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99화 (499/1,214)
  • 499화. 냉담하고 쌀쌀맞은 사람

    “무사하시다니 다행이오. 어서 두 도우를 유연곡(悠然谷)으로 모시고 가 투숙 절차를 밟도록 하게나.”

    우 장로가 무명을 슥 쳐다보더니 말했다.

    “예.”

    무명이 대답했다.

    한데 그때, 위청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되었네. 자네는 성자도로 돌아가게나. 이 두 도우는 내가 직접 유연곡으로 안내하지.”

    “소위 사형, 사형께서는 종문의 어른이신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 장로가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감히 위 사숙께 수고를 끼쳐드릴 수 없습니다. 제자가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두 도우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무명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서는 황급히 말했다.

    한편, 심협과 백소천도 조금 뜻밖이었다.

    “그냥 이렇게 하지. 두 도우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지요.”

    위청이 말을 마치고 손을 들어 휘두르자, 앞에 푸른색 비사(*飛梭: 빠르게 움직이는 베틀 북)이 하나 나타났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심협과 백소천은 포권하며 감사를 표한 뒤 비사에 올랐다.

    세 사람은 곧장 하늘로 날아올라 보타산의 주도를 향해 날아갔다.

    “두 분께서는 무명과 구면이십니까?”

    백장 쯤 날아간 뒤, 위청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심협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숨길 것이 없다고 느껴 솔직하게 말했다.

    “일찍이 장안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가 고의로 난처하게 한 것입니까?”

    위청이 물었다.

    “그건…….”

    심협은 그가 이리도 직설적으로 나오니 도리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무명의 자질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집안 배경이 좋아 이 보타산 문중에 인맥이 좀 있는 편입니다. 또 그는 됨됨이가 옹졸하여 앞으로도 나쁜 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 되도록 그를 멀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위청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자연스레 상대의 호의를 알아차린 심협이 공수하며 답했다.

    “우리는 서로 나이 차이도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그냥 도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위청이 말했다.

    “허나…… 좀 전에 우 장로께서 도우를 사형이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저는 문중에서 항렬이 비교적 높은 장로께서 거두신 마지막 제자라 항렬이 덩달아 높아진 것뿐입니다. 두 분께서는 보타 제자가 아니시니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지요.”

    위청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이미 육지로 올라왔다. 아래쪽에는 해안가를 따라 수많은 가옥들이 지어져 있었고, 섬 한가운데의 산지로 갈수록 가옥은 점점 밀집되었다.

    하지만 위청은 착륙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곧장 산 쪽으로 비사를 몰더니, 마침내 두 줄기의 능선이 뻗어 만들어진 골짜기 어귀가 나타나자 멈췄다.

    골짜기의 툭 튀어나온 산벽 위에는 해서체로 커다랗게 ‘유연곡(悠然谷)’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 선행대회에 참가한 다른 문파의 제자들은 모두 한동안 이곳 유연곡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골짜기 안에 있는 사무각에 가셔서 등록하시고 골짜기 안에서 처소를 고르시면 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위청의 제안에 심협과 백소천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들은 푸른 돌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골짜기 안으로 향하던 중 골짜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민간인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은 위청을 보자 뜻밖에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를 ‘위 선사(仙師)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했다.

    위청도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는데, 애써 친절해 보이려 노력하지도, 그렇다고 피하거나 귀찮아하지도 않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에 심협과 백소천 내심 놀라워했다.

    “위…… 도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습니다. 어째서 보타산에는 속세의 잡역부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심협이 호기심에 물었다.

    “보타산에 오신 손님들 모두가 그런 의문을 가지시더군요. 아무래도 다른 종문은 허드렛일을 해도 대부분 외문제자들이 하고, 이리 많은 속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겠지요.”

