 청련사(靑蓮寺), 구화산(九華山), 거검문(巨劍門), 태응관(太應觀) 그리고 아미산(峨眉山)의 도우들이 왔습니다. 매 종문마다 출규기 제자 한 명씩을 파견하였는데, 인원수가 예년의 3할 정도밖에 안 되지요.”

    이숙의 설명에 심협이 흠칫 놀라 되물었다.

    “용궁에서도 참가합니까?”

    “예, 듣기로는 동해용궁의 구태자께서 참가하러 오셨다더군요.”

    이숙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심협은 이당(*李唐: 당나라 왕조를 일컫는 말) 황실과 용족의 관계가 조금 미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구태자 오홍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내심 기뻐했다.

    또한, 이숙의 말대로 이번 선행대회의 인원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면 자신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어쨌거나 자신과 선행을 놓고 다툴 사람 수가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인원수가 비교적 적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각 문파의 같은 경지 중 가장 훌륭한 제자들이 왔습니다. 우리 보타산만해도 아마 노영(盧穎) 사저가 참가할 겁니다. 지금은 이미 출규 후기의 경지이지요.”

    “이 낭자, 그대들 문중에 섭채주라는 도우가 있지 않습니까?”

    심협은 말을 바꿔 웃으며 물었는데, 그러자 이숙은 퍼뜩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 하마터면 섭 사매를 잊을 뻔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이미 출규기 정점의 경지거든요. 한데…… 그 아이 성정으로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뒤로 갈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채주 그녀가…… 벌써 출규기 정점이라고요?”

    심협은 꽤나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 기쁨이 컸다.

    당시 그 신비한 선배가 섭채주를 억지로 보타산으로 데려간 것은 분명 천부적인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수련 속도가 빠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꿈속의 자신은 더 짧은 시간에 겁을 겪고 진선이 되지 않았던가?

    “심 오라버니, 한데 섭 사매 일은 왜 물으셨어요?”

    이숙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녀는 저의 약혼녀입니다.”

    심협이 담담하게 답했다.

    한데 그 순간, 이숙의 두 눈이 순간 휘둥그레지더니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심 오라버니와 섭 사매가…… 저, 정혼한 사이라고요?”

    이숙이 참지 못하고 외치듯 물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정하신 혼사입니다.”

    심협은 그녀의 반응과 달리 평온하게 답했다.

    이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쩐지…… 주옥 사형이 아무리 잘 보이려 갖은 애를 다 써도 섭 사매가 꿈쩍도 않더라니.”

    “아…….”

    심협은 이숙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렸다.

    “너무 뜻밖의 소식이라 순간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이숙이 미안한 듯 말했다.

    “아닙니다.”

    심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심 오라버니, 그럼 섭 사매를 만나러 가시려는지요? 제가 그 아이와 친하지는 않지만, 그 아이의 동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길 안내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숙은 잘못을 메우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보타산에 왔으니 며칠 뒤 선행대회가 끝나고 나서 만나도 늦지 않지요.”

    심협이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필요 이상으로 나서지 않겠습니다.”

    이숙이 그렇게 말했을 때, 어디선가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심협 자네는 어찌 어딜 가든 미인들과 함께인가? 정말이지 부러워 죽겠구먼.”

    심협이 어처구니 없어하며 돌아보니, 백소천이 한 손에 주홍색 호리병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정강선(精鋼扇)을 부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백 사형.”

    이숙이 멀리서 불렀다.

    “이 사매.”

    백소천도 웃으며 다가와 인사했다.

    이숙은 백소천과 류청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어딜 갔다 오는 게요?”

    심협이 물었다.

    “거검문의 정균(鄭鈞) 도우에게서 술을 한 병 꾸었지.”

    백소천이 술병을 높이 들어 보이며 헤벌쭉 웃었다.

    “여기에도 옛 친구가 있단 말이오?”

    심협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옛 친구가 아니라 방금 알게 된 새 벗이지. 조금 전에 멀리서부터 주향(酒香)이 나기에 가봤거든. 정 도우도 시원시원한 사람이더군. 지기(知己)를 만나 술 한잔한 셈이랄까? 하하하!”

    백소천이 껄껄 웃었다.

    “정균 사형이라는 분의 명성은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이미 출규 후기라고 들었는데, 불과 두 해 전에도 문중 어른과 함께 마족의 음모를 꺾었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하다지요.”

    이숙은 잠시 말이 없더니 말했다.

    “이 사매가 자네에게 몰래 정보를 좀 주러 온 겐가?”

    백소천이 눈썹을 치켜 올리고 짐짓 놀란 척을 하며 말했다.

    “심 오라버니는 선행대회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으신데, 제가 도움을 좀 드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 아닙니까.”

    이숙이 말했다.

    “그럼요, 당연히 아주 좋은 일지요. 하하하!”

    백소천이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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