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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97화 (497/1,214)
  • 497화. 악연

    약 반 시진 뒤, 멀지 않은 곳의 해수면 위로 둘레가 불과 수백 장밖에 되지 않는 회백색 섬이 나타났다. 이 섬에는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고, 어렴풋이 초가집이 보였다.

    심협과 백소천 두 사람이 가까이 날아가자 줄곧 휘날리던 물고기 모양 신부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내렸다.

    “도착했군.”

    백소천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바로 이곳이오?”

    심협은 약간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나 그는 신식으로 섬을 훑어보고 나서야 곧장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의 신념이 뜻밖에도 그 볼품없는 초가집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초가집에서 일남일녀가 홀연히 걸어 나왔다.

    심협이 두 사람을 돌아본 순간, 그들은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서로 전혀 달랐다.

    여자는 심협의 얼굴에 시선이 닿자 웃음기 없었던 얼굴에 미소를 지은 반면, 남자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가 표정이 굳어지며 얼굴이 온통 흙빛이 되었다.

    “허!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안내를 맡은 것이 두 분이셨다니.”

    심협이 조금 놀란 듯 허탈해했다. 이 남녀는 다름 아닌 대당왕조의 십구공주 이숙(李淑)과 무명이었던 것이다.

    “심 오라버니께서는 어찌 여기에 오셨습니까? 설마…… 오라버니도 선행대회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이숙이 조금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그녀는 지난번 경하용왕의 귀환(鬼患) 사건 이후로 심협과 육화명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커져서, 다시 만나자 반가움까지 더해져 한없이 친절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무명은 더더욱 언짢아져서는 저도 모르게 소매 안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국사 대인께서 제가 대당관부를 대표해 이번 대회에 참가하도록 특별히 허락해주셨습니다.”

    심협은 무명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으며 답했다.

    한편, 그때까지 한쪽에서 말없이 서 있던 백소천이 불쑥 튀어나왔다.

    “심협, 이분이 자네가 말한 채주 누이, 자네의 약혼녀인가? 그럼 내가 제수씨라고 불러야 하나?”

    “허튼소리 좀 그만하시오. 이분은 우리 황제 폐하의 십구공주시오.”

    심협은 백소천이 더 실수하기 전에 재빨리 끊었다.

    “이분은……?”

    이숙은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소천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공주 전하셨군요. 결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백소천이라 하옵니다. 화생사를 대표해 대회에 참가하게 됐지요.”

    백소천은 심협을 보는 무명의 눈초리가 곱지 않다는 걸 눈치챘기에 그에게는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백 도우는 화생사의 사형이시군요. 우리는 같은 선문에 속한 제자이니 반쯤은 동문인 셈이지요.”

    이숙이 백소천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웃었다.

    “이 사매(師妹)의 그러한 성정은 정말 황가 출신답지 않군요. 저는 좋습니다. 앞으로 백형이나 백 오라버니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도우니 뭐니 할 것 없이 말이지요. 하하하!”

    백소천은 붙임성 좋게 웃으며 말했다.

    “네, 좋아요. 한데…… 백 사형이 말씀하신 채주 누이는 누구입니까? 심 오라버니께서 이미 혼인하셨나요?”

    이숙이 웃으며 물었다.

    “그것은…….”

    “거참, 왜 그리 말이 많소? 공무 처리가 우선 아니오.”

    백소천이 막 입을 떼려는데 심협이 끼어들어 말허리를 잘랐다. 본래도 가까웠던 이들은 여러 일을 겪으면서 매우 친해진 터라 심협의 말투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퍽 달랐다.

    “그건 그래.”

    백소천도 겸연쩍어 답하며 넉살 좋게 웃었다.

    두 사람은 각자 도첩(*度牒: 관청에서 승려에게 부여한 출가 증명서)과 신물을 꺼내 이숙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마치 없는 존재처럼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무명이 성큼 다가와 자세히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상 없군요. 두 분께서는 저를 따라 문중으로 가셔서 등록하시지요.”