    위청은 놀랍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예. 저는 거의 대부분의 종문들이 속세 사람들이 지나치게 모이는 곳을 되도록 피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 또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심협의 그 말에 옆에 있던 백소천은 공감한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올 수 있는 범인(凡人)은 온 마음으로 불법을 동경하거나 고통의 바다에 깊이 빠져 헤어나기 어려운 이들로, 자연히 부처를 찾고, 해탈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요행히 선사들의 눈에 띄어 선문에 들어와 수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도 하지요. 다만 아쉽게도 그런 기회는 너무나 아득합니다.”

    위청은 입가를 가볍게 실룩거리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렇군요. 이른바 ‘인간의 도는 아득하고, 신선의 도는 끝이 없다’는 말이 대략 이와 같지요.”

    심협이 공감하며 말했다.

    세 사람은 한담을 나누며 푸른 돌이 깔린 산길을 따라 수백 장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좁다란 통로를 지나자 앞이 탁 트이면서 평탄한 산간 골짜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2층 높이의 독채 나무집이 여러 개 지어져 있었다.

    그중에는 좁은 통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일하게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건물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심협과 백소천이 위청을 따라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뒤에 퉁퉁한 체격의 중년 집사가 앉아 있는 것이 정면으로 보였고, 이 집사는 위청과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 사숙, 사숙께서 어찌 유연곡에 다 오셨습니까?”

    뚱뚱한 집사는 하마터면 머리에서 미끄러져 내릴 뻔한 모자를 고쳐 쓰며 조금 당황한 듯 물었다.

    “별일 아닐세. 선행대회에 참가하러 오신 두 도우를 모시고 왔으니, 이분들께 처소를 마련해주게나.”

    위청은 별 다른 표정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 다른 문파에서 오신 귀빈들이셨군요. 위 사숙께서는 마음 놓으시지요. 사숙께서 친히 모시고 오셨으니, 제자가 반드시 잘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뚱뚱한 집사는 두 손을 맞비비며 알랑거렸다.

    “이분들은…… 됐네. 자네에게 맡기겠네.”

    위청은 그가 오해하는 듯하자 해명을 하려다가 그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말을 마친 그는 곧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서 유유히 떠나갔다.

    그의 모습이 시선 끝으로 사라지자 뚱뚱한 집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반절로 줄더니, 심협과 백소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감히 두 분 도우께 여쭙습니다만, 위 사숙과는 어찌 되십니까?”

    “별 관계는 아니오. 우리도 오늘 위 선배님을 막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심협은 생각 나는 대로 답했다.

    “오, 그거 이상하군요.”

    뚱뚱한 집사는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뭐 이상한 일이오?”

    백소천 역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두 분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위청 사숙께서는 성정이 냉담하고 쌀쌀맞으셔서 종문 안에서는 수행 외에 어떤 일도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처럼 직접 손님을 모시고 유연곡으로 오시는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지요.”

    뚱뚱한 집사는 말끝에 허허 하고 웃었다.

    한편, 심협과 백소천은 그 말에 조금 뜻밖이면서도 오히려 그 위청이라는 인물에게 더욱 흥미가 생겼다.

    “그래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 걸요? 길을 따라 오면서도 많은 이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아주 친절해 보이셨습니다.”

    심협이 짐짓 떠보듯 물었다.

    “그것은…… 두 분께서 보신 이들은 대부분 수사가 아닌 범인들이었지요?”

    뚱뚱한 집사는 잠시 망설이더니만 물었다.

    “그렇습니다.”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는 씩 웃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또한 이상한 점입니다. 위 사숙께서는 문중의 수행자들에게는 웃는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으시는데, 속세의 사람들만 만났다 하면 가끔 걸음을 멈추시고 한두 마디씩 건네시거든요.”

    “가는 길이 다르다면 서로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산 위의 선사와 속세의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드문 일이긴 하지요. 허나 그리 희한할 것까지야 없지 않겠습니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뒤에서 사문의 선배님을 함부로 거론하다니. 안 되지, 안 돼…….”

    뚱뚱한 집사는 제 얼굴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더니 스스로를 나무랐다.

    “위청 선배님께서는 성격이 독특하시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시더이다. 우리도 존경의 뜻을 표하는 바이니 함부로 거론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맞아요. 도우의 말씀이 맞습니다. 함부로 거론한 것은 아니지요.”