    그러자 이숙이 끼어들었다.

    “무 사형, 괜찮으시면 이 두 분은 내가 안내할까요?”

    “사매, 여기서 류청(柳晴) 도우를 기다려야 하지 않은가? 이런 사소한 일은 내게 맡기면 되네. 마음 놔. 내 반드시 사매의 두 오라버니들을 아주 온당하게 배정할 터이니.”

    무명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답했다.

    이숙은 멀리 바다와 하늘을 번갈아 보더니 주저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 낭자께서는 사람을 더 기다리셔야 한다면 번거로울 것 없이 무 도우에게 길을 안내해달라고 하지요. 어차피 우리는 한동안 귀 문중에 있을 것이니 지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좋습니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이숙은 잠시 망설이더니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무명은 심협과 백소천을 데리고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초가집 안은 평범하게 꾸며져 있어서 팔선상(八仙床: 한쪽에 두 사람씩 앉을 수 있는 사각 상)과 기다란 의자 네 개뿐이었고, 중간에는 찻주전자가 있었다. 무명은 두 사람에게 차를 권하지도 않고 곧장 초가집 뒷문으로 향했다.

    문을 지나자 하늘이 갑자기 밝아진 듯하더니 눈앞이 탁 트였다. 더는 앞서 바깥에서 보았던 푸른 바다 위에 있는 쓸쓸한 외딴섬이 아니었다.

    초가집 문 밖에는 폭이 거의 백 장에 달하는 대리석 광장이 있었고, 양옆으로는 누각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보타산의 상징이 달린 복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등 시끌벅적했다.

    광장 뒤쪽의 지세는 점점 높이 솟아올라 높이가 거의 백 장에 가까운 산봉우리를 이루었고, 산세를 따라 나선형의 산길이 정상 위까지 곧장 뻗어 있었다.

    산 중턱에는 평평한 절벽이 있었는데, 위에는 보타산 제자 몇 사람이 공중에 뜬 채 손에 끌과 망치를 들고 벽을 두드리고 깨는 것이 벽화를 조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불타설법도(佛陀說法圖)를 조각 중인 듯했다.

    “보타산 제자들에게는 저런 과제가 있는 겁니까?”

    심협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명은 그의 시선을 따라 절벽을 흘끗 보더니 피식 비웃었다.

    “저것들 말입니까? 저들은 보타산에 일하러온 잡부들에 불과합니다. 어찌 우리 보타 제자일 리 있겠습니까? 저자들에게 자격이나 있겠소?”

    “부처께서는 중생이 평등하다고 하셨소. 그대는 같은 사문(*沙門: 계율에 따라 출가해서 도를 닦는 불교도의 총칭)의 제자이면서 어찌 그리 말하는 게요?”

    백소천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삭발하고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불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믿고 따랐기에 무명의 말에 퍽 언짢았던 것이다.

    무명은 그의 말에도 씩 냉소를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백소천은 벌컥 화가 났지만, 심협이 가볍게 고개를 젓자 꾹 눌러 참았다.

    두 사람은 무명을 따라 성자도 위의 산봉우리를 돌아 섬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본 바다 위에는 연무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이어져 있는 섬들의 봉우리 윤곽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는데 각각의 거리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곳은 허장해(虛障海)입니다. 해수면에는 약간의 안개가 껴 있는데, 무독무해하지만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하니 섣불리 비행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우리 보타 제자들이 도해주(蹈海舟)를 타고 인도하여 바다를 건너가야만 하지요.”

    무명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해주시오.”

    무명이 손을 휘두르자 앞쪽 해안가 위에 길이가 6척쯤 되는 작고 검은 배가 나타났다. 선체의 양옆에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어 퍽 정교해 보였다.

    “따라오시지요.”

    무명이 말을 마치고 앞장서서 작은 배 위로 몸을 던졌다.

    심협과 백소천도 그 뒤를 바짝 따라 도해주에 올라섰다.