    뚱뚱한 집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치고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등록은 어찌 해야 합니까?”

    심협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두 분의 증표를 제게 주시면 제가 이쪽 서책 위에 두 분의 성함과 소속 종문을 기록하겠습니다. 그럼 끝입니다.”

    집사가 설명했다.

    “후배는 심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대당관부를 대표해서 왔지요.”

    “후배는 백소천입니다. 화생사에서 왔습니다.”

    둘은 각자의 신물을 꺼내 집사에게 넘겼다.

    집사는 두 사람의 신물을 받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등록부에 두 사람의 정보를 기록했다.

    “이것은 유연곡의 지도입니다. 두 분께서 보시고 마음에 드는 처소를 하나 고르실 수 있습니다.”

    말하면서 뚱뚱한 집사는 기다란 두루마리 하나를 또 가지고 왔다.

    그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펼쳐놓자 화폭에 한바탕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유연곡의 축소판이 두루마리 위에 나타났다. 건물 하나하나까지 생생했다.

    “이 붉은 누각들은 모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것들입니다. 나머지는 마음대로 선택하실 수 있고요.”

    집사의 설명을 듣고 들여다보니, 골짜기 안의 누각 건물은 모두 백여 채로, 대부분 산골짜기 한가운데의 가장 평탄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몇 채만이 골짜기 안 가까운 절벽과 솟아오른 산봉우리 위에 흩어져 있었다.

    골짜기 한가운데에 위치한 비교적 좋은 곳들은 벌써 누각 다섯 채는 새빨갛게 변해 있었고, 나머지는 백묘(*白描: 동양화에서 색을 칠하지 않고 선으로만 그리는 화법)화처럼 색이 칠해져 있지 않았다.

    “이 두 채가 어떠하오?”

    심협은 잠시 들여다본 뒤, 봉우리 위에 서로 이웃해 있는 누각 두 채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괜찮으니 자네 마음대로 고르게.”

    백소천이 슥 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두 분의 안목이 정말 좋으십니다. 이 두 누각은 위치가 가장 높고 시야가 트여 있어서 2층에 서면 산골짜기의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지요.”

    뚱뚱한 집사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 두 채로 하지요.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심협이 인사를 건네자 뚱뚱한 집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허리춤에서 백옥 도장 하나를 꺼내 두 채의 가옥에 각각 찍었다. 도장에는 인주가 없었지만, 찍는 순간 누각 두 채가 연달아 선홍색으로 변했다.

    “됐습니다. 이곳의 가옥들은 항상 청소하는 잡부들이 있으니, 두 분께서는 곧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뚱뚱한 집사가 말했다.

    한편, 바다와 맞닿아 있는 보타산 주도(主島)의 높은 절벽 위에는 2층짜리 정교한 누각이 하나 서 있었는데, 건물 모퉁이의 비첨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경탄이 절로 나왔다.

    누각 앞에는 마치 앞마당처럼 평평한 절벽이 있었고, 옆에는 해당화나무가 심어져 있었으며, 그 아래쪽 돌 탁자 옆에는 눈보다 더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깊은 눈과 이목구비가 또렷한 잘생긴 얼굴에,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칼은 자금(紫金)을 상감한 옥관을 씌워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영기가 남달라 보였다.

    그는 손으로 백옥 찻잔을 가볍게 문지르면서 곁에 있는 사람이 종알거리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못 참겠다는 듯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옆에 있던 사람은 아직 이를 전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주옥(周鈺) 사형, 이번에는 꼭 그 두 놈을 제대로 혼쭐 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제 분을 삭일 수가 없을…….”

    탁!

    상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청년의 백옥 찻잔이 돌 탁자 위를 세게 내리쳤다. 뜻밖에도 그 백옥 찻잔은 깨지기는커녕 도리어 돌 탁자 위에 동그랗게 자국을 내면서 밑동이 박혀버렸다.

    이 소리가 울려 퍼지자, 종알대던 사람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은근히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하얀 옷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주옥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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