    무명은 한 손으로 법결을 맺고 두 손가락을 모아 도해주 위를 짚으며 한 줄기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선체의 물결무늬가 밝아지면서 양쪽 바닷물이 저절로 길을 안내했고, 선체가 살짝 흔들리더니 바다 바깥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작은 배의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자도에서 멀어져 해무 속으로 들어서게 됐다.

    바다 위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심협은 잠깐 시도를 해보고는 이 짙은 안개가 사람의 신식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그 속에 들어가면 시선이 가로막히고 신식도 방해를 받아 방향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헛수고할 것 없소. 진선경 수사의 신식도 이 안개를 뚫기는 어려울 테니 그대들이 과욕을 부릴 필요는 없지요.”

    무명은 심협과 백소천이 무엇을 시도하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이것 역시 귀문(貴門)의 호산법진(*護山法陣: 산을 보호하는 법진)입니까?”

    심협은 불쾌한 내색 없이 신식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아닙니다. 이 해역은 일찍이 상고시대 신마대전(神魔大戰)의 전장이었는데, 바다 밑바닥에 많은 암초와 해구들이 있고, 해수면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서 지나가던 배들이 자주 침몰하여 실종되곤 했지요.

    이후, 보살께서는 큰 서원(誓願: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일)을 세우시어 신통력으로 보타 모산(母山)과 열여덟 자산(子山)을 옮겨오셨습니다. 그리고 산을 바다에 넣으셔서 지금의 구조를 이루게 되었지요. 열여덟 개의 자산이 이루고 있는 법진이야말로 호산법진입니다.”

    무명은 의외로 귀찮은 내색 없이 설명했다.

    “그렇군요. 보타산이 지키고 있으니 알맞게 이 변화무쌍한 바다를 제압하고, 배가 지나가도 법진에 의해 이곳에서 멀어질 뿐, 더 이상 침몰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겠군요.”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호산법진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종문의 보호벽이고, 바닷속에는 약간의 수단이 준비되어 있으니 도적놈들이 섣불리 잠입하려 한다면 끝……?”

    무명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도해주가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툭 튀어나온 암초에 심하게 부딪혔다. 이에 그는 중심을 잃은 듯 튀어나가 곧장 바닷속에 빠져버렸다.

    심협과 백소천도 비틀거리긴 했지만 곧 몸을 가누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가서 보았을 때, 이미 무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허! 자네 그놈과 무슨 원한 있나? 우리가 오자마자 으름장을 놓고 말이야.”

    백소천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예전에 충돌이 좀 있었소. 허나 지금까지도 마음에 품고 있을 줄은 몰랐소.”

    심협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사형의 그 신부(信符: 출입증)를 아직도 쓸 수 있소?”

    심협이 물었다.

    “이 물건은 보타산을 가리키는 것이라 밖에서만 쓸 수 있네. 우리 모두 보타산 안에 있으니 개뿔이나 소용이 있겠는가.”

    백소천이 손목을 들어 올리고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우리 손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허나 이 짙은 안개는 실로 괴상하오. 앞서 무명이 한 말들이 전부 거짓은 아닌 듯하니, 섣불리 비행하지 않는 게 좋겠소.”

    심협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망망한 바다 위에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자네 말이 맞네.”

    백소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며 양손 손가락을 모아 도해주 앞 허공을 가리키자, 법력 한 줄기가 그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도해주의 부적 문양이 희미하게 반짝이면서 선체가 미미하게 흔들리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더니 곱절이나 되는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도해주에서 빛이 번득이면서 선체가 갑자기 빠르게 돌진해 앞쪽의 암초들을 그대로 뛰어넘고 단숨에 해수면을 향해 내리꽂혔다.

    심협과 백소천은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마터면 바다로 떨어질 뻔했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으나, 심협이 어수지술(御水之術)로 물결을 끌어와 선체를 떠받치자, 배는 그제야 무사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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